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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97화 (497/621)

497. 전호후랑(前虎後狼) (4)

최유지는 한빈의 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뭐든 말해 보시오.”

“이 아이가 벌주를 마실 일이 없다면……. 그 계약은 종신 계약으로 하죠.”

“조, 종신이라면?”

“유림 서원에서 졸업한 후에도 이어지는 겁니다.”

“좋소.”

최유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선택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서로 볼 일이 없는 사이였다.

최유지가 돌아가자 소군은 입을 딱 벌리며 손까지 떨고 있었다.

“고, 공자님. 저한테 왜 이런 시련을…….”

“아니다.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천자문을 익혔는데 어떻게 유생들과 대결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너를 믿는다.”

“공자님, 제가 뭘 잘못했기에…….”

“나는 너를 믿는다고 했다.”

한빈이 딱 잘라 말하자, 소군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청화는 뒤쪽에서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표정으로 봐서는 은근히 벌주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최유지가 자리로 돌아가자 마침 만월경을 관리하는 일꾼 몇이 도착했다.

그들은 술과, 종이에 싸인 물건을 작은 수레에 싣고 왔다.

수레를 멈춘 그들은 유생들에게 술을 나누어 줬다.

그때 최유지가 외쳤다.

“제가 술을 가져오라 부탁했지 않습니까? 그 술은 일꾼과 호위들에게 주도록 하죠! 우리가 문장을 겨룰 동안 그들도 즐겨야 하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유생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들이 가져온 술을 그들에게 건넸다.

한빈도 자신이 가져온 술을 건넸다.

수레에는 일꾼들과 호위들이 마실 술이 쌓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일꾼 둘이 수레에서 종이에 둘둘 싸인 물건을 가져왔다.

일꾼들은 바로 종이를 벗겨 냈다.

종이를 벗겨 내자 조그마한 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성인 남성이 누워도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가에 띄워 놓고 연등을 매달아 놓는 관상용으로 쓰일 만한 배였다.

유생들은 그 배의 용도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생 중 누구도 한빈에게 죽림칠회의 방식에 대해서 설명해 준 자는 없었다.

아마도 한빈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려는 듯 보였다.

물론 한빈은 그 배에 대해서 미리 들었다.

유생들이 아닌 금미랑에게 미리 들었던 말이 있어서 그 방식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연못에 띄운 배는 문장을 쓴 종이를 넣는 용도였다.

그리고 뒤쪽의 바가지는 술을 붓는 곳이었다.

유생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면 재빨리 문장을 써내야 한다.

문장을 조그마한 배에 던져 놓고 바가지에는 자신이 가져온 술을 따른다.

만약 문장을 써내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배에 문장이 가득 쌓이게 되면 그때 첫 번째 승부가 끝난다.

금미랑에게 들은 바로는 이것은 친목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어떤 유생은 일부러 문장을 써내지 않고 벌주를 마신다고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문장의 딱 두 가지를 본다.

내용의 정확성과 서체였다.

정해진 시간 안에 수려한 필체로 정답을 적어 내는 것이 이번 승부의 핵심이었다.

예상대로 호위는 그 배를 연못에 띄웠다.

호위는 배 뒤쪽 움푹 파인 홈에 큼지막한 바가지를 올려놨다.

그 상태에서 호위는 배를 붙잡고 있었다.

손을 놓으면 그대로 배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최유지가 외쳤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저부터 시작하지요. 무가에서 온 친구도 있으니 첫 번째 문장은 무림과 연관된 문장으로 하지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최유지는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문장을 적었다.

[임술년 가을, 손님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 아래서 노닐었으니!]

그는 문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빈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남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 문장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한빈은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화경에 이른 무림인.

문장을 확인한 한빈은 미소를 지었다.

문장의 출처는 말 안 했지만, 한빈은 그 문장을 알고 있었다.

소동파의 적벽부.

배와 물 그리고 달이 어우러지는 이곳에 적격인 문장이었다.

한빈은 감각적으로 문장을 골라낸 최유지에 나름 감탄했다.

유생은 유생이었다.

자신이 무가에서 태어나 무를 갈고닦은 만큼, 그들은 학문을 갈고닦았다.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 내기에서 질 생각은 없었다.

아니, 질 수가 없었다.

한빈의 눈앞에는 용린검법 실력편의 구결이 빛내고 있으니까.

지(智) 구결이 무려 스무 개이니 지는 것이 힘들었다.

최유지가 문제를 내자마자 머릿속에서는 주르륵 해당 문장이 떠오른다.

한빈이 머릿속에 문장을 떠올리고 있을 때, 최유지는 종이를 배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술을 바가지에 부었다.

조르륵.

최유지가 술을 따르자 호위가 조그만 배를 놓았다.

이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그 배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기 전에 유생들은 써 놓은 문장을 넣고 술을 부어야 했다.

다음 유생이 황급히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한빈의 앞쪽에 있는 유생 중 몇은 미리 문장을 적어 놓았다.

한빈은 이 상황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에 사람이 꼭 한 문장만을 쓰라는 법칙은 없었다.

만약 미리 써 두었는데 앞 사람이 두 문장을 쓰게 되면, 이어 적지 못한 것이 되니 패하게 된다.

다음 유생이 배 위에 문장을 올려놨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니 물결은 일지 않았다. 나는 손님과 술잔을 들고…….]

문장을 올려놓은 유생은 술을 부었다.

한빈은 그들의 행동에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는 최대한 늦게 문장을 올려놨다.

