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90화 (490/621)

490. 천재와 노력파 (5)

유림 서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양석봉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무림세가에서 온 자가 자신보다 유림 서원을 더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양석봉은 호기심이 드는 동시에 묘하게 가슴 한쪽에 경쟁심이 피어났다.

사실 이런 종류의 경쟁심은 처음이었다.

양석봉은 안휘에서도 최고였고 이곳에서도 최고가 될 것이라 항상 자신했었다.

그런데 유림 서원의 문턱을 넘기도 전에 모든 예상이 깨진 것이다.

양석봉은 이 모든 것이 상대의 계략에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은연중에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혈을 제압해서 밤새도록 호롱불을 켠 채 탁자 위에서 잠이 들게 했을 때만 해도 이를 부득부득 갈았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자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장유중 학장의 눈에 들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양석봉은 자신이 누군가를 보살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배려받은 적은 없었다.

그때였다.

양석봉은 눈을 크게 떴다.

상념에 든 사이 한빈 일행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석봉은 멀어지는 한빈을 다급하게 따라갔다.

“같이 갑시다.”

* * *

일과가 끝난 한빈의 처소.

한빈은 턱을 괸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찰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조심하라니?”

서찰은 제갈공민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찰에는 몇 글자만 쓰여 있었다.

[인급(人級) 경보(警報)]

제갈공민이 보낸 인급 경보란 말은 정의맹에서 쓰는 용어였다.

정의맹은 위험을 감지하면 해당 지역에 경계경보를 보낸다.

여기서 인급 경보란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를 위협에 대한 경고였다.

지역의 위험은 인급으로 표시하고 나라의 위험은 천급으로 표시한다.

물론 정의맹과 관계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경고를 보낸 이유는 한빈을 정의맹의 일원으로 생각해서인 것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사실 이곳만큼 편히 쉴 공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곳은 황궁의 힘이 미치는 곳.

그 어떤 무림 집단도 이곳을 비집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인급 경보라?

한빈은 이 경보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정의맹의 군사인 제갈공민이라면 허투루 이런 서찰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떤 첩보를 입수한 것일까?

이 서찰을 받고 한빈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이 호롱불을 켠 채 번갈아 가며 경계 태세를 취하는 것도 이 서찰 때문이었다.

양석봉의 방에 호롱불을 켜 놓고 온 것 역시 이 서찰 때문이었고.

곳곳에 불이 켜진 방이 있다면 염려하던 일이 일어날 확률도 줄어드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양석봉과 설화 그리고 청화, 소군이 차례대로 장유중의 눈에 드는 일이 일어났다.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한빈은 이번 일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다.

일단 무리를 나누어 살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한빈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이제는 한빈 일행과 최유지 일행을 나누어 생각하면 되었다.

한빈이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하얀 천이 창문 앞에서 일렁거리더니 바람 소리를 내었다.

휙.

그 소리에 한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설화가 왔구나.”

“네, 공자님. 저 왔어요.”

“순순히 내놓더냐?”

“네, 제가 가니 바로 전해 주더라고요.”

설화는 한빈에게 둘둘 만 족자 하나를 건넸다.

그 족자를 받은 한빈은 재빨리 탁자 위에 펼쳤다.

족자 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뭐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재빨리 물었다.

“공자님, 왜 그래요?”

“선묘도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서 그러지.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최유지 유생도 펴 보고는 별거 없으니까 순순히 내놨겠죠.”

설화가 족자를 가리켰다.

족자는 다름 아닌 선묘도였다.

장유중이 최유지에게 준 것인데, 그것이 다시 한빈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이유는 바로 한빈과 최유지의 계약 때문이었다.

한빈은 턱을 쓰다듬으며 선묘도에 집중했다.

“흠, 여기에 비밀이 있다는 건데…….”

“저도 오면서 잠깐 봤는데 저잣거리에서 파는 흔한 족자 같은데요. 이게 황궁에서 왔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돼요, 공자님.”

“그 말이 사실이었군.”

“무슨 말이요?”

“금미랑 소저가 은밀하게 해 준 말이 있었거든. 선묘도는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어.”

“그럼 이게 가짜라는 이야기예요?”

“가짜일 수도 있고 선묘도의 한 부분일 수도 있겠지.”

“헉, 그런…….”

“그래, 장유중 학사님에게 아직 받아야 할 게 남아 있다는 얘기지.”

“그걸 어떻게 받아요?”

“계속 문제를 내지 않을까?”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저하고 청화가 열심히 공부해서 나머지도 받아 낼게요. 아 참, 소군도요.”

“…….”

한빈은 말없이 웃었다.

그 모습에 설화도 마주 웃었다.

설화의 웃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설화는 이곳에 와서 제법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중 하나가 학문의 중요성이었다.

