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보름달이 다시 뜰 때 (5)
한빈이 빙긋 웃자, 혈녀가 아무 말 없이 눈을 반짝였다.
“…….”
혈녀만이 아니라 혈자도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왜 자신이 중독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음양쌍마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마음이 바뀌었소. 그냥 비밀로 하리다.”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참살수라대가 중독된 원인과 음양쌍마가 중독된 원인은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몸 안에 잠재적으로 독기라는 폭탄을 품고 있었다.
그 심지에 향로의 향이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향로의 향은 입을 통해서만 침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를 통해서도 독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음양쌍마가 참살수라대처럼 바로 쓰러지지 않은 것은 입가에 두른 피독의 때문이 아니었다.
성능은 다르지만, 참살수라대도 음양쌍마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천을 두르고 있었다.
차이점은 바로 그들의 호신강기 때문에 생겨났다.
호신강기가 피부를 보호하고 있으니 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허점은 있었다.
호신강기라는 것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은 한빈과 결전을 치르며 자연스럽게 호신강기에 빈틈을 보였다.
그 빈틈을 통해 산공독을 활성화시키는 향이 침투한 것이다.
산공독 속에는 한 가지 효능이 더 숨어 있었다.
그 효능은 바로 적아를 구별 못 할 정도로 사람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즉, 미혼 효과가 바로 숨은 효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산공독의 효과가 사라져야 미혼의 효과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독은 사천당가의 작품이었다.
한빈이 만들었다면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을 터였다.
거기에 두 가지 효용이 이어지게 만들 수도 없을 것이었다.
이 독은 사천당가의 직계만 쓸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사천당가에서 한빈이 차지하는 위치를 엿볼 수 있었다.
사천당가에서 한빈을 자신의 친족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화의 친오라버니와도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할 일일 수도 있었다.
사천당가에서는 이 독을 심독(心毒)이라 부르고 있었다.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독이라는 의미에서였다.
당무천은 심독을 한빈에게 주면서 정파인들에게는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독에 어떻게 당한 것일까?
숲속에 숨어서 지내던 참살수라대는 토끼를 통해서 중독되었다.
한빈은 잡은 토끼들에 은침을 박아 넣었었다.
그 은침은 시간이 지나면 몸에서 빠져나오게 설계된 암기였다.
문제는 그 은침은 빠져나왔지만, 은침에 묻어 있던 심독은 그대로였던 것.
숲속에 숨어 있던 참살수라대의 주식은 산에서 나는 과일과 고기.
그 고기 중 토끼가 없을 리는 없었다.
뭐, 사정은 음양쌍마도 비슷했다.
음양쌍마는 설화가 가끔씩 전해 준 당과를 통해서 몸에 심독이 쌓였다.
천진난만한 표정의 설화는 그들에게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설화는 항상 당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니 음양쌍마는 경계를 풀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빈이 준 당과를 설화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때였다.
음양쌍마가 뒤로 물러나더니 참살수라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산공독에 당한 참살수라대는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혈녀는 참살수라대의 대원 중 하나를 뒤집었다.
아마도 그들의 깨우려는 듯싶었다.
한빈은 그들이 도망치면 살려 둘 생각도 있었다.
그들의 배후를 캐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곧 한빈의 눈이 커졌다.
혈녀는 거리낌 없이 수하의 심장에 손가락 다섯 개를 꽂아 넣었다.
푸욱.
그때였다.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혈조대법(血調大法)을 관찰 중입니다. 관찰이 끝나면 일각 동안 혈조대법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일목요연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한빈이 기다리는 바였다.
그들의 무공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들의 기억 일부분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공을 갈고닦는 동안의 기억은 온전히 그들의 동작에 녹아들기 마련이니까.
한빈은 잠시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한빈은 그들이 왜 마교에서 쫓겨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은 혈교에서 마교에 심어 둔 첩자일 수도 있었다.
그 근거로, 그들이 사용하는 혈조대법이 피를 매개로 무공을 극대화시키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용린검법이 다시 반짝였다.
[상대 초식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혈조대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혈조대법은 오 년의 공력이 필요합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연구해 볼 가치는 있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빈은 그들을 향해 외쳤다.
“이곳에 왔을 때는 목표가 있지 않았겠소?”
순간 혈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럼 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공격한 것이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혈녀가 외쳤다.
“내놔라!”
혈녀는 손에 낀 응조수를 까닥였다.
내공을 회복한 것이 분명했다. 남의 피를 통해 자신의 무공을 회복시킨 것이다.
한빈이 모른 척 물었다.
“뭘 말이요?”
“목숨을…….”
혈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내공이 일정치 않은 걸로 보아, 약효가 도는 것이 분명했다.
“암요, 내놓지요.”
“뭐라?”
“목숨은 하나! 그런데 그걸 원하는 쪽은 둘이니 어떻게 합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못 느끼셨습니까?”
