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 전호후랑(前虎後狼) (2)
최유지는 미간을 좁혔다.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최유지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했다.
항상 결과에는 납득할 만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었다.
원인을 찾는 것은 포졸들만의 일이 아니다.
원인에 대한 규명은 학문을 연구하는 자의 본분이었다.
최유지도 그런 시각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때 홍금호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없을 때 우리는 조용히 상의했다네. 그리고 자네가 양석봉과 짜고 우리를 물 먹이려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네.”
“흠, 나를 의심하는 건가?”
“정황상 그게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네. 팽한빈은 무림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자가 우리를 머리로 옭아 넣는다고? 말해 보게, 그게 가능한 일인지. 백번 양보해서 그 무가가 제갈세가나 모용세가라면 이해할 것일세. 그런데 하북팽가일세, 하북팽가.”
홍금호는 유난히 하북팽가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 말에 최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건 나도 의문일세. 나는 솔직히 양석봉이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네.”
“양석봉이라……. 자네가 그렇게 말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하나 있네. 그건 바로 일개 시녀가 어떻게 유무일체론을 꿰차고 있냐는 것일세.”
“흠.”
최유지가 눈을 가늘게 뜨자 홍금호가 말을 이었다.
“공(空)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은 유(有)와 무(無)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는 뜻과 상통하지 않는가? 그걸 족자로 낸 문제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시녀가 아니라 유명한 문사 가문의 여식이라는 뜻일세.”
홍금호의 말에 모든 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것은 유생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의 눈빛에 최유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문사의 집안이라고? 그건 말이 안 되네. 뭐가 아쉽다고 문사 집안의 여식이 하북팽가에 시녀로 들어가겠나?”
“말이 안 된다고?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는가? 하북팽가에서 온 무인과 계약서를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학문에서 시녀에게 밀린다고?”
“자, 진정하게!”
“어떻게 진정하나? 우린 자네를 믿고 따르고 있네. 관직에 나가서도 자네의 편에 설 것이고…….”
“내가 책임지겠네.”
“어떻게 책임진다는 말인가?”
“가문의 힘과 내 머리를 모두 쥐어 짜내서 그들을 몰아낼 것일세.”
“믿어도 되겠는가?”
“나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나? 우리 가문이 어디인지를 잊었나? 산서의 최씨 가문일세.”
“대체 어떻게 그들을 쫓아낼 텐가?”
“돈과 권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던가?”
“…….”
“내가 팽가 놈에게 몇 번 당했다고 나를 물로 보는군. 내가 누군지 잊었나 보네. 나 최유지일세, 최유지.”
최유지가 눈을 빛냈다.
마치 무인의 눈빛처럼 날카로움이 묻어 나왔다.
그의 기세에 홍금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옆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는 일꾼으로 보이는 노인 하나와 노파 하나가 빗자루로 열심히 바닥을 쓸고 있었다.
노인과 노파 모두 등은 굽어 있었으며, 빗자루를 든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을 본 홍금호가 헛기침하자 최유지가 피식 웃었다.
“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들은 귀가 어두워 우리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네. 은퇴를 앞둔 노새라고 보면 되지.”
“그건 다행이군.”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우리는 이만 슬슬 돌아가 보세.”
“알았네.”
홍금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가자 일꾼 중 노인이 그들을 향해 굽신거렸다.
노파는 그들이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쓰르륵.
노파는 눈까지 안 보이는지 빗자루 최유지의 다리를 쓸었다.
최유지는 미간을 좁히며 노파를 바라봤다.
그는 노파에게 신경질을 내는 대신 혀를 찼다.
“쯧쯧, 안됐구나.”
최유지를 마지막으로 유생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 * *
유생들이 모두 사라지자 노파의 등이 살짝 펴졌다.
그것도 잠시, 주변을 확인한 노파는 등을 꼿꼿이 폈다.
노파의 눈빛에는 서늘할 정도의 한기가 서려 있었다.
노인 역시 눈을 빛내며 등을 꼿꼿이 폈다.
노인의 눈은 노파와는 반대로 태양처럼 붉게 빛났다.
꼬리를 드러내며 사라지는 붉은 노을만큼이나.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저놈들 목을 부러뜨리고 싶습니다, 대주.”
“아서라. 재롱 좀 부리겠다는데 그냥 내버려 둬. 대신!”
“명을 내리십시오, 대주.”
“재롱을 조금 더 재미있게 보려면 판은 깔아 줘야지.”
“계획을 앞당기란 말인가요? 대주.”
“일이 앞당겨졌다고 신호가 왔더구나.”
노파는 검지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유림 서원에서 한참 떨어진 산이었다.
그 산을 보던 노인의 눈이 커졌다.
“저, 저건…….”
그곳에는 나무밖에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의 색이 조금 달랐다.
멀리 있는 산의 중턱에는 붉은색 나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 나뭇잎의 색을 바꾸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나타내는 숫자는 누가 봐도 ‘일(一)’이었다.
