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보름달이 다시 뜰 때 (1)
제갈공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두 동강 나는 건 제가 되겠네요.”
그녀도 이제는 상황이 정확히 판단된 것이다.
그녀도 화경의 고수 둘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제갈공려의 표정을 본 한빈이 웃었다.
“그럼 이해해 주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래도 뭔가…….”
제갈공려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먼저 들어간 장유중이 다급하게 외쳤다.
“제갈공려 학사는 팽한빈 유생의 말에 따르시오!”
제갈공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유중의 목소리가 다급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장유중이라면 저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유중은 남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제갈공려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한빈만을 적지에 남겨 두는 것이었다.
적을 확인한다고는 하지만, 혼자 밖에 남아 있다가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리 냉정히 말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다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귀빈이 오신 모양입니다.”
“귀빈이라고요?”
“네, 귀빈이지요.”
한빈이 씩 웃으며 품에서 서찰 하나를 건넸다.
반사적으로 서찰을 받은 제갈공려가 서찰을 열어 보려 했다.
한빈은 재빨리 손바닥을 보이며 막았다.
“그건 나중에 보시지요.”
“믿어도 될까요?”
“안쪽은 안전할 겁니다.”
“우리의 안전이 아니라 팽 공자의 안전을 말하는 거예요.”
“물론 저도 안전할 겁니다. 세상에 저보다 강한 사람은 많아도 저보다 빠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믿을게요.”
제갈공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는 설화와 청화가 나섰다.
“저희는 준비됐어요.”
“너희도 들어가거라.”
“네?”
설화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떨어지는 칼을 잡을지 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 혼자면 충분하다. 아니, 나 혼자가 편하다.”
“…….”
설화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한빈이 소군을 가리켰다.
“너희는 소군을 지키거라.”
“일단 알겠어요. 하지만 위험하면 저희를 부르셔야 해요.”
“약속하지.”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아-앙!!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진법의 정문 역할을 하던 정자가 먼지에 휩싸이고 있었다.
한빈은 설화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설화와 함께 청화와 소군도 밀려 들어갔다.
순간 한빈이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제갈공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입구는 어떻게 닫는 거지?”
“입구요?”
설화가 멍하니 뻥 뚫린 공간을 바라봤다.
이곳에 숨어 있으라고 했지만, 통로의 입구는 휑했다.
순간 앞쪽에 있던 거대한 검은색 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륵.
마치 기름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별다른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는 돌.
그 돌은 이 통로로 들어오기 전에 봤던 돌이 분명했다.
설화가 멍하니 있자 제갈공려가 다가왔다.
“이런 곳에 생각지도 못할 기관 장치가 있다니 놀랍지?”
“기관 장치요?”
“그래, 이건 아무래도 오래전 만들어진 장치 같아. 진법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순수한 기관 장치가 분명한데,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겠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제갈 언니.”
설화는 호칭을 바꾸었다.
이곳은 전쟁터.
이제는 강사와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화가 통로를 가리키자 제갈공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뒤쪽에 있던 장혜화가 다가왔다.
“횃불도 없는데 통로가 환하네요, 언니.”
“그러고 보니…….”
제갈공려는 그제야 이 통로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통로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그렇죠. 언니, 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이쪽으로 와 보세요.”
장혜화는 제갈공려를 잡아끌었다.
그곳으로 간 제갈공려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강의실 같았다.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앞쪽에는 강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책상과 의자가 모두 돌로 깎아 만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장혜화는 제갈공려를 이끌고 강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유림 서원의 강의실과 마찬가지로 족자가 걸려 있었다.
정확히는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새겨져 있다고 봐야 했다.
돌로 깎아 만든 책상과 의자처럼, 족자도 벽면을 새겨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정교해서 마치 진짜 족자가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이 일게 만들었다.
장혜화는 족자를 가리켰다.
“언니, 저걸 보세요. 저기도 눈이 있죠?”
“그렇다면 저 눈이 혹시…….”
제갈공려는 말끝을 흐리며 벽에 새겨진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림은 구름을 타고 있는 고양이였다.
선묘도에 나오는 고양이가 맞았다.
그 고양이는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갈공려는 고양이의 눈을 응시했다.
순간 고양이의 눈에서 신선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휘익.
제갈공려가 재빨리 얼굴을 갖다 댔다.
“아, 그랬구나!”
제갈공려가 탄성을 질렀다.
고양이의 눈은 밖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때 장혜화가 다른 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의실은 여기 하나가 아닌 것 같아요. 일단은 모두 여기 모여 있지만, 나머지는 저희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제갈공려는 품을 뒤적였다.
한빈이 전해 준 서찰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서찰을 확인한 제갈공려의 눈이 커졌다.
* * *
한빈은 만월경의 하얀 바위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한빈이 들고 있는 단검은 다름 아닌 만월이었다.
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홀로 적을 맞이하는 무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만월경의 하얀 돌은 뒤쪽의 비밀 공간을 여는 문이었다.
