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13화 (611/621)

513. 선택 (4)

복면 고수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양쌍마와 유생으로 변장한 복면인은 모두 효명 공주를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효명 공주를 떠올리자 한빈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비밀 공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효명 공주를 사로잡으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눈앞에 괴인은 누군가의 목을 가져가려고 한다고 선포했다.

거기에 더해 효명도 아니라고 하면?

한빈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소군이 억지로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저자를 알아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복면 고수가 노리는 것이 소군일까?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적이 눈앞에 있고, 적의 몸에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한빈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굴 원하는지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크허헐. 그럼 중요한 건 뭔가? 일단 한번 들어 보고 싶군.”

“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원하는 목숨도 하나야. 혹시 궁금하지 않아?”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복면 고수가 안광을 빛냈다.

그의 기세도 변했다.

달빛을 받은 그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순간 효명 공주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안쪽으로 먼저 들어간 유생들 대부분도 뒤쪽으로 물러났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 때문이다.

한빈의 지시대로 만월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설화도 우혈랑검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복면 고수의 눈빛만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

한빈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제갈공려에게 부탁한 팔괘진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부탁한 팔괘진은 제갈세가의 진법 중 조금 특수한 것이었다.

제갈공려가 진법을 설치하기 전 한빈은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평범한 팔괘진이 아닌 만근팔괘진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만근팔괘진은 팔괘에 세상의 무게를 담은 진법이었다.

여기서 만근은 정확한 무게는 아니었다.

진법에 갇힌 자의 무공이 강할수록 그 무게는 무거워진다.

그래서 ‘세상의 무게’라는 표현을 쓴다.

상대가 한빈 자신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되면 만근팔괘진으로 그를 유인할 터였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세상의 무게를 이겨 낼 수 있을까? 물론 한빈도 당해 낼 수 없다.

만근팔괘진 안에 갇힌다면 상대나 자신이나 똑같이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마지막 수단이었다.

사실 한빈의 계획은 간단했다.

만근팔괘진은 그도 위험하게 하지만, 한빈도 위험하게 만든다.

세상의 무게는 그들의 무공을 억누른다.

백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를 십으로 만들며, 백오십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를 십오로 만든다.

다만, 진법 밖에서 안쪽을 공격하지는 못한다.

진법 안에 있는 고수끼리 승부를 봐야 한다.

한빈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한 가지였다.

오십(五十)이라는 격차가 단 오(五)라는 차이로 줄어든다는 점이다.

물론 만근팔괘진으로 유인할 일이 없다면 더 좋다.

그때 복면 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끄는군. 다 속셈이 있겠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갈공려가 만근팔괘진을 만드는 데까지 아마도 일각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는 잠시 승부를 미루는 것이 맞았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속셈은 누구나 있지. 안 그런가? 노인장.”

“노인장이라? 참 정겨운 호칭이군.”

“정겹다고 하니 고마워. 그런데 그 가면은 좀 벗지. 답답하지 않은가?”

한빈은 그의 가면을 가리켰다.

그는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냥 귀여운 토끼가 아니라 조각났다가 다시 이어 붙인 듯한 기괴한 모습의 토끼였다.

“나이가 들면 찬바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나는 아직 걱정할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

“내 앞에서 나이를 속이는군. 반로환동 했다고 해도 세월이 쓸고 간 흔적은 내공에 남아 있는 법이네만은……. 크허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상대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헛소리. 일단 가면은 벗지. 복면 위에다가 토끼 가면까지 쓴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아마도 밥 먹기 전이라면 절대 보지 말아야 할 정도야.”

“이놈!”

복면 고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그의 기세는 다시 달라졌다.

한빈이 그를 자극하는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숨기고 있는 진짜 경지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살짝이나마 드러낸 그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한빈의 표정이 바뀌었다.

승부에 대한 계획을 다시 수정해야 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무림삼존과 같은 경지를 이루는 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인 기세를 보면 그 윗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세를 드러내자 입구 쪽에는 유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기세를 견뎌 내지 않고 자리를 피한 것이다.

뒤쪽에는 효명 공주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한빈은 효명 공주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신선 오라버니는 누구고?

왜 목숨을 걸고 여기에 남는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소군이 바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한빈이 말릴 틈도 없이 토끼 가면을 향해 외쳤다.

“내 목숨을 거둬라, 악적아! 그리고 그만 사라져!”

소군의 외침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멀리서 몰래 진법을 설치하던 제갈공려마저도 손을 멈출 정도였다.

뒤쪽에 있던 장유중과 장혜화는 서로를 바라봤다.

장혜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라버니, 소군이 신분은 뭐예요?”

“팽 유생의 시녀 겸 호위로 등록되었다만은…….”

“그런데 왜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라고 하는 거예요?”

“충성심이 강한 모양이구나.”

“팽 유생이 인복이 있네요.”

“그럴 만한 행동을 하니 저리 따르는 것이 아니겠냐?”

