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 판단 (2)
적일 수도 아군일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정파가 분열될 뻔한 일련의 사건을 한빈은 마주했다.
마찬가지로 마교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지도 몰랐다.
정파를 손에 넣으려던 암제와 같은 마두가 마교에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만약 한빈의 예상을 뒤엎고 저 둘이 힘을 합쳐 한빈을 공격해 온다면?
한빈은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며칠 후면 황궁에서 보낸 군사들이 이곳에 도착할 터.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발견한 통로가 있었다.
한빈이 서찰에 밝힌 내용은 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열쇠가 없다면. 다음 보름달이 떠야 저 통로는 열릴 것이었다.
그래서 식량을 준비해 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전까지 한빈이 열어 주지 않는다면 나올 방법이 없었다.
아마 적들도 그것을 안다면 쉽게 공격하지 못할 터였다.
비밀 공간은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한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팽팽하게 맞선 두 세력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저들이 아군이라면?
마교와 손을 잡아야 할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옛 성현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던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둘이 한패일 것이라는 걱정은 뒤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그들의 대결은 치열했다.
챙.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가끔은 비명도 울려 퍼진다.
악!
푹!
살점이 날아다니고 핏물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이대로 가면 양패구상!
한빈이 원하는 바였다.
살짝 음양쌍마가 밀렸다.
그들은 한빈에게 당한 상처가 있기에 움직임이 느렸다.
한빈은 재빨리 만월을 꺼냈다.
가벼운 동작에는 월아보다 단검이 더욱 적합했다.
한빈이 원하는 것은 치명상이 아니었다.
적절한 시기에 구결을 수확하고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반박귀진!’
순간 미약하게 새어 나오던 한빈의 기세가 냇물을 둑으로 막은 듯 멈췄다.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한빈의 모습.
주변에 있던 풀벌레조차 한빈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빈은 조용히 아수라장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음양쌍마는 점점 더 밀렸다.
그들은 등을 대고 마교의 인원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음양쌍마가 둘 다 멀쩡하다면 승부는 예측 불허.
한빈의 손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푹.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튀어나왔다.
“헉!”
잔혈마창 마원이 토해 낸 목소리였다.
막 음마혈녀의 목을 꿰뚫으려는 순간, 허벅지에 통증을 느낀 것이다.
마원이 외쳤다.
“누구냐?”
“그건 비밀입니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마원은 재빨리 옷을 찢어 허벅지를 칭칭 동여맸다.
분명 아까 봤던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맞았다.
음양쌍마와 싸우던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왜?
마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신분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 생각했다.
사 공자의 탈을 뒤집어쓴 은거 기인일 가능성이 컸다.
마원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 대해 꽤 많은 조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조사는 허점투성이었다.
그가 조사한 내용은 허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하북팽가 사 공자의 무위는 불과 초절정 정도였다.
다만, 귀신같은 경공술이 특기였다.
거기에 더해 얍샵한 검법.
이건 마원의 개인적인 평가였다.
마원은 기척을 내지 않고 음양쌍마와 하북팽가 사 공자의 대결을 지켜봤다.
아무리 봐도 하북팽가 사 공자의 무공은 평범했다.
내공의 수준으로 본다면, 잘해야 절정 정도였다.
문제는 함정으로 상대를 옭아 넣는 계략이었다.
지금도 신출귀몰한 경공으로 싸움을 붙이고 사라졌다.
마원은 그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공의 격차는 노력으로 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고 사라진 것이다.
비명의 끝에 마원이 분노해서 외쳤다.
“미꾸라지 같은 놈!”
그때였다.
음마혈녀의 용조수가 그의 안면으로 날아왔다.
마원은 이게 함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음양쌍마와 하북팽가 사 공자가 싸운 것도 모두 거짓이고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마원은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날이 밤하늘에서 화려한 곡선을 그린다.
검은 먹지에 은색 물감으로 난을 그리듯 그의 창이 움직였다.
파방!
하지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마원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음녀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의 용조수가 마원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슥.
순간 용조수를 통해 가느다란 혈선이 따라 올라온다.
상대의 정기를 흡수하는 혈조신공이 발동된 것이다.
마원이 밀리자 그의 수하들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음녀는 지금의 상황이 황당했다.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이 하북팽가 사 공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자신을 도와준다는 말인가?
고민은 필요 없었다
잔혈마창을 죽이고 하북팽가의 사 공자도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음마혈녀는 발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헉.”
자신이 깔아 둔 철질려였다.
문제는 처음 깔아 뒀던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즉, 누군가 옮겨 놨다는 것이다.
음마혈녀는 이를 악물고 철질려를 빼내었다.
한빈은 그들의 대결 장소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허공을 바라봤다.
[천급 구결 유(悠)를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 유(悠), 자(自), 유(悠)]
천급 구결 완성까지 남은 것은 이제 하나!
마원에게는 더 구결이 보이지 않았다.
즉, 이곳에 있는 고수들에게는 모든 구결을 뽑아 먹었다는 말이었다.
“쩝.”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남은 구결 하나는 다른 고수를 통해 획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다시 대결을 지켜봤다.
