516. 강태공이 된 한빈 (2)
제갈공려의 말에 설화와 청화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갈공려는 한빈의 완맥을 잡았다.
완맥을 잡고 잠시 살피던 제갈공려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제갈 언니, 공자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래도 돌이킬 수…….”
제갈공려가 말끝을 흐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설화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설화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상념에 잠긴 듯한 설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중앙에 있는 연못으로 걸어갔다.
설화는 그곳에서 뭔가를 낑낑거리며 끌고 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설화가 가져온 것은 연못, 즉 만월경에 떠 있던 조그만 배였다.
문장과 술이 든 바가지를 놓았던 바로 그 조각배였다.
설화는 한빈을 들어 작은 배 위에 눕혔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가 다급히 설화의 소매를 잡았다.
“설화야, 대체…….”
제갈공려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전음이 분명했다.
전음으로 목소리를 구분하기는 뭐했지만, 한빈의 말투가 분명했다.
-모른 척 설화의 말에 따라 주십시오, 제갈 누님.
누님이란 호칭을 쓸 사람은 여기에 한빈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천당가에서부터 쓰던 사적인 호칭.
제갈공려는 사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슴에 단검이 박힌 상황.
한빈의 오른손은 단검의 날을 잡고 있었다.
단검을 뽑아내려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친 것 같았다.
거기에 한빈의 가슴 주변에는 피가 흥건했다.
모든 정황은 한빈의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니 증거가 필요치 않았다.
완맥을 잡아도 혈맥 속에서 조금의 생기도 느낄 수 없었다.
거기에 숨도 멈춰 있었다.
이건 귀식대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제갈공려는 한빈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빈에게 전음이 온 것이다.
제갈공려는 뛰는 가슴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표정을 수습했다.
제갈세가 출신답게 현 상황을 냉철하게 계산하기 시작한 제갈공려.
그녀가 눈을 빛냈다.
제갈공려는 먼저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어색하다.
아마 설화가 가장 먼저 한빈의 전음을 받았던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전음을 받은 것이 제갈공려,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제갈공려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한빈이 전음을 보낸 기준을 알 것만 같았다.
아마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있는 자에게만 보낸 것이 분명했다.
청화나 소군 혹은 효명이 한빈의 상태를 안다면?
아마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펄쩍 뛸 것이 눈에 훤했다.
그에 비하면 설화는 다른 이들과 달라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나이는 어려 보여도 강호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설화가 작은 배에 매달아 놓은 밧줄을 끌기 시작했다.
스륵.
작은 배가 설화의 손에 끌려온다.
설화는 아무 표정 없이 배를 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장의사가 관을 끌고 가는 듯한 비장함이 묻어났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먼저 나선 것은 효명 공주였다.
“지. 지금 신선 오라버니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언제까지고 차가운 데 계시게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아.”
효명 공주가 입을 벌렸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을 하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물론 누구도 설화의 행동에 대해서 나무라지는 못했다.
한빈의 죽음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없으니까.
* * *
설화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유림 서원 내에 있는 불당이었다.
불당의 위에는 현판 하나가 고풍스러운 필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마치 신선이 쓰고 간 듯한 정갈한 필체.
정심당(正心堂).
이곳 유림 서원에는 불당뿐 아니라 도관도 있었다.
설화가 정심당으로 한빈의 시신이 담긴 작은 배를 끌고 오자, 가장 놀란 것은 효명 공주와 장유중이었다.
이곳은 효명 공주가 잠시 숨어 있던 안가가 있는 곳이었다.
유림 서원은 황궁의 인물이 제법 많이 방문하는 관계로 불당과 도관의 안쪽에 사람들의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놓았다.
수많은 전각 중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유중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당에는 왜 온 것이지? 그것도 팽 유생의 시신을 가지고 말이다.”
“우리 공자님은 평소 관음보살의 현신이라 불리셨어요. 하북 땅에서는 하북팽가의 일원으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생불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셨고요. 그러니 공자님이 휴식을 취하기에 이곳 불당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죠.”
“허허, 그 하북 땅의 생불이 팽 유생이었던 말이더냐?”
“네, 그래요. 공자님은 평소에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선행을 드러내는 데는 인색하셨죠.”
말을 마친 설화는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물었다.
“그럼 계속 여기에서…….”
“공자님이 쉬시려면 조금 더 은밀한 곳이 필요할 듯싶어요, 학장님.”
“은밀한 곳이라면…….”
“저기요.”
설화가 정심당 안에 있는 작은 불상 몇 개를 가리켰다.
작은 불상은 정확히 네 개였다.
불당의 좌측에 나란히 놓여 있는 조그마한 불상은 사천왕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한숨을 토해 냈다.
“험.”
“안 되는 건가요? 제가 알고 있으면 더는 비밀이 아니잖아요. 이곳의 비밀은 청화도 알고 공자님도 알고 있어요.”