장유중은 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장혜화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그때 효명 공주가 말했다.

“신선 오라버니니까요.”

“신선 오라버니요? 그러니까 저기 팽 유생이 신선 오라버니라는 거예요? 공주마마.”

장혜화가 놀라 묻자 효명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 싫다는 모습이었다.

그때 토끼 가면이 웃었다.

“크허헐, 마치 경극을 보는 것 같구나. 네년이 누구기에 목을 내놓겠다는 것이냐? 말할 시간도 아깝지만, 나를 웃겼으니 상을 주마.”

순간 토끼 가면의 손에서 은빛 광채가 나왔다.

그 은빛 광채는 파공성을 내며 날아왔다.

슈웅!

눈 깜짝할 사이에 소군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은빛 광채.

화살보다 더 빠른 광채를 소군이 피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소군의 앞에서 울려 퍼졌다.

까아앙!

마치 거대한 망치로 쇠를 내려치는 듯한 굉음.

눈앞에 번쩍이는 섬광은 덤이었다.

순간 광채가 하늘 위로 치솟는다.

소군은 석상이 되어 앞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는 월아가 검신을 뽐내고 있었다.

소군은 그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토끼 가면이 암기를 자신에게 쏘아 냈고, 한빈이 그것을 검 면으로 튕겨 낸 것이다.

암기와 월아의 검신이 부딪히며 섬광을 만들어 냈고 말이다.

그럼 그 암기는 어디에 있을까?

소군은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작은 은빛 점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내려온다.

한빈이 튕겨 낸 암기가 분명했다.

가속도가 붙은 암기가 소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 할 때였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낚아챘다.

탁.

소군이 외쳤다.

“공자님, 그건……!”

“은전이지.”

한빈이 씩 웃으며 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에는 은전 하나가 빛을 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한빈이 은전을 소군에게 건넸다.

“저 노인장이 건네는 용돈이다. 잘 챙겨라.”

“저는 필요 없어요. 그냥 공자님이 돌려주세요.”

소군이 은전을 내밀었다.

한빈은 은전을 받아서 상대 쪽에 날리려고 초식을 떠올렸다.

손을 뻗던 한빈은 동작을 멈췄다.

은전의 모양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은전이라고 다 같은 은전이 아니었다.

화폐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었다.

은전에 새겨진 문양은 적어도 백 년은 지나 보인다.

한빈은 은전을 품에 넣었다.

그때 토끼 가면이 외쳤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테냐? 내가 찾는 것은 적룡 너 하나의 목숨이면 족하다!”

“적룡?”

“세간에서 적룡대협이라 불리는 네놈의 목숨 말이다.”

말을 마친 토끼 가면이 훌쩍 뛰어 앞으로 나왔다.

한빈도 월아를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지금 나보고 적룡대협이라 말하는 건가?”

“아닌가?”

“대의를 알고 강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내가 적룡이라고?”

“그럼 아닌가? 피에 물든 붉은 무복은 세인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지.”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적룡대협의 정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착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토끼 가면의 옆구리에서 번쩍이는 구결은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그때 멀리서 제갈공려가 손짓했다.

만근팔쾌진이 완성되었다는 신호였다.

한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열까지 세겠습니다! 비동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의 목숨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뒤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한빈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이 되자 한빈은 몸을 날렸다.

‘일촉즉발.’

한빈의 몸이 화살처럼 토끼 가면에게 날아갔다.

토끼 가면은 은은한 미소를 피워 내는 것 같았다.

물론 느낌이었다.

가면 속 표정까지 볼 수는 없으니까.

한빈이 노리는 것은 그의 심장.

점점 가까워지는 둘의 간격.

토끼 가면이 슬쩍 좌측으로 돌며 한빈의 검을 흘려 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돌리더니 한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때였다.

한빈의 검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그의 심장을 노렸다.

한빈의 머리를 내려치려던 토끼 가면이 뒤쪽으로 물러섰다.

한빈도 마찬가지로 뒤쪽으로 물러섰다.

펄쩍 뛴 한빈은 만월경의 가운데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재빨리 단검 만월을 빼냈다.

순간 저 멀리서는 비동의 문이 닫혔다.

토끼 가면은 뒤쪽 상황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왼손에는 만월.

오른손에는 월아를 든 한빈이 상대를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상대가 경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중거가 바로 용린검법에 나타난 글귀였다.

[무공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용린검법의 초식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한빈은 그와 첫 합에서 성동격서를 사용했다.

성동격서는 상대의 무공이 높다면 이 할의 확률로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귀가 나온다는 것은 기본적인 격차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글귀 때문이었다.

[상대가 강하면 얻을 수 있는 구결도 많아집니다.]

즉 황금빛 점 하나에 하나의 구결이 아닌 그 이상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상대의 경지와 무관하게 펼칠 수 있는 초식을 이용해야 했다.

‘부창부수’

순간 단검 만월과 월아가 검명을 토해 냈다.

우우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