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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04화 (504/621)
  • 504. 보름달이 다시 뜰 때 (2)

    혈녀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그녀의 수하가 황당하다는 듯 어깨에 박힌 꼬치를 빼고 있었다.

    혈녀가 말했다.

    “처음부터 내 수하를 노렸군.”

    “어떻게 알았소?”

    물론 이건 정확한 사실이었다.

    한빈이 쏘아 낸 것은 백발백중의 효능이 담긴 한 수였으니!

    혈녀의 옆에 있던 양마혈자(陽魔血子)가 피식 웃었다.

    “썩을 놈이 누님의 심기를 건드렸군요. 그냥 뒈지면 편할 것을, 누님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이것 참!”

    혈자는 혀를 찼다.

    누가 봐도 이득이 없는 공격이었다.

    순간 혈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혈녀가 날아오는 꼬치를 잡으려다 만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혈자가 급히 물었다.

    “누님, 왜 그 꼬치는 막지 않았소?”

    “남들이 주는 음식은 함부로 받아먹는 게 아니란다, 동생아.”

    혈녀가 상큼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혈녀의 뒤쪽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독입니다!”

    비틀거리는 혈녀의 수하.

    다른 수하들이 그의 주변에서 물러났다.

    혈녀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도 눈을 가늘게 뜨고 혈녀를 바라봤다.

    한빈은 입맛까지 다셨다.

    마주 보던 혈녀가 웃었다.

    “꼴에 남자라고 내 몸을 탐하는구나.”

    “눈을 뽑아 버리겠다. 나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는 누님의 가슴을 그리 빤히……!”

    옆에 있던 혈자가 흥분해서 외쳤다.

    혈녀는 팔을 내밀며 혈자를 저지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피식 웃었다.

    “남자라서 탐하는 것이 아니라 무인이기에 탐하는 것이요.”

    “내 이름을 알고도 내 몸에 눈독을 들이는 사내놈은 처음 보는구나. 어서 들어와 봐라.”

    혈녀는 자신의 상의를 살짝 내렸다.

    순간 그녀의 어깨가 드러났다.

    백옥처럼 뽀얀 피부에 뒤쪽에 있던 수하들마저 탄성을 터뜨렸다.

    물론 이것은 한빈의 의도를 오해한 혈녀의 착각이었다.

    한빈은 그녀의 외모를 보고 입맛을 다신 것이 아니었다.

    한빈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의 가슴팍에 빛나는 황금빛 점만 보일 뿐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자신이 노려야 할 곳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빈의 눈에 그녀의 피부가 들어왔다.

    한빈의 눈썹이 호랑이의 무늬처럼 꿈틀댔다.

    혈녀의 피부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맑고 고왔다.

    저런 피부가 나오려면 필시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쳤을 터.

    환골탈태를 거치려면 제법 많은 생명이 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피를 빨려 죽어 갔을 생명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정의감 따위가 한빈의 감정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아군에게 당해 죽어야 했던 귀검대가 떠올랐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된 것이었다.

    이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에 불과했다.

    한빈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등은 어떻게 폈소?”

    “그게 무슨 말이냐?”

    혈녀가 발끈해서 외치자, 한빈이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피부도 펴졌군요.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녔으면 서원에서 인기 좀 끌었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 있구나?”

    “양귀비도 울고 갈 그 외모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소이까?”

    “음흉한 놈이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긴데…….”

    혈녀가 표정을 수습하고 한빈을 쳐다봤다.

    한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혈녀와 혈자의 정체는 식당 주변을 관리하던 늙은 일꾼이었다.

    설화가 날마다 당과를 전해 주던 바로 그 노파와 노인이 바로 혈녀와 혈자였다.

    한빈의 웃음에 혈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우릴 어떻게 알아봤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당장 네 혀를 뽑아 버리겠다.”

    “그냥 감으로. 당신들이 음양쌍마라는 것은 오늘 알았소. 그때는 음흉한 뜻을 숨긴 마두로만 알고 있었소.”

    한빈이 씩 웃었다.

    한빈이 그들의 음흉한 뜻을 가진 고수라는 것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의 몸에서 빛나는 구결 때문이었다.

    황금빛 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천급 구결이었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천급 구결은 화경의 고수에게서만 나타났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진기를 갈무리할 수 있는 화경의 고수란 이야기였다.

    기세를 어찌나 잘 숨겼는지, 그들에게 반박귀진의 초식과 같은 숨겨 둔 수법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십 년 가까이 이곳 서원에 숨어서 노파와 노인으로 변장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못 알아봤다는 것은 대단한 변장술과 대단한 끈기였다.

    한빈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혈자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해 있었고 혈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빈은 그들에게 그저 미소만 보낼 뿐이었다.

    구결을 나타내는 황금빛 점 때문에 그들을 알아봤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빈의 표정에 혈자가 노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이놈이 계속…….”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혈자를 혈녀가 막았다.

    혈녀는 앞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순간 뒤쪽에 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았다.

    스릉.

    스릉.

    날카로운 쇳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혈녀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복면인들이 한빈을 향해서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스무 명이 넘는 복면인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뛰어오자, 한빈이 꼬치를 잡았다.

    하지만 복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한빈이 든 꼬치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꼬치 하나를 던져 봤자 모두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내뿜는 기세는 미미했다.