거기에 다음 유생의 태도가 문제였다.

배에 올려진 문장을 보지도 않고 미리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한빈은 이번 승부의 날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아챘다.

사실, 이번 승부로 누구 한 명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앞에 사람이 문장을 어디까지 쓰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된다.

모두가 짠 상태에서 한빈의 앞에 있는 자가 최대한 늦게 문장을 올려놓으면 되었다.

그럼 한빈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 문제의 답안지를 아는 것, 혹은 모두가 짜고 치는 투전판과도 같았다.

역시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자신의 차례가 오기도 전에 유생들은 보이지 않게 붓을 놀렸다.

소군도 이상한 유생들의 태도를 감지했는지 작게 속삭였다.

“공자님,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요.”

“괜찮다. 나는 너를 믿는다.”

“아, 공자님…….”

감동한 듯 동그랗게 뜬 소군의 눈에 살짝 물기가 비쳤다.

처음에는 시련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믿는다는 말을 반복하니 그것이 시련이 아닌 배려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빈은 앞쪽 유생이 문장을 배 위에 올려놓자 소군을 바라봤다.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쓰면 된다. 계수로 노를 만들고 …… 하늘가에 저편에 계시리라.”

한빈이 불러 준 문장은 무려 네 문장이었다.

유생들은 한빈을 비웃듯 바라봤다.

한빈은 그 비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한빈이 불러 준다고 해도 많아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소군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유생 대부분은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들은 한빈의 다음 행동에 놀랐다.

한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도 마저 적어라. 피리 소리가 매우 슬퍼서.”

말을 마친 한빈은 소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소군은 종이를 한빈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요, 공자님.”

“수고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재빨리 문장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한빈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문장이 적힌 종이를 배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바로 술을 따랐다.

조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술을 따른 한빈은 옆자리로 흘러가는 작은 배를 바라봤다.

다음 차례를 홍금호라는 유생이었다.

한빈이 파악하기로 그는 최유지와 양석봉의 뒤를 잇는 삼인자였다.

배가 오자 홍금호는 재빨리 문장을 배에 올려놓으려 손을 뻗었다.

홍금호는 사실 미리 문장을 적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문장을 확인하고 그다음 문장을 적어도 시간은 충분했다.

홍금호가 문장을 미리 적은 것은 바로 한빈 때문이었다.

큰 목소리로 문장을 불러 주는 바람에 바로 뒤의 순번인 홍금호는 문장을 확인하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홍금호는 상대의 우매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미리 문장을 적었다.

이렇게 문장을 미리 적어 놓으면 아마도 마음 편히 불러 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장을 올려놓으려던 홍금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미리 문장을 쓴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한빈이 큰 소리로 불러 줬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빈이 불러 줬던 문장과 종이에 적힌 끝 문장이 달랐다는 점이다.

분명 한빈은 ‘피리 소리가 매우 슬퍼서’까지만 불러 줬는데, 종이에는 그다음 문장까지 적혀 있었다.

설마 조그만 여자아이가 적벽부의 문장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홍금호는 당황했다.

[……원망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원통한 소리와도 같아 그 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오니.]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불러 준 것을 모두 적는 것도 모자라 문장까지 추가했다.

이것은 놀라운 속도였다.

홍금호가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필체는 자신보다 수려했다.

아니,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도 더 수려했다.

저것이 어찌 열 살밖에 안 된 소녀의 서체란 말인가?

사실 빨리 옮겨 적으려 했다면, 시간 내에 이어지는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문장을 안다는 사실과 유려한 서체 때문에 홍금호는 놀란 가슴을 주체 못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배는 홍금호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모두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홍금호 유생이 어떻게…….”

“그러게 말일세.”

“이게 무슨 일인 거지?”

모두의 웅성거림 속에 홍금호가 외쳤다.

“이번에는 내가 졌네! 하하!”

이 웃음은 진심이었다.

한 번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홍금호에게는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웃은 홍금호는 고개를 돌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소군을 바라봤다.

불러 주는 대로 쓴 것이 아니라 문장을 더 적었다는 것은 소동파의 적벽부를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천자문을 얼마 전에 뗐다고 들었는데, 모두 속임수였던 것이 분명했다.

상대의 속임수에 당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속임수가 아니었다.

홍금호는 서체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군이라는 아이의 서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더 빠르게, 자신보다 더 화려하게.

그때 홍금호의 호위가 바가지를 들고 왔다.

유생들이 앞서 술을 부었던 그 바가지였다.

홍금호는 조용히 그 바가지에 담긴 술을 마셨다.

그 모습에 주변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한빈도 눈을 가늘게 뜨고 소군을 바라봤다.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때 소군이 한빈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저 사실 옆에 있는 아저씨들이 써 놓은 글을 엿봤어요.”

“어쨌든 잘했다.”

“저 잘못한 거 아니죠?”

“아니다. 내가 믿는 것에는 네 시력도 포함돼 있으니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소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칙에 따라 첫 번째 문장 대결이 끝나고, 서로 자리를 바꿨다.

이것은 공정함을 위함이었다.

소군의 활약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한 시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소군의 속도를 따라갈 유생은 그곳에 없었다.

소군이 활약하는 동안 한빈은 허공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물론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

[지(智) : 삼십(三十)]

지(智)의 구결이 무려 삼십 개였다.

구결을 확인하던 한빈이 웃음을 멈췄다.

지혜가 늘어났는지 이상하게 즐겁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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