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전호후랑(前虎後狼) (6)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왔지만, 장유중의 시선은 죽통에 고정되어 있었다.
죽통은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가늘었다.
붓대보다도 더 가는 대나무 통 속에 환약이 몇 알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미혼환이었다.
장유중과 이곳의 관리인들은 이것을 독약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처음에는 평범한 미혼산으로 봤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홍금호가 저리 게거품을 물며 경련을 일으키자, 단순한 미혼산이 아니라 독약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한빈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정파 중 한빈보다 독이나 미혼산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홍금호의 증세는 미혼산으로는 나타날 수 없었다.
한빈은 다시 홍금호를 바라봤다.
눈을 까뒤집은 채 팔다리는 계속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청화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홍금호를 가리켰다.
순간 청화가 바람처럼 홍금호에게 달려갔다.
그때 장유중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이놈, 최유지! 빨리 해약을 내놓거라!”
“저, 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건 독약이 아닙니다, 학장님.”
최유지는 양쪽 팔이 제압당한 상태에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럴수록 장유중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런데 시치미를 뗄 셈이냐?”
장유중이 죽통을 가리키자 최유지가 말했다.
“맹세코 저건 절대 독약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미혼…….”
최유지는 자신이 미혼산을 쓴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독약을 넣었다고 하니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미혼산은 어떻게든 무마시킬 수 있다.
미혼산은 잠이 안 오는 고관대작들의 치료용으로도 쓰는 약의 종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독을 썼다면 변명의 여지 없이 범죄자가 된다.
“끝내 미혼산으로 속이려 드는구나. 독약이 아니고 미혼산이라면, 네가 직접 먹어 보아라.”
“그건…….”
최유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술이나 물에 희석시켰을 때는 괜찮겠지만, 미혼환을 그냥 먹게 되면 바로 정신을 잃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 무고를 주장할 기회도 사라진다.
한빈은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전생에 경험했던 십 년의 전쟁은 평화로운 이 시기라면 백 년이 걸릴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생존 본능이었다.
한빈은 경험과 늘어난 지(智)의 구결을 이용해 현재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생각을 끝낸 한빈은 눈을 빛냈다.
지금의 상황은 중원 전체를 태울 작은 불씨가 될지도 몰랐다.
또한 홍금호 하나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홍금호를 노린다면 이곳이 아니라 그의 처소에서 노렸어야 이치에 맞았다.
지금 이곳에서 홍금호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유생 모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곳의 학사들과 유생들이 잘못된다면?
몇백 년간 이어졌던 관무불가침 같은 암묵적인 약조는 모두 수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관과 무림이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을 그냥 놔둔다면 내란의 불씨가 될지도 몰랐다.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감을 극대화했다.
순간 한빈은 눈꺼풀을 살짝 떨었다.
한빈의 예상은 맞았다.
이곳은 정체 모를 세력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한빈은 슬쩍 일꾼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이 맞았다.
한빈은 다시 장유중을 바라봤다.
“학장님, 제 말 좀 들어 주십시오.”
살짝 내공이 담긴 목소리.
장유중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왜 나를 불렀느냐?”
“최유지 유생은 범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최 유생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술이 담긴 바가지에 넣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사실 나뿐이 아니다…….”
장유중은 말끝을 흐리면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일꾼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무인의 기백을 당연하듯 피워내고 있었다.
장유중과 시선이 마주친 일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청화가 달려왔다.
청화가 옆에 서자 한빈은 재빨리 미혼환을 낚아챘다.
휙.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미혼환을 청화에게 건넸다.
동시에 청화는 남은 미혼환을 모두 삼켰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일꾼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청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청화에게 물었다.
“이게 독이 맞느냐?”
“아니에요, 공자님. 독은 아니에요.”
“그럼 뭐지?”
“소량의 미혼산이 들어 있어요.”
청화의 말에 한빈이 다시 장유중을 바라봤다.
“그렇다는군요.”
“허허, 저 아이의 말을 내가 어찌 믿겠나?”
“그럼 사천당문의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흠, 그야 믿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사천당문의 사람을 어떻게 불러온다는 말이더냐?”
“여기 있는 청화가 사천당문의 사람입니다.”
“…….”
장유중은 고개를 갸웃하며 청화를 바라봤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턱짓했다.
청화가 품속에서 조그마한 철패 하나를 꺼냈다.
그 철패를 본 장유중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잠시, 장유중은 철패를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다.
조그만 철패는 보통 쇳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역에서 나온다는 현철이 분명했다.
거기에 더해 독사와 독수리가 검 하나를 향해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의 철패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건 독응당패…….”
