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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11화 (609/621)

511. 선택 (2)

적과 마주하던 제갈공려는 마른침을 삼켰다.

향로와 벽에 붙어 있던 야명주가 연결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기관 장치였다.

물건 하나 건드렸다고 이 넓은 공간의 야명주가 단번에 사라진다고?

이 비밀 공간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제갈공려는 동작을 멈췄다.

물론 상대도 숨을 죽였다.

이 상황이 제갈공려 일행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적의 정체도 모르는 데다, 숫자도 확실치 않다.

어둠 속에 있던 적이 무작위로 칼부림을 한다면 다치는 것은 유생을 비롯한 아군일 것이다.

다행히도 적들은 바로 들이닥치지 않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의 눈처럼 번뜩이던 검기도 모습을 감췄다.

어색한 탐색전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제갈공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옷자락이 희미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제갈공려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순간 제갈공려가 헛숨을 들이켰다.

“후.”

이건 함정이었다.

대나무 통에 들어 있던 것은 물이 아니라 야광 물질이었다.

시간을 두고 빛을 발하는 걸로 봐서는 발광버섯의 분말을 탄 액체가 분명했다.

그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어둠 속에서 그 빛은 사냥감에 찍어 놓은 낙인에 가까웠다.

이대로면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아군만 노출되는 상황.

어둠 속에서 괴인들이 외쳤다.

“효명 공주를 사로잡아라! 절대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들이 처음으로 목적을 밝혔다.

그들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청화의 목소리였다.

제갈공려가 다급히 외쳤다.

“네 옷에도 야광이 묻어 있다! 너도 뒤로 물러나!”

그녀의 말대로 청화의 옷에도 발광버섯 가루가 묻어 있었다.

제갈공려가 머뭇거리자 청화가 다시 외쳤다.

“빨리요!”

그 외침에 제갈공려가 효명이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괴인들은 가장 앞에 있는 청화에게 달려들었다.

“저자부터 죽이고 효명을 노린다.”

“존명!”

마지막 외침과 함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다닥.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기척.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묘한 소리가 그들의 앞에 울렸다.

털썩.

쿠당탕.

다가오던 괴인들이 뒤엉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것도 잠시, 청화가 작게 말했다.

“아, 큰일 났네. 공자님이 이건 쓰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아. 잘했어.”

설화가 청화를 다독였다.

“지금은 괜찮을까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력을 숨길 수는 없잖아.”

“그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숨기라고 하셨는데. 삼 할이었나? 삼 푼이었나?”

어둠 속이지만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설화가 말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런데 쟤들 죽은 거야?”

“아니에요, 언니. 그냥 독 기운 속에 가뒀어요.”

“오, 얼마나 유지되는데?”

“아마 세 시진 정도는 죽은 쥐처럼 널브러져 있을 거예요.”

청화가 자신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려는 그들의 대화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야 어찌 된 일인지를 파악한 것이다.

제갈공려는 청화가 사천당가의 직계라는 것과 그녀가 공독지체라는 것을 가끔 까먹는다.

신체로만 보면 청화는 벌써 천하제일의 독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까지는 독을 다루는 솜씨가 서툴다는 점이다.

공독지체는 말 그대로 어떤 독이든 신체에 담아 둘 수 있는 체질이었다.

문제는 그 독을 방출할 시, 아직은 강도 조절이 안 된다는 점이다.

섣불리 독을 썼다가는 자칫하면 아군까지 다칠 수 있었다.

이곳에 효명 공주까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밀폐된 공간에서 맹독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도 청화는 그동안 독공에 대한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아 보였다.

몸에 담아 둔 적당한 독으로 기척이 느껴지는 공간을 장악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제갈공려는 그녀의 발전에 적잖게 놀랐다.

“청화야, 너는 내가 책임지고 만점을 주마.”

“진짜요?”

“물론 내가 맡은 강의만.”

그녀의 말에 청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은 다름 아닌 유림 서원이었다.

만점이라는 얘기는 청화뿐 아니라 설화의 가슴도 뛰게 했다.

제갈공려가 말을 이었다.

“살아만 나간다면…….”

그 말에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적은 제압했지만, 상황은 암울했다.

독으로 제압한 자들이 적 전력의 전부일까?

또 다른 적은 없을까?

의문에 대한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뒤쪽에 있는 효명 공주와 장유중은 쥐 죽은 듯 숨어 있는 것 같다.

앞쪽에 독 기운으로 그물을 펼쳐 놓은 상태.

누구도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이쯤 되자 고민은 저들의 칼이 아니었다.

한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한 달을 갇혀 지내야 했다.

어둠 속에서 과연 한 달을 지낼 수 있을까?

문제는 식량이었다.

제갈공려는 한빈의 서찰을 떠올렸다.

왜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보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두 시진이 지났다.

그런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적을 따돌리는 데 애를 먹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장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향로를 바로잡으면 빛이 돌아오지 않을까요?”

