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선택 (1)
유생의 하얀 복장에 월아가 품은 푸른 강기.
누가 보면 백룡이 푸른 여의주를 물고 간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의 푸른 강기와 그들의 붉은색 소용돌이가 충돌했다.
쿠아앙!
마치 진천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진기의 소용돌이가 멈췄다.
주변에서 대치하던 무사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마치 부서진 바위의 돌조각이 나뒹굴듯 한빈과 음양쌍마 그리고 마원을 중심으로 모두가 널브러져 있었다.
물론 한빈의 몸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백색의 유생 복장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사이로 핏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점점 붉게 물드는 한빈의 상의.
한빈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오장육부가 흔들렸으며 혈맥에 흐르는 진기도 불안정했다.
물론 마원과 음양쌍마는 가늘게 숨만 붙어 있는 정도였다.
들끓는 내기에도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바라봤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유(類)를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구결 유(類)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은 자신이 이제까지 획득한 구결을 확인했다.
[천급 – 유(悠), 자(自), 유(悠), 유(類), 유(類)]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무려 다섯 개의 구결이 모였는데, 초식이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초식의 짝이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쩝, 이것 참…….”
그렇다면?
한빈은 가늘게 호흡을 이어 나가고 있던 마원과 음양쌍마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기사회생의 수법을 사용해서 다시 싸움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그들이 멀쩡하다면 새로운 천급 구결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기사회생.’
물론 이번 기사회생은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펼친 것이 아니다.
기사회생을 떠올리자 몸속에 흩어졌던 용린의 기운이 한빈의 몸에 휘돌기 시작했다.
휘익.
질풍처럼 한빈의 몸을 휘도는 용린의 기운.
의복을 적셨던 핏물은 이내 멈췄다.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의복 안쪽의 상처는 이미 아물었다.
물론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다.
기사회생은 시전자의 상처 및 체력을 구 할 회복시키는 초식이니 말이다.
일 할의 상처는 아직 남은 상태.
사실 내공을 사용하는 기사회생보다는 상단전의 기운을 사용하는 금의환향을 먼저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충돌로 상단전의 기운은 진탕이 되었다.
한빈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몸 상태는 딱 구 할만큼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정도면 이 상황을 마무리 짓는 데는 족했다.
그때 마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용과도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
마원의 눈이 커졌다.
저 모습은 세간에서 듣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적룡대협.’
죽었다고 알려졌다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은둔 기인이자 사파의 영웅.
적룡대협을 머릿속에 떠올린 마원은 이를 악물었다.
마원이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잔혈마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그와 잔혈마도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의형제나 다름없던 그들은 신교, 즉 마교 내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어린 시절 잠마동에 들어가 백 번이 넘는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다.
그 후 그들은 신교 최상위의 고수로 성장했다.
그들이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잔혈마도의 호쾌한 도는 강호인을 벌벌 떨게 만들었으며, 잔혈마창의 날카로운 창은 무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들의 도와 창에는 자비란 없었다.
신교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닦은 그들에게 몇 년 전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다.
그것은 바로 소마군에 대한 호위였다.
그들은 임무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령지체를 타고난 소마군의 성장은 신교의 부흥을 이끌 것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 문제가 생겼다.
소마군의 마령지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금이 간다는 건 단전이 마령을 온전히 보관하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것을 뜻한다.
온전히 마공을 익힐 수도 없는 상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산혈랑의 내단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산혈랑 한 쌍을 우여곡절 끝에 구했다.
그 후 천산혈랑의 내단을 채취하기 위해 기다렸다.
천산혈랑은 신교가 신성시하는 천산의 영물이기도 했다.
두 마리를 준비한 것은 천산혈랑의 씨를 남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산혈랑이 흑철로 만든 우리에서 도망쳤다.
천산혈랑의 발톱이나 이빨로도 부술 수 없는 우리였다.
교주는 잔혈마도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천산혈랑의 내단을 가져오라는 지시였다.
그것을 막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목숨을 거두라고 했다.
방해하는 자가 바로 천산혈랑을 우리에서 풀어 준 배신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잔혈마도가 천산혈랑의 내단을 구해 오기는커녕, 영단산에서 적룡대협이라는 고수의 손에 숨을 거둔 것.
물론 시체는 찾지 못했다.
세간의 말에 의하면 적룡대협이라는 자와 함께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그렇게 마원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였다.
그가 호위하던 소마군마저 없어진 것이다.
마원은 신교에서부터 이곳까지 소마군의 흔적을 쫓아왔다.
그 흔적으로 미루어 보면 신교 내에 배신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소마군의 흔적이 이곳 유림 서원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었다.
그 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유림 서원의 진법이 깨진 것이 조금 전이었다.
조용히 기회를 봐서 소마군을 데려가려고 했던 마원이었다.
물론 이곳에 있던 자들을 단창에 박살 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소마군의 안위가 먼저였다.
사실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앞에 있는 자는 분명히 적룡대협이 맞았다.
생각해 보면 그가 쓰는 무공도 세간에서 말하는 신출귀몰과 궤를 같이했다.
마원은 이를 악물며 창을 다시 잡으려 했다.
그는 자신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적룡대협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였다.