    복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참살수라진을 펼쳐라!”

    순간 그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스무 명은 각각의 방위를 점하고 한빈을 살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눈빛에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동료 하나가 독에 당해 쓰러졌으면 겁을 먹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한빈을 바라봤다.

    어떤 자는 복면 안쪽으로 비치는 입술을 씰룩인다.

    마치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한빈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그들의 표정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들은 마치 구결을 바라보는 자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방위를 점한 채 한빈을 노려보던 복면인의 수장이 다시 외쳤다.

    “착복!”

    그 외침에 복면인들은 어디선가 피풍의를 꺼내더니 걸쳤다.

    착.

    착.

    얇은 천을 몸에 걸치기만 했는데 그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입은 피풍의를 관찰했다.

    순간 한빈은 복면인들을 보며 웃었다.

    “하하, 오늘 수지맞았네.”

    “…….”

    “너희가 입고 있는 피풍의 말이다. 오늘 내가 가져가야겠다.”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들의 입은 피풍의는 만년노송의 송진을 굳혀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천이라도 만년노송의 송진을 바르면 도검불침과 백독불침의 효과를 얻는다고 전해진다.

    검은색 피풍의에 빛나는 투명한 진액은 분명히 만년노송의 송진이 분명했다.

    한빈은 이제 그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분명히 오래전 사라졌던 혈교의 참살수라대가 분명했다.

    사실 그들이 참살수라진이라고 외쳤을 때는 우연의 일치로 이름만 같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만년송진을 입힌 피풍의를 보니 그들의 후인임을 확신했다.

    이쯤 되자 호기심이 머리를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삼십 년 전 마교에서 뛰쳐나온 두 명의 마두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 혈교의 무력대를 거느리고 있다라?

    생각지도 못한 조합은 지금의 한빈으로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들은 한빈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뒤쪽에 있던 혈녀가 웃었다.

    “호호. 네 눈이 참살수라진을 알아볼 정도로 트이지는 않은 모양이로구나.”

    “백 년 전에는 화경의 고수도 쌈 싸 먹었다는 그 유명한 합격진 아니오?”

    한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의 검은 잔혹하며 지저분하다고 정의맹 자료에 기술되어 있었다.

    거기에 만년송진을 입힌 피풍의가 도검불침의 역할을 하니, 그들은 방패와 창을 동시에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 년 전 화경의 고수가 그들의 합격진에 힘을 못 쓰고 당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혈녀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나?”

    “화경의 고수는 쌈 싸 먹는 합격진이지만, 삼류고수까지 그리 만든다는 얘기는 못 들었소.”

    “네놈은 입만 고수구나. 네놈의 입은 화경을 넘어서 현경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모두 놈을 쳐라!”

    혈녀의 외침에 빙글빙글 주변을 맴돌던 참살수라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갈지(之)자로 진영을 바꾸며 포위망을 좁혀 온 것이다.

    그때 한빈이 꼬치를 들었다.

    순간 상대의 진영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꼬치를 베어 불었다.

    그 모습에 멀리서 지켜보던 혈녀와 혈자가 기가 찬 듯 웃었다.

    “허허.”

    그 웃음에도 한빈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꼬치 하나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 꼬치를 참살수라대를 향해 던졌다.

    휙.

    꼬치가 아무 힘도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날아오는 꼬치에도 참살수라대는 피하지 않았다.

    꼬치가 그들 중 한 명의 피풍의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툭.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쩝, 아깝게…….”

    그때였다.

    참살수라진의 방위 중 한빈과 가장 가까이 있던 복면인이 무릎을 꿇었다.

    털썩.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참살수라대의 우두머리가 외쳤다.

    “독이다! 진영을 넓힌다!”

    그 말에 참살수라대의 모두가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중 몇이 추가로 힘없이 자리에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쓰러진 복면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은 답답한지 복면을 벗어 던졌다.

    순간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복면을 벗자 드러난 얼굴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숨을 몰아쉬던 복면인은 그대로 굳었다.

    마치 마혈을 제압당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이상한 현상은 줄어들지 않았다.

    툭. 툭.

    그들 중 몇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들의 수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참살수라대의 대주였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혈도를 찍으며 외쳤다.

    “모두 운기 조식하라!”

    가부좌를 튼 그는 재빨리 진기를 심장 쪽으로 돌렸다.

    심장 쪽으로 진기를 돌려 몰려드는 독기를 일단 막는 것이 먼저였다.

    그다음 독을 몰아내면 되었다.

    사실, 독을 몰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에 파고든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내면 되었다.

    이곳에서 중독되었다면, 분명히 피부나 호흡기 쪽이 원인일 터였다.

    순간 그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독은 이미 몸속 곳곳에 퍼져 있었다.

    이곳에 와서 중독된 것이 아니었다.

    복면인의 수장은 이것이 일반적인 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혈맥이 막힌 것처럼 아무 힘도 쓸 수 없으며 입도 열 수 없었다.

    몸에서 천천히 기운이 빠져나갔다.

    어느 순간 수로를 막듯 탁 하고 혈맥이 완전히 막혔다.

    그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대로 뻗었다.

    하지만 정신은 그대로였다.

    그의 눈앞에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갔다.

    이곳이 전쟁터인 줄도 모르고 깡충깡충 뛰어가던 토끼가 갑자기 힘없이 꼬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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