“그래. 무슨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이래야 팽 유생에게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장유중이 장혜화를 바라봤다.
장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도울게요.”
“그래, 고맙다.”
말을 마친 장유중이 사천왕의 모습을 한 작은 불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으로 간 장유중은 작은 불상을 잡았다.
정확히는 그 자리 그대로 불상의 위치를 돌리고 있었다.
어떤 불상은 뒤를 보게 만들고 어떤 불상은 옆을 보게 만들었다.
장유중과 장혜화는 불상을 차례대로, 동, 서, 북, 남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불상을 움직였다.
그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게 만들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갈공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기관 장치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기관이 작동되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유중과 장혜화는 불상을 몇 번 더 움직인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의 모습에 제갈공려가 물었다.
“대체 뭘 하신 건가요? 학장님.”
“역시 제갈세가는 믿음직하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곳 정심당을 설계한 것은 바로 제갈세가의 제갈진우 선생님이시네.”
“제갈진우라면…….”
“백 년 전 중원제일의 천재로 불리던 분이지. ”
“그분은 우리 가문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시죠. 진법과 기관 분야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분을 따라갈 후인이 없다고 하죠. 그런데, 그분이 이곳을 설계하셨다고요?”
“그렇다네. 그런데도 그분의 후인이 이곳에 대해서 모른다면 이제까지 비밀을 철저히 지키신 게지.”
장유중은 은은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것도 잠시, 불당 안에 놓인 작은 배를 바라보고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담담한 척했지만, 그는 지금 요동치는 가슴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사실 장유중은 한빈을 자신의 후인으로 삼으려 했다.
그를 잘만 가르친다면 이 나라의 기둥 여럿을 길러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림 서원을 한빈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다.
그 정도로 장유중의 눈에는 한빈이 보물로 보였었다.
그렇게 점찍어 놓은 후인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그동안 정리해 놓은 학문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물론 옆에 다른 이도 있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다.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설화가 자신의 공자가 하북의 생불이라 불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잘 유지되었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하북 땅의 생불에 관한 이야기는 장유중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을 하나를 혼자 힘으로 살렸으며, 어떤 마을의 불상은 그의 마음에 감복하여 하북 땅을 바라보고 있다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 불상은 물론 장운현의 와불이었다.
당시 지하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불상이 움직여 방향을 바꾼 것이지만, 세인들은 그것을 생불이라 불리는 의인에 불상이 반응한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사실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한빈을 비롯한 몇몇밖에 없었으니, 이것은 사실로 굳어진 상태였다.
소문은 소문을 낳는 법. 그렇게 생불에 대한 전설은 이곳 유림 서원에까지 전해졌다.
생불이란 단어가 너무 강렬하기에 생불과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같은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수장 근처의 백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전설의 생불이 바로 눈앞에 싸늘한 주검으로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제갈공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장유중은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갔다.
설화는 작은 배를 끌고 장유중의 뒤를 따랐다.
모두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제갈공려만이 남았다.
번뜩 정신을 차린 제갈공려는 재빨리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그들이 통과한 것은 불상 뒤의 벽이었다.
장유중은 그 벽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다.
진법과 기관 장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방을 숨기고 있었다.
거기에 방을 열려면 불상을 정확하게 옮겨야 하고 말이다.
그들의 뒤를 따른 제갈공려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이곳은 넓었다.
중요한 것은 넓을 뿐 아니라 화려하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고가의 도자기에 족자까지.
거기에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보면 이곳이 누군가에 의해 관리된 곳이라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들의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갈공려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입술에 자물쇠를 채운 듯 새근새근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어색한 침묵이 흘러갈 때 장혜화와 눈이 마주쳤다.
장혜화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무래도 한빈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 같았다.
제갈공려의 입술이 꿈틀댔다.
한빈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 줄까 해서였다.
그것도 잠시, 제갈공려는 고개를 저었다.
한빈이 자신의 상태를 숨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
그때 장혜화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제갈 언니, 저기 보세요!”
“어딜…….”
“저기요!”
말을 마친 장혜화는 정신없이 한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도 같이 뛰어갔다.
다소 흥분한 장혜화의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효명 공주와 장유중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장혜화가 가리킨 곳은 한빈은 손이었다.
한빈은 한쪽 손은 가슴으로 심장에 박힌 단검을 잡고 있었으며 한 손은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장혜화는 한빈이 늘어뜨리고 있는 손을 가리켰다.
“움직였어요.”
“…….”
“진짜로 움직였어요. 그리고 저 손 안쪽에 뭔가 있는데요?”
장혜화가 한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손이 꿈틀 움직였다.
손을 내밀던 장혜화가 놀라 뒷걸음쳤다.
“어머.”
장혜화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이 작은 숨을 뱉어 냈다.
“휴우.”
“어, 어떻게?”
장혜화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릴 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려던 장혜화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빈이 입술에 검지를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