널브러져 있던 음마혈녀의 용조수가 꿈틀했다.
그 모습에 마원은 체념했다.
적혈대협이 아닌 음양쌍마에게 목숨을 잃게 생긴 것이다.
* * *
비밀 공간을 열기 위해 만월경으로 향하던 한빈은 멈칫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마원과 음양쌍마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근묵자흑.’
근묵자흑은 용린검법의 초식 중 금제법에 해당하는 수법이었다.
한빈은 이 수법을 아미백선에게 쓴 적이 있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머리에 구결을 심어 놓고 그 구결을 언제든 발동시킬 수 있는 수법이 바로 근묵자흑이었다.
죽거나, 혹은 시전자의 지시에 순응하거나.
아미백선에게 구결을 발동시킬 필요는 없었다.
마침 아미백선과 한빈은 뜻이 상통했으니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그들 중 한쪽에게 근묵자흑의 초식을 펼치는 것이 맞았다.
한빈은 매의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근묵자흑은 단 한 명에게만 시전할 수 있다.
그러니 근묵자흑을 시전할 상대를 고르는 일은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맞다.
거기에 더해 심을 구결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
한빈은 마원과 음양쌍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가던 한빈이 발길을 멈추고 아래를 바라봤다.
“오호, 좋은 게 있었네?”
한빈이 집어 든 것은 잎이 무성한 대나무 가지였다.
대나무 가지를 든 한빈은 휘적휘적 쓰러진 적을 향해 다가갔다.
한빈은 마원과 음양쌍마의 앞에 섰다.
그때 한빈의 눈에 꿈틀대는 음양쌍마의 용조수가 보였다.
음양쌍마가 먼저 기운을 되찾은 것.
한빈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와서 미안해. 혹시 이대로 끝날 거라고 안심한 건 아니지?”
“…….”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한빈의 손이 움직였다.
툭, 툭.
한빈은 쓰러진 세 명의 혈도를 찍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수하들의 마혈과 아혈까지 눌렀다.
다시 자리에 돌아온 한빈이 빙긋 웃었다.
“이렇게 해 놔야 공평하지. 아, 그러고 보니 아혈은 풀어 주는 게 좋겠지?”
한빈은 공평하게 셋의 아혈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들의 조용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 중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대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지금 선물을 줄 사람을 골라야 하거든. 그리고 음마혈녀, 당신 정신 차린 거 다 아니까 그렇게 죽은 것처럼 있을 필요 없어.”
“……네놈이!”
“목소리가 정정한 거 보니 한판 뜰 힘이 아직 남아 있나 봐?”
“차라리 죽여라.”
“완전히 점쟁이네. 어떻게 내 맘을 알아?”
“…….”
음마혈녀는 더는 말하지 못했다.
한빈의 표정이 차가웠기 때문이다.
웃고 있지만, 자비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음마혈녀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이 대나무 가지를 들었다.
순간 음마혈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마치 대나무 가지로 후려칠 듯한 기세였다.
이런 모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좋았다.
음마혈녀가 혀를 깨물려 하는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잎사귀를 하나씩 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잎사귀를 하나 딸 때마다 한빈이 그들의 이름을 읊조렸다.
“잔혈마창.”
툭.
“음마혈녀.”
툭.
잎사귀를 따면서 저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은 마치 저잣거리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 같았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같은 말을 외치며 상대의 마음을 점치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
문제는 한빈의 표정을 어린아이의 표정과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잎을 뽑았다.
“음마혈녀!”
말을 마친 한빈은 음마혈녀를 바라봤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력편의 구결을 바라봤다.
한빈이 이번에 심을 구결은 바로 심(心)이었다.
심의 구결을 상대의 머리에 심어 놓는다면?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한빈이 말을 안 해 준다면 자신이 당한 것도 모를 것이다.
한빈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음마혈녀의 천령개에 올려놨다.
순간 죽음을 예감한 음마혈녀가 눈을 감았다.
* * *
비밀 공간에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효명 공주가 있기에 제갈공려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려고 하면 상대는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은 다가오지도 않았다.
향로에서 피어나는 향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갈공려는 그제야 한빈의 안배를 알 것 같았다.
어떻게 구별했는지 몰라도 향로의 향은 적들에게만 효과가 있었다.
지금 향로 쪽에 쓰러진 자들도 평범한 유생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제갈공려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언제고 여기에서 대치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행인 것은 향로가 있는 쪽으로는 유생으로 변장한 정체불명의 무사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때였다.
상대 쪽에서 향로를 향해 대나무 통을 던졌다.
휙.
그것이 암기라 생각한 제갈공려는 검으로 대나무 통을 그었다.
서걱.
제갈공려의 눈이 커졌다.
대나무 통에 담긴 것은 암기가 아니라 물이었다.
물이 향로 위로 떨어졌다.
스르륵.
향에 붙은 불이 소리를 내며 꺼진다.
치직.
동시에 다른 괴인이 향로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향로를 발로 걷어찼다.
쾅!
그때였다.
갑자기 벽에 박혔던 야명주가 뭔가에 끌리듯 사라졌다.
팍. 팍.
눈 깜짝할 사이에 비밀 공간은 어둠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