그 열쇠는 바로 한빈이 들고 있는 만월이고 말이다.
사천에서 백미랑이 준 만월이 어떻게 이곳의 열쇠가 되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여기까지 알아낸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서른 개의 지(智) 자가 심화편에 들어 있지 않았다면 풀 수 없었을 터.
한빈은 이 모든 것을 입수한 선묘도를 통해서 알아냈다.
선묘도의 배경에는 항상 보름달이 떠 있었다.
거기에 신선 고양이의 발톱은 뭔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뭔가는 바로 한빈이 들고 있던 만월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유추하려면 모든 선묘도를 이어 붙여야 했다.
하지만 한빈은 향상된 지혜 덕분에 오늘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열쇠가 있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뜨는 날짜가 아니면 문을 열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만월을 꽂으면 문이 열리고.
만월을 하얀 바위에서 빼내면 문이 닫힌다.
이것이 숨겨진 문을 여는 규칙이었다.
한빈이 같이 숨으려고 해도 어차피 불가능했다는 말이었다.
물론 한빈은 절대 몸을 숨길 수 없었다.
적에게서 얻을 것이 있으니 말이다.
한빈은 용린검법을 바라보며 여유 있게 웃었다.
아마 서른 개의 지 구결이 없었다면, 입수한 선묘도를 분석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천천히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한빈은 꼬치를 모닥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남은 향을 모두 모닥불 속에 쏟아 넣었다.
남은 향이 모닥불 속에서 이글이글 타자, 주변은 향내로 진동했다.
한빈은 팔짝을 끼고 손님을 기다렸다.
한빈이 바라보는 곳은 정자가 있던 쪽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수십 명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여유 있게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가장 앞에서 다가오는 것은 음양쌍마였다.
사실 한빈도 음양쌍마를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정의맹의 장서각에 있던 그들의 자료를 보았을 뿐이다.
그들의 자료는 정의맹에서도 대외비였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의맹의 맹주는 그들의 자료를 대외비로 감추었다.
그들의 무공은 마교에서도 금기시되는 무공이었다.
혈조신공(血操神功).
혈조라는 단어 그대로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조법이었다.
혈조신공은 상대의 피를 흡수해서 내력을 발전시키는 기묘한 무공이었다.
무공을 익히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이기적인 수법을 누가 인정하겠는가?
힘을 숭상하는 마교였지만, 그들의 수법은 사이비라 생각했다.
한빈은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암제나 지선에게서 느꼈던 벽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벽이었다.
만약 다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단언컨대 확신할 수 없었다.
암제와 지선보다는 약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둘이라는 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을 따르는 무리까지!
한빈은 그들에게 받을 것만 받고 나면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한빈은 지글지글 타는 꼬치 하나를 들었다.
그러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음식을 먹었지만, 한빈은 배고픔을 느꼈다.
한빈은 진법의 입구를 보며 배를 어루만졌다.
실제로 배고픈 것은 아니었다.
바로 먼지 사이에서 빛을 내는 황금빛 점이 배고픔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구결을 향한 갈망.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였다.
쿵. 쿵.
내공이 실린 발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뒤쪽에 있던 연못의 물이 찰랑거릴 정도.
먼지를 뒤로한 채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바로 음양쌍마였다.
그들 뒤에는 산적 차림의 무사들이 등장했다.
흰색 비단의 여인이 걸음을 멈추자 동시에 모두가 제자리에 섰다.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과 한빈과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
한빈이 다시 꼬치를 베어 물며 말했다.
“때깔이 곱구려, 음마혈녀(陰魔血女).”
음마혈녀는 음양쌍마 중 여인의 이름이었다.
“…….”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안다는 게 놀라운 건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세상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
그녀의 말에 한빈이 웃었다.
“진짜 음양쌍마가 맞았구려, 하하.”
한빈은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한빈이 그들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의맹의 자료에서만 본 마두였다.
마교에서조차 축출된 희대의 마두.
미리 확인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상대가 음양쌍마라는 것을 정확히 안 것도 이번 대화의 수확이었다.
혈녀의 미간이 꿈틀댔다.
혈녀가 노기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나를 시험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혹시 그거 아시오?”
“무엇을 말이냐?”
“사람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장기를 밖으로 내놓고 살아 있는 자는 본 적이 없소.”
“이놈이 나와 농담을…….”
“잠시만 기다리시오.”
한빈이 손바닥을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혈녀도 미간을 살짝 좁혔다.
순간 한빈은 먹던 꼬치를 던졌다.
휙!
아무렇지 않게 던진 꼬치였다.
꼬치는 혈녀를 향해 날아갔다.
슝!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는 꼬치를 향해 혈녀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혈녀는 손을 거뒀다.
꼬치는 그녀를 지나갔다.
“으악!”
뒤쪽에서 들리는 비명.
뒤쪽에 있던 혈녀의 수하가 맞은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수하를 노린 것처럼 꼬치는 자연스럽게 수하의 어깨에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