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낭중지추 (1)
자리에서 일어난 설화가 말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군이 병사와 함께 추위와 더위, 힘든 일과 괴로운 일,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해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스승님.”
제갈공려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설화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제각각이었다.
동경.
질투.
무관심.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한빈은 그들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유생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바로 질투라는 존재였다.
지금만큼은 설화는 다른 유생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릴 만큼 똑똑한 시녀였다.
물론 우연은 아니었다.
그것은 설화의 노력이었다.
한빈이 설화와 청화에게만 일을 맡겨 놓고 그냥 처소에 있었을까?
한빈은 장유중 학장보다 유생과 시비들의 처소에 집중했었다.
한빈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이 웃음은 진심이었다.
전생에 자신을 대신해서 칼을 맞았던 아이에게 이제야 선물을 제대로 해 준 것 같았다.
지금의 대답을 보면 누가 전직 살수라 생각하겠는가!
한빈은 기분 좋게 용린검법을 바라봤다.
설화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빨리 ‘지(智)’의 구결을 늘려야 할 때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제갈공려는 살짝 눈매를 좁혔다.
설화가 저리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제갈공려는 알고 있었다.
제갈공려가 생각하기에 설화의 진정한 스승은 한빈이었다.
해탈한 고승처럼 허공을 바라보는 저 모습이란?
한 마리의 학이 고고하게 걸으며 땅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는 모습과도 같았다.
제갈공려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제갈가의 은인이라 생각했다.
제갈가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혜를 입는다면 그것 보통 인물이 아니어야 했다.
누구보다 고매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누구보다 월등한 무공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중원 제일의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실 제갈공려가 살짝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한빈의 성품이었다.
제갈공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제갈공명은 유비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제갈공려는 한빈은 천하제일인으로 만드는 데 자신 있었다.
여기서 천하제일인이란?
무공만 천하제일이 아니었다.
모든 방면에서 천하제일을 의미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강호라는 이름이 생기고 이런 인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갈공려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장유중이 준 족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제갈공려는 한 가지 시험을 더 해 보기로 했다.
제갈공려는 족자를 펼쳤다.
촤르륵.
순간 유생들의 눈이 커졌다.
족자에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유생 하나가 족자를 가리켰다.
“앗, 저것도 선묘도라는 물건 아니야?”
“허, 진짜네. 선묘도가 하나가 아니었다니!”
“그럼 전부 가품 아니야?”
“에이, 경을 칠 소리 하지 말게. 황궁에서 온 물건을 가짜라고 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수가 있어.”
모두가 선묘도를 보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는 피식 웃었다.
선묘도라?
사실 이 선묘도는 제갈세가의 선조가 전전대 황제에게 바친 그림이었다.
선묘도가 나타내는 것은 어진 황제와 청렴한 관리라고 한다.
제갈공명이 그렸다는 말도 있고 진법의 천재였던 제갈무송이 그렸다는 말도 있다.
누가 그렸든, 제갈세가의 선조가 그린 것은 맞았다.
제갈세가에서 전전대 황제에게 이 그림을 진상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 당시 관리가 상상도 못 할 만큼 부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운인지 선묘도의 오묘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그림을 받은 전전대 황제는 그 후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선묘도는 본래 형태를 잃어버렸다.
전전대 황제가 선묘도를 감상하기 위해 족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묘도의 형태는 본래 스무 폭이나 되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황궁에 이 그림을 걸어 둘 장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묘도를 보전하기 위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족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전전대 황대가 자신의 침실에 걸어 두기 위해 불가피하게 족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 후 선묘도는 제갈세가에서도.
황궁에서도 잊힌 물건이 되었다.
제갈세가에서 전전대 황제에게 선묘도를 바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하는 그림이라고 해서였다.
제갈세가는 지금은 선묘도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전전대 황제에게 선묘도를 진상하면서 이 그림은 제갈세가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선묘도는 자신의 임무를 모두 완수하지 않았던가?
기나긴 세월이 흘러 선묘도의 일부가 제갈세가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을 손에 들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제갈공려는 이 선묘도를 유생들의 시험에 쓰기로 했다.
예상대로라면 한빈은 이 문제를 맞힐 수 없었다, 이것은 제갈세가의 사람만이 풀 수 있었다.
또한 이 문제는 욕심이 없어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제갈세가의 사람들도 이 문제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풀 수 있는 것이지,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제갈공려는 한빈을 힐끔 보다가 이내 다른 유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웅성거리며 의견을 주고받는 유생들을 조용히 바라봤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제갈공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공려는 손뼉을 치며 유생들의 시선을 모았다.
짝!
유생들의 시선이 모이자 제갈공려는 족자를 대들보에 걸었다.
족자가 완벽하게 펼쳐지자 학생들의 눈이 빛났다.