공부하지 않으면 한빈을 보필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한빈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밤에 호롱불을 밝힌 채 서책에 집중했다는 것은 장유중의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설화는 밤새도록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강론이 열리는 소호각.

설화는 동생들을 이끌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한빈은 앞쪽 자리에 앉았지만, 설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끝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설화는 심호흡했다.

차라리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나았다.

왠지 이곳은 하의와 상의를 바꿔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오늘 설화의 목표는 간단했다.

한빈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어제 장유중과 다른 강사들을 미행한 결과,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금미랑의 말대로 선묘도는 한 장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내려온 여러 장의 선묘도를 장유중은 몇몇 강사들에게 나눠 줬다.

한빈이 알아서 손에 넣겠지만, 설화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도움이 되고 싶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강사가 들어왔다.

순간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이번 강론 강사는 다름 아닌 제갈공려였기 때문이다.

제갈공려가 소호각에 들어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강호의 포권과는 약간 다른 것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지만, 포권한 주먹을 앞으로 내미는 대신 유생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건 유생들의 예법인 것 같았다.

설화는 재빨리 그들의 동작을 따라 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요.”

설화는 고개를 들어 제갈공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그 시선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때 양석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유생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학사님.”

“말해 봐요, 양 유생.”

“새로운 유생은 장유중 학사님의 허락하에 청강하게 되었습니다.”

“아, 장유중 학장님이 말씀하신 유생들이었군요.”

제갈공려는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을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를 짓는다.

설화도 마주 웃으며 서책을 꺼냈다.

설화는 서책을 꺼내며 동생들에게 재빨리 눈짓했다.

강론에 임할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그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제갈공려도 서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소호각에 있는 유생들을 살폈다.

모두가 나온 것을 확인한 제갈공려는 모두에게 물었다.

“지난 시간에는 육도(六韜) 중 용도(龍韜)에 대해서 배웠다고 들었어요. 모두 기억나나요?”

육도란 태공망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병서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제갈공려가 사서삼경이 아닌 병서를 강의하는 것은 어찌 보면 딱 맞았다.

제갈세가는 무림에서나 관에서나 모두 병법의 대가로 평한다.

유생들은 대체로 병서에 약한 편이다.

하지만 제갈가에 병서에 대한 강의를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유생들도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다.

청화와 소군도 올망졸망 눈을 빛내며 제갈공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납니다.”

“알고 있습니다.”

“기억나요.”

물론 청화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지난번 강의에서 다른 강사들을 감시하느라 설화와 함께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저 설화는 누구보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공려가 말했다.

“그럼 누가 일어나 육도의 용도 편에서는 무엇을 다뤘는지를 이야기해 보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휙 일어났다.

“용은 제왕과 장수를 말합니다. 용도에서는 장수의 자질과 요건에 대해서 폭넓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똑 부러지게 말한 이는 다름 아닌 최유지였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가슴을 활짝 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양석봉을 힐끔 바라봤다.

계략에 빠져 곤욕을 치르고는 있지만, 지식에서는 자신이 윗줄이라는 자신감을 담아 양석봉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계략에 빠뜨린 것은 한빈이었지만, 그는 지금 양석봉을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가에서 온 이가 그런 계략을 세울 리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기를 부추긴 것도 양석봉이었다.

최유지의 분노는 모두 양석봉에게 향하고 있었다.

양석봉은 그를 눈에 담았다.

최유지는 항상 일등을 해야 적성이 풀리는 친구였다.

물론 강론의 일등은 누구나 원하는 자리였다.

유림 서원 수료 후 출세가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제갈공려는 만족스러운 듯 부채로 탁자를 톡톡 쳤다.

“그래요, 최 유생. 잘했어요. 그럼 다음으로…….”

제갈공려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그의 수업 방식이었다.

사실 병서에 대한 이런 수업 방식은 유생들에게는 조금 버거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손을 들었다.

사실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제갈공려의 미모 때문이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의 미모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제갈세가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제갈공려도 뜻하지 않은 열정적인 수업 태도에 흡족한 듯 연신 미소를 피워 냈다.

사실 설화는 조금 황당했다.

이상하게도 설화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제갈공려의 배려였다.

아는 사람이기에 설화와 청화를 배려한 것이다.

설화가 분위기를 파악하며 시간을 보낼 때, 제갈공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용도 편에서 말한 장수가 승리하는 세 가지 방법을 말해 보아라.”

갑자기 실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

유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갈공려의 질문 공세에 밑천이 다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그것은 상한 떡을 던져 주는 의미였다.

자신들이 답하지 못하는 것은 한빈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한빈은 뭔가를 기다린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답해도 될까요?”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서 손을 든 이에게 몰렸다.

한빈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설화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갈공려가 활짝 웃으며 설화를 가리켰다.

“이번 답은 설화 유생이 말해 보세요.”

설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