“뭘 못 느꼈다고 하는 말이냐?”
“그대들 말고 다른 이들이 그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뭐라?”
혈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마침 혈조신공으로 무위를 회복한 혈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녀의 모습에 혈자도 똑같이 반응했다.
몸을 낮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누가 보면 갑자기 경극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주위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음양쌍마.
한빈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다.
음양쌍마로부터 스무 걸음 떨어진 좌측의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음양쌍마도 시선을 돌렸다.
세 명의 시선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혈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가 있단 말이냐?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이상하지 않소?”
“뭐가 말이냐?”
혈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약효에 정신이 잠식당한 것이 분명했다.
화경의 고수라면 이 정도로 빨리 잠식당하지 않을 텐데, 참살수라대의 피를 흡수하며 약효가 배가된 것 같았다.
한빈은 어둠 속을 가리켰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말이오. 어서 나오시지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만 자리를 떠나겠소.”
한빈의 말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모두 금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금의위의 이창명이오.”
“흠.”
“적이 누군지 찾기 위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소.”
“금의위라…….”
“왜 못 미덥소?”
그는 품 안에 손 넣더니 금패를 꺼냈다.
그는 금패를 한빈에게 쏘아 냈다.
슝!
내공이 적절히 담긴 한 수였다.
금패는 한빈의 코앞까지 오더니 속도를 줄였다.
* * *
비밀 공간에 있던 효명 공주는 기쁨에 소리를 지르려 했다.
효명이 보기에는 한빈의 승리가 분명했다.
그들이 격돌하던 모습은 효명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그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고분고분해졌다.
거기에 쓰러져 있는 적들의 수하.
모든 것이 한빈의 승리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체불명 괴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소리를 지르려던 효명은 다급하게 숨을 참았다.
괴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금의위였다.
금의위라면 황제의 친위대.
즉,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나타난 군대가 분명했다.
효명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
하지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입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소군이었다.
소군은 효명이 이곳에서 장유중 다음으로 친한 사람이었다.
물론 오늘 고기를 구우며 친해졌다.
말해 보니 상냥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자신의 입을 막자 효명은 황당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소군이 낮게 속삭였다.
“저들은 마기를 숨기고 있어요.”
“마기라니?”
“저들은 금의위가 아니에요.”
“분명히 금의위의 상징인 황금색 허리띠를…….”
“그래도 아니에요.”
소군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혹시 금의위에서 신교인들도 받나요?”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저들은 신교인들이에요. 천산 산맥의 신교인들이요.”
효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밖의 상황을 바라봤다.
그녀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금의위가 맞았다.
저 황금빛 허리띠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 분명했다.
금의위는 잠행 임무에서도 저 허리띠만큼은 바꾸지 않는다.
그것이 금의위의 상징이니 말이다.
그때 제갈공려가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건 소군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공주 마마.”
“네?”
“우리가 신호를 보낸 것은 두 시진 전이죠.”
“…….”
“두 시진이면 금의위의 지부가 있는 곳에도 도착하지 않았을 거예요. 두 시진 만에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마도 밖에서 진법이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그렇다면…….”
“공주 마마를 데리고 오기 위해 달려온 병사라고 보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죠.”
“…….”
“아군이 아니라면 공주 마마의 목숨을 노리고 온 적이겠죠. 시간상으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적이 분명해요.”
“그럼 신선 오라버니는요…….”
효명 공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신선 오라버니라뇨?”
“패, 팽 공자님 말이에요. 혹시라도 속아서 적에게…….”
“믿을 수밖에 없죠.”
“빨리 나가서 팽 공자를 구하세요. 이건 명령이에요.”
효명은 출구 쪽을 가리키며 제갈공려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가 한빈이 전한 서찰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내용이 맞는다면 그건 불가능해요.”
“…….”
“여기에 써 있거든요. 열쇠가 없다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다음 보름달이 뜰 때밖에 없다고요.”
“그럼 우리는 팽 공자가 당하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상황으로는요.”
효명 공자는 고개를 돌려 석상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하지만 효명 공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갈공려는 효명 공주의 견정혈에서 손가락을 뗐다.
“죄송해요. 공주 마마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손을 썼네요.”
제갈공려는 미안한 표정으로 효명 공주를 바라봤다.
힘을 잃은 그녀를 장유중이 받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향로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털썩.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명이 아니었다.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인원이 향로를 중심으로 쓰러졌다.
순간 제갈공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쓰러진 모습이 밖에 있는 적들이 쓰러진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려는 재빨리 외쳤다.
“모두 경계를!”
“네, 알았어요.”
설화가 재빨리 반응하며 우혈랑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생들이 떨리는 눈빛으로 경계했다.
그때 양석봉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갈공려 학사님.”
그 질문에 제갈공려가 외쳤다.
“모두 향로 앞으로 모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