마교와 음양쌍마가 적이라는 것은 아직 판단하기는 일렀다.
만약에 저것이 연극이라면?
한빈도 전생에 주로 쓰던 수법이었다.
저런 수법은 제법 잘 걸려들었다.
예를 들어 자신보다 무공의 경지가 높은 무인을 상대할 때는 미끼로서 최고였다.
한빈은 잠시 후에도 판단이 안 서면 그들 모두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챙!
챙!
병장기 소리가 궁중 악사들의 연주처럼 일정 간격으로 울렸다.
그때 음양쌍마의 수하 중 몇이 깨어났다.
기울어졌던 승부의 저울이 다시 균형을 이루었다.
만월을 빼 들고 다가가려던 한빈은 잠시 발길을 멈췄다.
병장기 울리는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가끔씩 새어 나오는 풀피리 소리.
그것은 그들의 거친 숨소리였다.
긴 창을 가지고 있는 마교 쪽 무사들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 친다.
참살수라대의 대원들은 그 간격을 파고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간격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마교 측 무사들은 창을 회전시킨다.
한빈은 그들의 수법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룡회창(魔龍回槍).
개인의 초식 같지만, 이건 합격진의 일종이었다.
각각의 창이 마룡의 비늘에 불과하다.
그 비늘이 모이면 용의 형상이 되는 건 당연지사.
그들은 마룡회창의 수법으로 창을 회전시키며 대열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렇게 늘어뜨린 대열은 어느덧 음양쌍마와 참살수라대를 포위했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동그랗게 똬리를 튼 마룡이 기세를 피워 내자, 마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마룡회창의 합격진이 피워 내는 기세 중에서 유독 눈에 띠는 마원의 기운.
마치 마룡의 눈동자에 점을 찍은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
마룡회창의 기세가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강해졌다.
살을 찌르는 듯한 마기에 음혈쌍마가 서로를 바라봤다.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마혈녀가 손을 내젓자 남은 참살수라대의 대원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진영을 이루었다.
참살수라진 중 방어진에 속하는 모양이다.
마룡회창과 참살수라진의 기운이 부딪히며 공명을 만들어 냈다.
우우-웅.
마치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 대립하는 모습.
그때 음양쌍마가 마원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음양쌍마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
동공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음양쌍마는 실제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은 정상이 아니었다.
화로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끓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마원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염화대법(炎火大法)!”
“알아보는군.”
음마혈녀가 웃음을 피워 냈다.
염화대법은 피를 매개로 공력을 단시간에 끌어올리는 수법이었다.
혈교의 고유 수법을 알아본 듯 마원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순간 음양쌍마가 동시에 마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마교의 개!”
음양쌍마가 각각의 용조수를 뻗는다.
파박!
마치 방패의 가운데에서 검이 튀어나오는 느낌.
마원은 재빨리 창대로 막았다.
휘익.
“풋, 그 정도의 실력 가지고 내 목을 노린다고?”
마원이 피식 웃었다.
거대한 합격진 안에 마원과 음양쌍마가 어지럽게 얽혔다.
하지만 음양쌍마의 염화대법에 마원은 점점 수세로 몰렸다.
푹, 푹.
요혈은 피했지만, 음양쌍마의 용조수가 마원의 살가죽을 뚫고 있었다.
순간 마원은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마원의 주위에 붉은색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음양쌍마가 피워 내는 기운도 붉은색.
마원의 기운도 붉은색이었다.
다만, 음양쌍마가 피워내는 붉은색 기운이 조금 더 짙었다.
붉은색 도깨비불 두 개가 불 꺼진 위에서 나뒹구는 모습이었다.
점점 기세가 강해지자 주변에 먼지가 들끓기 시작했다.
마치 물이 끓으며 증기가 휘날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한빈. 한빈은 마원의 수법을 알고 있었다.
잔혈마도가 펼쳤던 역혈대법이었다.
그들의 내공 대결에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염화대법과 역혈대법을 극성까지 끌어올린다면?
딱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동귀어진!’
한빈이 보기에는 둘 다 동귀어진의 수법을 택한 것이다.
한빈이 혀를 찼다.
“동귀어진이 무슨 유행도 아니고…….”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황금빛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다 수거했다고 생각한 천급 구결이 분명했다.
그들이 몇 배로 끌어올린 내공 덕분에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마원과 음양쌍마가 만든 진기의 소용돌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늘로 건들면 툭 하고 터질 것 같았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툭툭 먼지를 털어 낸 한빈은 재빨리 진기의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반박귀진은 펼칠 필요도 없었다.
진기의 소용돌이를 뚫어야 구결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기세를 숨길 필요는 애초에 없었다.
한빈은 만월을 집어넣고 월아를 빼 들었다.
진기를 품은 월아가 작게 검명을 토해 냈다.
스릉!
‘일촉즉발.’
순간, 월아의 검신에 푸른 강기가 맺혔다.
한빈이 궁수가 쏜 화살처럼 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날아갔다.
슝!
일부러 기세를 피우기 위해 구걸십팔보가 아닌 구룡십팔보로 보법을 바꾸었다.
구룡십팔보와 일촉즉발이 조화를 이루자 한빈은 한 마리의 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