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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12화 (6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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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따리를 바라보던 제갈공려는 올 게 왔다고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 모습에 장혜화가 물었다.

    “언니, 대체 왜 한숨을 쉬세요?”

    “저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대충 감이 잡혀서 그래, 동생.”

    “감이 잡히다니요?”

    “아마도 저기에는 계약서가 들어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중 대부분은 계약서를 써야 하고.”

    “…….”

    장혜화가 말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양석봉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갈 학사님.”

    “이건 강호인들끼리의 이야기라서 양 유생은 몰라도 돼요.”

    “저는 벌써 썼습니다. 그래서 여쭤본 겁니다.”

    “아, 벌써 인연을 맺었군요.”

    “인연이라니요?”

    “팽 공자는 인연을 계약서로 맺습니다.”

    “인연이요?”

    깜짝 놀란 양석봉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포박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포승줄에 감긴 괴인들은 누에고치와 흡사해 보였다.

    제갈공려가 양석봉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장혜화가 제갈공려의 옆구리를 찔렀다.

    “언니, 계약서가 아닌데요.”

    “동생, 뭐라고…….”

    제갈공려는 말끝을 흐리며 한빈의 손을 바라봤다.

    한빈의 손에는 포승줄이 들려 있었다.

    한빈은 괴인들을 다시 포박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눈 깜짝할 사이에 괴인들을 포박하는 한빈.

    사실 제갈공려가 놀란 것은 포박하는 한빈의 모습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고수와 같은 한빈의 포박술도 물론 놀라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설화의 보따리였다.

    제갈공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화야,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괜찮겠지?”

    “네, 말씀하세요.”

    “대체 그 보따리에는 안 들어 있는 게 뭐지?”

    “안 들어 있는 거라니요?”

    “내가 사천당가에서부터 쭉 지켜봤는데, 보따리에 안 들어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에이, 안 들어 있는 것도 많아요.”

    “그게 뭔데?”

    “예를 들어 당과 같은 거요.”

    “당과?”

    “당과는 다른 주머니에 넣어 다니거든요.”

    설화가 옆구리에서 기다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단검을 넣어 두면 딱 알맞은 크기였다.

    설화가 주머니를 열었다.

    “하나 드실래요?”

    “아, 아니. 됐다, 설화야.”

    제갈공려가 손을 내저었다.

    황당한 모습에 장혜화는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 당과라니!

    거기에 없는 게 없는 보따리라니!

    그저 예의 바른 유생인 줄 알았던,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그의 일행이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놈들은 저 구석에 몰아넣고 우린 여길 나간다.”

    “네, 공자님.”

    “바로 옮길게요.”

    설화와 청화가 괴인들을 옮겼다.

    그때 장혜화가 물었다.

    “여기에다가 두면 어떻게 해요?”

    “열쇠가 없는 한 여기보다 완벽한 감옥은 없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장혜화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여기 놔두면 굶어 죽을 것 같은데요.”

    “저들의 기척으로 보아 기본적인 귀식대법은 익히고 있을 겁니다. 저들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자백받기도 쉬울 겁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귀식대법의 기본은 신체의 활동량을 줄이는 것이다.

    신진대사조차 느리게 만들어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는 수법.

    느려진 신진대사 덕분에 귀식대법을 펼치면 밥을 안 먹고도 보름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앞장섰다.

    괴인들을 구석으로 옮겨 놓은 설화와 청화가 그 뒤를 따랐다.

    달빛이 입구 쪽에 스며들자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한빈은 먼저 입구를 나섰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폈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한빈이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모두가 발길을 멈췄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등골을 따라 올라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물론 원인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저 본능일 뿐이었다.

    음양쌍마와 마교 고수인 마원을 제압했다.

    물론 모두가 같이 공격했다면, 저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저 자리에…….”

    한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묘한 위기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멀리 쓰러져 있던 음양쌍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마원의 등에는 음양쌍마의 무기인 용조수가 꽂혀 있었다.

    누가 봐도 음양쌍마가 마원을 해하고 도망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 꾸며 놓은 상황이 분명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용조수를 저리 버리고 도망갈 음양쌍마가 아니었다.

    한빈이 저 상황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만월이나 월아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빈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주변을 살피던 한빈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심각한 한빈의 모습에 제갈공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팽 공자.”

    “누군가 있습니다.”

    “누군가라면…….”

    “상대는 분명히 무림삼존의 아래가 아닙니다.”

    “삼존이라고 했나요?”

    “네, 무림삼존의 아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교의 교주?”

    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마교 교주는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뭐, 감입니다.”

    한빈의 말에 제갈공려가 미간을 좁혔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제갈공려는 표정을 풀었다.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는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저희가 다 힘을 합쳐도 무림삼존 중 하나를 이길 수 있을까요?”

    “흠.”

    제갈공려가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갈공려 누님은 만월경의 좌측 열 걸음 부근에 팔괘진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지만 혹시라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누님이라…….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제갈공려가 피식 웃었다.

