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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05화 (505/621)

505. 보름달이 다시 뜰 때 (3)

참살수라대의 대주인 그는 지금의 상황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에 퍼져 있는 독.

거기에 일정 공간 안에 들자 힘없이 고꾸라지는 토끼.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상대의 목소리가 쩌렁 하고 울렸다.

“드루와!”

물론 이것은 한빈의 목소리였다.

한빈은 음양쌍마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화경의 고수를 향한 도발.

하지만 그들은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공의 경지뿐 아니라 그들의 연륜도 화경에 근접했다.

그들의 살아온 세월은 지금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혈녀는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바라보던 혈녀는 그윽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비밀을 알겠어.”

“역시 음마혈녀답군요. 벌써 정답을 알아채시다니요. 그런데 대비책이 있을까요?”

“대비책은 두 가지인데 듣고 싶나?”

“뭐, 밤도 긴데 한번 얘기나 들어 보죠.”

“첫 번째는 그 향이 다 탈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 향이 다 타고 나면 나는 네 목숨 줄을 손쉽게 쥐게 되겠지.”

혈녀는 모닥불 옆에서 짙은 향내를 풍기고 있는 향로를 가리켰다.

한빈의 옆을 힐끔 보면서 말을 이었다.

“향로가 독을 뿜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런데 저는 왜 멀쩡할까요?”

“미리 해약을 먹었겠지. 해약을 먹고 멀쩡하다면 그 독은 호흡기를 통해 혈맥에 스며드는 내연지독이겠지.”

“와우, 똑똑하셔라. 역시 연륜은 못 속이겠네요.”

한빈은 씩 웃었다.

내연지독이란 눈 코 입 등을 통해서 스며드는 독을 뜻한다.

내연지독의 경우, 해약을 미리 복용한다면 독기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해약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바로 외연지독이다.

외연지독은 피부 쪽으로 스며들기에 해약이 감당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외연지독의 경우는 대부분이 무림에서 금기시되어 있다.

혈녀가 그윽한 미소를 피워 냈다.

“아마도 두 번째가 궁금하겠지.”

“저는 궁금하지 않은데요.”

“아니, 궁금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친 혈녀는 품속에서 손수건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바로 옆에 있는 혈자에게 건넸다.

“이건 동생 것이야.”

“네, 누님.”

손수건을 받은 양마혈자가 그것으로 입을 가린다.

한빈은 손수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독을 걸러 주는 피독의(避毒衣)가 분명했다.

대부분 구슬의 형태인 피독주를 입에 넣고 독기를 막지만, 조금 더 신중한 강호인들은 피독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천독과의 싸움에서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에게 나눠 준 것도 이와 비슷한 형태였다.

준비를 마친 혈녀가 한빈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왔다.

터벅터벅.

마치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듯 천천히 걸어오는 모양새였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구결을 떠올렸다.

‘쾌검난마!’

‘전광석화!’

연속으로 두 개의 구결을 떠올린 한빈은 검집을 들었다.

스릉.

경쾌한 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한빈이 진득한 미소를 피워 냈다.

정말 오랜만에 꺼낸 월아였다.

이제 완벽하게 수리된 월아는 달빛을 튕겨 냈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예기.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일촉즉발!’

순간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월야의 검신에 차가운 예기가 맺혔다.

검 끝에는 보석이 막힌 것처럼 푸른빛이 일렁였다.

이전에 일촉즉발이 검 전체에 푸른 진기를 감싸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한 점에 진기가 모여 있는 상태.

이것은 일촉즉발의 진화형이라 볼 수 있었다.

슝!

한빈의 신형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월아와 하나가 된 듯 앞으로 나아간 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음양쌍마를 향했다.

음양쌍마는 자연스럽게 둘로 갈라섰다.

혈녀가 좌측으로 향했고 혈자가 우측으로 돌았다.

그들의 손에서도 검은빛의 강기가 피어올랐다.

혈녀는 왼손에.

혈자는 오른손에 각각 묵빛의 응조수(鷹操手)를 착용하고 있었다.

매의 발톱 모양의 응조수는 아마도 묵철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날아가던 한빈이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휙!

한빈의 검 끝이 향한 것은 혈녀의 복부였다.

혈녀가 좌측으로 미끄러지며 한빈의 검을 튕겨 냈다.

챙!

마치 고즈넉한 사찰에 종이 울리듯 첫 번째 합이 스쳐 지나갔다.

혈녀의 왼손이 바로 한빈의 가슴으로 날아왔다.

뒤쪽에서는 혈자의 오른손이 한빈의 등 뒤를 노렸다.

휙.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한빈이 재빨리 초식을 바꾸었다.

‘구걸십팔보!’

한빈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초식이었다.

순간 한빈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이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자, 혈녀와 혈자가 간격을 벌렸다.

한빈이 다시 나타난 곳은 부서진 정자가 흉물스럽게 자리한 곳이었다.

한빈은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혈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네놈!”

“왜 그럽니까? 할머니.”

“하, 할머니라고…….”

“그럼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뭐라 부릅니까. 형을 형이라 부르고 아비를 아비라 부르듯 말입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순간 혈녀의 기세가 바뀌었다.

순간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첫 번째 합을 끝내고 잠시 자리를 피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에게 쾌검난마의 초식이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그들은 마교에서 축출된 인물이었다.

마교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무공의 근본이 변할 리 없었다.

그런데 쾌검난마의 초식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쾌검난마는 마(魔)를 상대할 때 위력을 발휘하는 초식이었다.