“네, 맞습니다.”
한빈이 답했다.
독응당패란 사천당가의 직계들이 가지고 있는 가문의 신물 중 하나였다.
정교하게 만들진 신분패로, 독응사천패 하나만 있으면 사천당가와 제휴를 맺은 전장에서 은자 만 냥까지는 융통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사천당가가 운영하는 상단에 이 패를 내민다면 이 패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었다.
사천에서야 얼굴이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이지만, 사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누가 직계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이유로 사천당가는 암기를 만드는 기술력을 총동원해서 독응당패를 만들었다.
그 정교함 덕분에 독응당패에 대한 소문을 못 들어 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것은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유중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빈과 청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이 아이가 사천당가에서도…….”
“네, 열 명 안에 드는 독인이지요. 독응당패는 딱 열 개밖에 안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청화의 말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한빈은 독응당패를 가리켰다.
강호인뿐 아니라 관리들도 대부분 독응당패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금 관심이 있는 관리들이라면 이것이 열 개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당가의 신물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장유중도 그들 중 하나였다.
“독응당패를 들고 있는 독인이 하는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지. 지금 독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
“그럼 대체 저 아이가 왜 저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장유중은 홍금호를 가리켰다.
한빈이 대신 말을 받았다.
“잠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
“이리로 오시죠.”
한빈은 장유중을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진기를 모아 주변에 퍼뜨렸다.
“기막을 펼쳤습니다.”
“기, 기막이라고 했나? 대체 자네는…….”
장유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고수로 구성된 호위 중에서도 기막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청화에게 눈짓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청화가 말을 이었다.
“저건 독이 아니에요.”
“그, 그럼 대체…….”
장유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청화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홍금호 유생이 저리된 것은 미혼산이나 독 때문이 아니에요. 정수리에 은침이 박혀 있어요.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서……. 혼자 힘으로는 빼낼 수 없어요. 잘못 빼냈다가는 머리가 터질 거예요.”
청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장유중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홍금호 유생이 아니라 저희의 안전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일단 학장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절대 다른 유생들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겠네.”
“홍금호 유생의 백회혈에 침을 박아 놓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단순히 해코지하기 위해…….”
“아닙니다. 청화가 말했듯이 홍금호 유생은 꽤 정교한 수법에 당했습니다. 저것을 뽑으려면 화경의 고수가 진기를 바닥까지 끄집어내야 합니다. 흔히 허공섭물이라고 하죠.”
“허공섭물이라…….”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침을 뽑고 나면 적어도 화경의 고수는 두 시진은 쉬어야 할 겁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포위되었습니다.”
한빈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포위라니…….”
“누군가 이곳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태연하게 넘어가 주십시오.”
“흠, 자네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일꾼들로 위장한 호위들의 무위가 어떻게 됩니까?”
“무위라…….”
“제가 보기에는 절정 수준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라고 들었네. 여기 모인 호위 정도라면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문제없네.”
“상대는 적어도 초절정, 그것도 중급 이상의 무사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흩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
“저는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 보호할 겁니다.”
“자네가 우릴 보호하겠다는 말인가? 자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못 믿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림인이자 유생의 한 명으로 저들과 맞설 의무가 있습니다.”
“음.”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뭔가?”
“제 말은 호위에게도 비밀입니다.”
“…….”
“처음에 이곳에 모인 일꾼은 정확히 스무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세히 보시면, 열아홉의 일꾼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빈의 말에 장유중은 화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호위의 숫자를 확인한 장유중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허허.”
“확인하셨으면 환자를 한데 모으고 중간에 불을 피워 주십시오.”
“그래, 자넬 믿겠네. 그런데 이게 자네의 착각이라면 그냥 말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게.”
“네, 알겠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유중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관리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호위들에게 명을 내렸다.
“환자를 위해 모닥불을 지피고 모두 가운데로 모이도록 하라.”
장유중의 말에 모든 호위가 말없이 포권했다.
그들은 공터의 가운데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곳에 모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궁금하지?”
“위험한 적이라면, 차라리 저와 공자님이 은밀하게 적을 해치우고 오시는 게 좋지 않나요?”
“그럼 저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할까?”
“네?”
청화가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보는 앞에서 적을 해치우지 않으면 아마도…….”
“아마도 뭐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적과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을걸.”
“아.”
“지금 중요한 건 유생의 안전이 아니야.”
“그럼요?”
“하북팽가와 사천당가 그리고 우리들의 안전이지.”
“…….”
청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준비는 다 됐으니 한번 놀아 볼까? 가자, 청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