    사천당가에서의 사건 이후로 처음 들어 보는 호칭이었다.

    당시 한빈은 그녀를 누님이라 불렀었다.

    제갈공려는 학우선을 들고는 재빨리 만월경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한빈은 설화와 청화를 바라봤다.

    “너희 둘은 오른쪽에서 기다려라. 설화는 기감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청화는 다가오는 자가 있으면 체내의 모든 독을 쏟아부어도 된다.”

    한빈의 말에 설화와 청화가 낙엽 밟는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사-삭.

    둘의 경공술에 뒤쪽에 있던 이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소군이 손을 들었다.

    “저는요?”

    “너는 나머지 사람들과 안쪽에 피해 있거라.”

    “저도 도울 수…….”

    “너는 도울 수 없다.”

    한빈이 고개를 흔들자 소군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아, 알았어요.”

    한빈은 내공을 담아 외쳤다.

    “강호인이 아닌 자는 모두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죽기 싫다면! 여기에 남아서 싸우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곳에 남겠다면 강호인으로 인정하겠습니다. 강호인의 은원에 유생이 끼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한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목소리에 모두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대부분의 유생이 입구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한빈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도 도울래요. 저는 신선 오라버니를 도울 거예요?”

    그녀는 다름 아닌 효명 공주였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장유중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니 됩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아니에요. 저는 여기 남을 거예요. 신선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벌써 죽었을 거예요.”

    “신선 오라버니가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안으로 피하셔야 만나시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벌써 만났어요. 그리고 모두가 저를 노리고 온 자들이잖아요. 제가 피하면 한 나라의 공주로서 어째 위신이 서겠어요? 올 테면 오라고 하세요. 제가 미끼가 되면 신선 오라버니가 잡아 줄 거예요. 그렇죠?”

    효명 공주가 묻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 오라버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한빈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진심이었다.

    물러나지 않은 이상 효명 공주도 강호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맞았다.

    이곳에 남았다는 자체가 가슴속에 칼을 품었다는 뜻이다.

    “그 투지 기꺼이 받지요.”

    “저도 남을래요.”

    이번에는 소군이었다.

    “네 투지도 받으마. 대신!”

    한빈이 짧게 외치자 효명 공주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목숨은 알아서 챙기는 게 규칙입니다.”

    한빈의 말에 효명 공주가 어깨를 흠칫 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야무진 표정으로 외쳤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곧 문이 닫혔다. 비밀 공간은 문이 닫히자 평범한 돌벽처럼 보였다.

    그때 흑의인 하나가 만월경의 위로 날아와 착지했다.

    탁.

    꼿꼿이 선 그는 한빈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한빈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을 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복면의 위로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크허헐.”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미리 안으로 피신해 있던 유생들은 다급하게 귀를 막았다.

    내공이 실린 웃음에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은 그의 외모를 살폈다.

    웃음소리로만 봐서는 적어도 이순(耳順), 즉 예순에 접어든 것 같았다.

    대충 보면 무림삼존과 비슷한 나이였다.

    복면으로 감싼 데다 가면까지 쓰고 있어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문파조차 추측할 수 없었다.

    한빈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에서 온 은거 기인이시오?”

    “크허헐, 어떻게 내 기척을 알아차렸느냐?”

    “기척이 아니라 냄새를 맡았소.”

    “냄새라?”

    “그 복면과 흑의 말입니다.”

    “…….”

    “반년은 안 빨아 입은 것 같아서 십 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겠더이다.”

    이건 격장지계였다.

    한빈의 수가 통했는지 복면 사이로 안광이 번뜩인다.

    “곱게 죽일 수 없는 얄미운 입을 가졌구나.”

    “당신도 마찬가지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냄새를 지녔소.”

    한빈의 말에 가면 고수는 자신의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그의 기척을 느낀 것은 냄새 때문이 아니라 구결 때문이었다.

    한빈은 그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가면 고수의 옆구리에서는 황금색 점이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히 천급 구결을 획득할 수 있는 표식이었다.

    이건 미완성된 초식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 준 선물과도 같았다.

    물론 다소 부담스러운 선물이기는 하였다.

    그의 무위는 마원이나 음양쌍마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냄새를 맡던 가면 고수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속였구나, 이놈.”

    “분위기를 풀 필요가 있어서 농담을 던졌소.”

    “그래, 농담이라니 이해해 주마, 나는 딱 한 명의 목을 원한다. 그 목을 내놓는다면 나는 말없이 돌아가겠다.”

    “어떤 목을 내놓으면 되겠소?”

    한빈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순간 뒤쪽에서 효명 공주가 튀어나왔다.

    조그마한 체구의 효명이 앞으로 나와 외쳤다.

    “내 목숨은 여기에 있다. 어서 가져가거라!”

    “크허헐. 네가 누구더냐? 내가 왜 귀찮게 너 같은 계집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지? 내가 원하는 목은 딱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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