상대의 기세를 확인한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지금 혈녀가 내뿜는 기세는 도가의 기운이 강했다.

한빈은 쾌검난마 대신 다른 초식을 떠올렸다.

‘일목요연.’

이 초식은 지선과의 대결 때 처음 썼던 초식이었다.

칼을 맞대면서 상대방의 무공을 실시간으로 배울 수 있는 초식.

용린검법의 초식이었다.

한빈이 취해야 할 것은 사실 구결만이 아니었다.

이번 대결에서 그들의 무공도 철저히 분석해야 했다.

한빈은 달려오는 상대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 * *

한빈의 서찰을 확인한 제갈공려는 재빨리 사람들을 모았다.

제갈공려는 비밀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한빈이 말한 장소로 이동시켰다.

한빈은 그들을 가장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라 하면서 지도까지 그려 줬다.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통로를 따라 이동하던 제갈공려는 입을 딱 벌렸다.

이전에 있던 공간보다 몇 배는 더 큰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향로도 있었다.

물론 그 향로도 돌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장소를 옮긴 이들은 웅장한 석상들 때문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지금의 장소는 유림 서원에서 옛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과 똑같았다.

실제 사당에는 옛 성현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지만, 이곳에는 석상이 대신 놓여 있었다.

그 석상들은 적어도 구 척은 되어 보였다.

제갈공려는 향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향을 피운 흔적은 없어 보였다.

즉, 일행이 이곳을 사용하게 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보면 되었다.

제갈공려는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는 눈빛만으로 보따리를 들고 달려왔다.

“이거 찾으셨어요? 제갈 언니?”

“헉, 어떻게 알았어?”

제갈공려는 설화가 내민 향을 받아 들었다.

향로 속에 향을 넣은 제갈공려는 불을 붙였다.

순간 은은한 향기가 공간을 채웠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들어와서 향을 피우라고 한빈의 서찰에 적혀 있었다.

중원에서도 가장 머리가 좋다는 가문이 바로 제갈세가였다.

하지만 제갈공려의 머리로도 한빈의 부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갈공려는 재빨리 다음 서찰의 다음 내용을 읽었다.

서찰을 읽던 제갈공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까지의 부탁은 실행하는 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부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 번째 부탁은 향로 가까이에 황족을 데려다 놓고 잘 보호하라는 내용이었다.

“황족을 잘 부탁한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황족이요?”

설화도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려는 주변을 살폈다.

이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황족이 유림 서원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황족이 방문할 때는 적어도 수백의 병사를 거느린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방문할 리가 없었다.

황족이 방문했다고 하면 지금과 같은 일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만약 황족이 이곳에 있다면?

순간, 제갈공려는 움찔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빈이 이곳으로 대피시킨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 유림 서원에 있는 유생이 아닐 터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 황족.

이것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반란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제갈공려의 시선이 장유중에게 멈췄다.

장유중이 끼고 있는 왜소한 유생.

떨리는 장유중의 어깨.

모든 것이 이상했다.

대쪽 같기로 소문난 장유중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황제를 향한 직언을 멈추지 않는 장유중이었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가 숨어들었다고 해도 저리 떨 장유중이 아니었다.

그가 저리 감정을 수습하지 못할 상황은 단 둘 뿐이었다.

황제가 위험할 때 혹은 그의 가족이 위험할 때였다.

그렇다면 저 왜소한 유생의 정체는 명확했다.

제갈공려는 재빨리 장유중에게 달려갔다.

“학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제, 제갈 학사.”

“이분이 황족 맞나요?”

“그, 그걸 어떻게…….”

“여기 보십시오. 이게 팽한빈 공자의 부탁입니다.”

제갈공려는 서찰을 그의 눈앞에 펼쳤다.

촤르륵.

장유중은 반사적으로 서찰을 읽어 나갔다.

그곳에는 황족을 보호하라는 부탁이 있었다.

장유중은 선택할 수 없었다.

왜 향로의 옆에 황족을 두라는 건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황족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른침만 삼키는 장유중의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선 오라버니가 시키는 대로 할래요.”

“신선이라니…….”

“아, 미안해요. 팽한빈 공자의 말대로 향로 옆에 있겠어요.”

“…….”

“그렇게 보지 마세요. 우리 어마마마를 세상 사람들은 현비라 부르죠. 그리고 저는 효명이라고 불러 주세요.”

“효, 효명 공주님이라고요?”

“네, 맞아요. 그럼 저쪽으로 가면 되죠?”

효명은 씩씩하게 향로 쪽으로 걸어갔다.

옆에 있던 장유중은 황당한 듯 효명의 뒤를 쫓았다.

효명은 향로 쪽으로 걸어가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실 효명이 이곳에 들른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한빈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뜻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현비가 제안한 약혼 이야기는 잊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신선 오라버니였다.

문제는 한빈과 신선 오라버니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곳 서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환골탈태 전의 한빈과 환골탈태 후 한빈의 모습을 보고 전혀 다른 사람이라 착각했다.

효명은 자신이 한빈에게 전할 내용이 단순한 이별 통보라고 생각했다.

잠시 이야기만 전하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기에 호위 하나만 데리고 몰래 빠져나왔다.

말을 하고 그냥 돌아갔으면 이번 사건에 이렇게 얽힐 일도 없었다.

그런데 한빈이 신선 오라버니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신발에 엿이라도 붙은 것처럼 서원을 떠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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