“말이 되네. 내가 해 볼게, 동생.”

제갈공려는 향로의 위치를 정확히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향로가 있었던 자리를 떠올리고는 걸어가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탁.

손보다 발이 먼저 향로에 걸렸다.

제갈공려는 향로를 잡았다.

거대한 청동화로라지만, 제갈공려가 일으키지 못할 리가 없었다.

화로를 다시 세우려던 제갈공려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하지 않았다.

제갈공려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끙.”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을 흘러나왔다.

향로는 바닥과 하나가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제갈공려는 자신도 모르게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몸에서 피어져 나오는 기세를 느낄 정도였다.

장혜화가 다급하게 외쳤다.

“언니! 그러다가 부서지면 우리는 영영 못 나갈지 몰라요!”

“앗, 미안.”

제갈공려가 향로에서 손을 떼었다.

기관 장치의 기본에 대해서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제갈세가의 사람이니까.

대부분 기관 장치는 부품이 손상되면 멈추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함정이 설치된 기관 장치를 공략할 때는 부품을 고장 내면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관 장치가 문과 연결되어 있다면?

자칫하면 입구를 영영 못 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제갈공려와 장혜화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죽는 거예요? 그 전에 신선 오라버니 한번 보고 싶은데…….”

이건 분명 효명 공주의 목소리였다.

제갈공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죽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그런데 신선 오라버니라니, 대체 그게 누구예요?”

“그러니까 그게…….”

효명 공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가 어둠 속에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아니에요. 그래도 말해야겠어요.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신선이에요.”

“네?”

“아 그러니까……. 나머지는 비밀이에요.”

순간 제갈공려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신선이라는 호칭 말고는 모든 것이 일치했다.

제갈공려가 효명의 어깨를 다독였다.

“제가 꼭 만나게 해 드릴게요. 편히 쉬셔도 돼요, 공주 마마.”

“아, 알았어요.”

효명 공주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려 할 때였다.

제갈공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코끝에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분명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제갈공려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희미하게나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청아한 기운이 점점 다가온다.

그 기운이 실내를 휘젓고 다닌다.

휘 휙.

실내를 휘젓던 산들바람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 * *

반 시진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는 마른침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상태.

평소라면 어둠 속에서 잠이라도 들었을 테지만, 적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쾅.

동시에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제갈공려는 재빨리 눈을 가렸다.

그녀는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 번쩍였던 섬광의 정체는 다시 모습을 나타낸 야명주였다.

갑자기 야명주가 돌아오자 어둠 속에 익숙해진 눈 때문에 섬광으로 착각한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향로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도 일행은 무사했다.

그때 효명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를 가리켰다.

“신선 오라버니가 피범벅이…….”

“네?”

고개를 갸웃한 제갈공려가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한빈이 빙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가 물었다.

“신선 오라버니가 혹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팽 공자.”

“그건 그렇고 잘 대비하셨네요.”

한빈이 널브러진 괴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유생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변장을 철저히 했다.

제갈공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팽 공자의 서찰 덕분에 무사히 넘겼어요. 호호.”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대처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친 이가 없으니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한빈이 뒤쪽을 바라보더니 쓰러진 괴인들에게 다가갔다.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서 뽑았다.

스릉.

그러고는 그들의 얼굴을 향해 그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생과 효명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앗!”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월아로 인피면구만을 분리한 것.

한빈이 월아를 다시 검집에 넣자, 그들의 얼굴에서 연주황 가죽이 흘러내렸다.

인피면구 뒤에 드러난 얼굴에, 뒤쪽에 있던 유생들이 경악했다.

“저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럼 진짜 강 유생은?”

그들의 외침에 한빈이 장유중에게 걸어갔다.

장유중의 앞에 선 한빈이 외쳤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것 같습니다!”

“대체 저들은 누군가?”

“아마도 효명 공주를 노리고 온 자객들이겠죠.”

“그럼 밖에 있는 자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미리 잠입해 있었던 음양쌍마는 효명 공주를 노린 게 맞았다.

그렇다면 마원은?

분위기를 보면 소군을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소군을 처음 만났을 때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던 그 마인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컸다.

이건 한빈의 가정일 뿐.

정확한 사실은 천천히 확인하면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괴인들의 인피면구를 모두 벗긴 뒤 혈도를 제압하자, 유생들도 한빈의 앞에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양석봉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양석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팽 유생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유림 서원에 학문을 배우러 왔으니 유생 아닌가요?”

“허허, 유생이라…….”

“네, 그렇지요.”

“무림인들은 다들 이렇습니까?”

양석봉이 가리킨 것은 피에 흠뻑 젖은 한빈의 상의였다.

그것은 한빈의 상태를 말함이 아닐 것이다.

무림인들이 상대하는 위험을 뜻함이 분명했다.

한빈이 말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강호에 몸담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보따리를 들고 왔다.

설화는 한빈의 앞에 보따리를 풀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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