붉은색 나무가 일렬로 쭉 늘어서 있기에 몰라볼 수가 없는 숫자였다.
노파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때가 된 게지. 지겹던 이곳의 생활도 이제는 끝이다.”
“그렇군요. 이제 조금만 참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노인이 붉은색 눈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순간 노파의 주름이 짙어졌다.
“표정 관리하라니까. 변장의 기본은 일관성이라는 것을 잊었나?”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을 노려봤다.
변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동의 일관성이었다.
행동에는 당연히 목소리와 표정 관리도 들어간다.
노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또 뭐가 문제지?”
“저놈들이 해코지하려는 유생 말입니다.”
“하북팽가에서 왔다는 유생 말인가? 그 유생이 뭐가 문제지? 내가 보기에는 약해 빠진 유생들과 별 차이가 없던데.”
“네, 그 유생이야 별 볼 일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녀들이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느끼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시녀들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중 하나가 눈에 익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누굴 말하는 거지?”
“가장 어린 시녀를 어디선가 본 듯합니다.”
“어린 시녀라…….”
“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그 시녀 말입니다. 소…… 뭐라고 했더라?”
“그건 착각인 게지. 우리가 유림 서원에 들어온 지 벌써 오 년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 어린아이와 안면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대주.”
“쉿.”
노파가 입술에 손을 대자 노인은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를 다시 잡았다.
노파도 어느새 비질을 하고 있었다.
쓰윽. 쓰윽.
꼿꼿이 세웠던 그들의 허리는 축 늘어졌고 비질을 하는 그들의 팔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도 없는 뒤뜰에서 비질을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다.
터벅터벅.
노인과 노파는 상대의 기척을 못 들은 척 묵묵히 자신의 일만 수행했다.
발소리가 멈추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 많으세요, 할머니.”
“…….”
“이거 드실래요?”
“…….”
“귀가 잘 들리지 않나 보네요, 할머니.”
“…….”
상대는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노파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인 채 비질에 전념했다.
상대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이쯤 되면 지쳐서 지나갈 법한데 끝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고 고개를 들고 말을 받아 줄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변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행동의 일관성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고개를 든다면 상대는 노파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파의 생각이었다.
계속 말을 걸어오는 상대 때문에 노파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노파의 눈앞에 뭔가 빠르게 다가왔다.
쓱.
순간 노파의 손이 움찔했다.
기세는 없었지만 그 움직임이 은밀했으며, 빠르지는 않았지만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노파는 이를 악물고 움직이려는 손을 멈췄다.
이곳이 유림 서원임을 떠올린 것이다.
유림 서원에서는 그 어떤 유혈 사태도 일어날 수 없었다.
사건을 일으킬 만한 인물은 오직 자신밖에 없음을 노파는 알고 있었다.
그때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던 물건이 멈췄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노파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앳돼 보이는 여자 하나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하북팽가에서 왔다는 유생의 시녀였다.
노파가 빤히 바라보자 시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해요.”
“무, 무슨 일인가요?”
“이거 드시라고요.”
시녀는 꼬치를 노파의 손에 쥐여 주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노파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뭡니까? 대주.”
“보면 모르느냐? 당과 아니냐?”
“그러니까요. 왜 당과를 주고 갑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그 당과……. 제가 한번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됐다.”
말을 마친 노파는 허리를 굽힌 채 당과를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당과를 다 먹은 노인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계획을 살짝 바꿔야겠다.”
“계획을 바꾸다니요?”
“아주 살짝만…….”
노파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 * *
일주일 후, 한빈의 처소.
오늘도 어김없이 한빈의 방에는 설화와 청화가 찾아왔다.
그녀들은 한빈에게 유림 서원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한빈이 물었다.
“수상한 점은 없다는 거지?”
“네, 수상한 점은 없었어요.”
그때 청화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공자님, 언니가 수상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자 청화가 말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언니가 서원을 청소하는 일꾼한테 자꾸 당과를 갖다줘요.”
“그게 뭐가 수상해?”
설화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청화가 씩 웃었다.
“언니가 당과를 양보한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빗자루도 겨우 잡고 있는데 안타깝잖아. 그리고 그거 공자님이 가져다주라고 한 거야.”
“공자님이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그 소리에 한빈이 말했다.
“들어오시죠, 최 유생.”
순간 문이 열리고 최유지가 들어왔다.
한빈의 앞에 선 최유지는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오늘 밤에 유림 서원의 전통인 죽림칠회가 있습니다. 잊지 않으셨나 하고요.”
“네, 잊지 않았습니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림칠회는 한빈도 익히 알고 있는 유림 서원의 전통이었다.
죽림칠회는 유림 서원의 명물인 대나무 숲에서 열리는 문장 대회.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의 문장을 겨룬다.
그중 가장 탁월한 일곱 개의 문장을 고르는 절차가 바로 죽림칠회였다.
음주가 금지된 유림 서원이지만, 이날만큼은 시를 읊으며 술에 취할 수 있었다.
최유지가 조심스럽게 한빈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