한빈도 기지개를 켜며 족자를 살폈다.
족자 안에는 신선처럼 생긴 거대한 고양이가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남색 등 갖가지 색깔의 쥐가 놀고 있었다.
모두가 신기한 듯 족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제갈공려가 말했다.
“이 그림은 선묘도라고 하지요.”
“정말 선묘도란 말입니까? 지난번에도 선묘도가 있었는데…….”
유생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뒤쪽에 유생들도 자신의 의견을 뱉어 냈다.
“맞습니다. 지난번에도 선묘도라고 했습니다.”
“혹시 이건 가짜인가요?”
유생들은 하나같이 신기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려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선묘도, 이것도 선묘도지요. 오늘의 마지막 문제는 이 족자에서 내겠습니다.”
“…….”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자 제갈공려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간단해요.”
제갈공려는 유생들과 눈을 마주치다 마지막에는 한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상태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하얀 신선 고양이가 보이죠? 이 고양이가 아래에 있는 쥐 중에 어떤 것을 먹을 것인지를 맞히는 것이 이번 문제예요.”
“…….”
“맞히는 유생에게는 이 선묘도를 줄 테니 분발해 보세요. 단! 기회는 일인당 한 번이에요.”
동시에 유생들의 눈이 위에 있는 신선 고양이와 아래에 있는 쥐를 번갈아 왕복했다.
모든 유생이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물론 최유지도 마찬가지였다.
최유지가 이렇게 필사적인 이유는 선묘도가 탐이 나서가 아니었다.
한빈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최유지는 힐끔 한빈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선묘도를 찾아서 한빈에게 바치면 이번 주 할당량은 끝이 난다.
이 노예 계약이 유림 서원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최유지는 자신을 따르는 유생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그들은 최유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최유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다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보게.”
“말해 보게, 최 유생.”
“쥐가 일곱 마리니, 하나씩 찍으면 정답이 아니겠나? 지금은 누구 하나가 정답을 맞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세. 우리가 정답을 맞히는 게 중요할 뿐이지.”
“오호, 자네는 천재일세.”
“빈말은 됐고. 이제부터 시작해 보자고.”
최유지의 지시에 따라 유생 무리는 각각 한 마리씩 찍기로 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선택.
최유지는 허례허식보다는 실질적인 이익을 따지는 유생이었다.
옆에서 제갈공려가 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답을 맞혀서 목표를 쟁취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작전을 짜는 모습을 본 설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앞서 맞힌 정답은 쓸모가 없었다.
설화에게 중요한 것은 선묘도였다.
물론 한빈이 선묘도를 찾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설화는 조용히 청화와 소군을 바라봤다.
그들처럼 찍기에는 머릿수가 부족했다.
설화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래요, 언니?”
“저 문제의 정답은 나도 모르겠어. 찍는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차라리 공자님께 물어보세요.”
“공자님?’”
설화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한빈은 정답을 알고 있을까?
설화는 정답을 가르쳐 달라는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빈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허허롭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빈도 정답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한빈은 누가 정답을 맞히든 상관없었다.
누가 정답을 맞히든 선묘도는 자신의 손에 들어올 테니까!
그때 여기저기서 정답을 외치는 유생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초록색입니다.”
“빨간색…….”
“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
유생들은 계획대로 갖가지 대답을 쏟아 내었다.
모두가 답한 후 제갈공려는 한빈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팽 유생은 어떻게 생각하죠?”
“저는 다른 유생들의 대답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학사님.”
“오호.”
제갈공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는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제갈공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정답을 맞힌 유생은 없습니다. 대답을 안 한 유생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죠.”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유생 하나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제갈공려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정답을 맞힌 유생이 없다고 했습니다.”
“혹시 풀이 과정까지 말씀드려야 하나요?”
“풀이 과정은 필요 없어요. 그냥 정답만 맞히면 된답니다.”
“저흰 모든 쥐를 다 찍었는데 어떻게 정답이 없을 수 있습니까? 학사님.”
“왜 그럴까요? 그건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지요.”
“…….”
유생들은 침묵이 빠졌다.
대부분의 유생은 한 번의 기회를 썼다.
그때 최유지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정답을 알 것 같습니다.”
“오호, 말해 보세요.”
“저 같으면 모든 쥐를 잡아먹을 것 같습니다.”
“흠, 다른 유생과는 다른 독특한 대답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정답…….”
“미안하지만, 정답은 아니에요.”
순간 소호각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휴!”
“그럼 대체 정답이 뭐지?”
“아, 학사님께서 우리를 놀리시는 건가?”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불만 섞인 목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그때였다.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스윽.
제갈공려는 고개를 돌려 손을 든 이를 바라봤다.
제갈공려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나요? 청화 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