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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89화 (489/621)

489. 천재와 노력파 (4)

양석봉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구멍으로 반대편을 바라봤다.

구멍의 반대편에는 강사들의 집무실이 있었다.

집무실에서는 강의실을 샅샅이 살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을 통해 자네들을 관찰하고 있었네.”

“…….”

양석봉의 눈빛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한빈이 피해자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양석봉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족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석봉은 머리털이 쭈뼛 솟는 착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계획적이라는 것일까?

물론 모든 의문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그때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뭘 그리 놀라나, 양석봉 유생?”

“아, 아닙니다. 학장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곳에는 자네들밖에 없으니 편히 질문하게.”

“사적인 질문이라…….”

양석봉은 말끝을 흐렸다. 막상 질문하려고 보니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때 양석봉은 옆에서 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힐끔 돌려 보니 어느새 한빈이 서 있었다.

양석봉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양석봉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유중에게 다가갔다.

장유중도 한빈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양석봉을 지나쳐 장유중의 앞에 섰다.

장유중이 물었다.

“자네도 질문이 있나?”

“질문은 아니고 학장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라…….”

“학장님의 혜안이 없었다면 저는 유림 서원에 있는 동안 다른 유생들의 등쌀에 고생했을 겁니다. 그런데 학장님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저와 양 유생을 배려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흠.”

장유중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은괴나 금괴가 들어 있을 만한 조그마한 상자였다.

장유중은 눈을 크게 뜨고 호통을 쳤다.

“내 자네를 잘못 본 것 같네! 신성한 서원에서 뇌물이라니!”

“뇌물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

“직접 열어 보시죠.”

한빈은 조그마한 나무 상자를 건넸다.

당당한 한빈의 태도에 장유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무 상자를 받았다.

거침없이 나무 상자를 열어 본 장유중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뭔가?”

“안경이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아마 황실에도 몇 개 없는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경이라…….”

장유중이 눈을 크게 떴다.

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안경에 대해서 모를 수 없었다. 세상에는 눈이 밝아지는 오묘한 물건이라 소개된 물건이었다.

안경을 실물로 본 것은 장유중도 처음이었다.

그때 한빈의 설명이 이어졌다.

“질 낮은 유리 대신 북해빙궁에서도 귀하다는 천년빙정을 깎아서 돋보기를 만들었습니다.”

“허허.”

“그 돋보기를 무소의 뿔 사이에 끼워 넣어 만든 것이 그 안경입니다. 그리고 고리는 일반 천 대신에 천잠사를 꼬아서 만들었습니다.”

“대체 이 귀한 걸……. 왜 내게 주는 것이냐? 그리 귀한 것이라면 뇌물이 아니더냐?”

장유중이 거침없이 질문을 쏟아 냈지만, 한빈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학장님의 시력이 전과 같지 않으신 것 같아서 드리는 겁니다.”

“흠. 그건 어디에서 들었느냐?”

“항상 앞쪽의 유생만 부르시지 않습니까? 기억력이 안 좋아서 뒤쪽의 유생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안 좋으셔서 뒤쪽의 유생을 못 알아보는 듯 느꼈습니다.”

“허허.”

장유중이 웃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모든 유생을 두루 살펴 달라는 제 부탁이 들어 있는 선물입니다.”

“…….”

장유중이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장유중은 한빈이 건넨 안경을 눈에 대 보았다.

시원한 기운이 눈에 스며들며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대체…….”

“잘 맞으시나 봅니다, 학장님.”

“허허.”

다시 웃음을 토해 내던 장유중은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장유중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강의실 입구 쪽을 바라봤다.

“저 밖에 있는 유생도 보이는군.”

“네?”

이번에는 한빈이 놀랐다.

유생은 모두 강의실을 벗어났다.

그런데 장유중이 남아 있는 유생이 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밖에 있는 유생들에게 들어오라 전하게.”

장유중이 강의실 밖을 가리키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밖에는 유생이 없습니다.”

“안경은 자네가 껴야 하겠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는 서책을 들고 상투를 틀고 상투를 덮는 속관을 해야지만 유생이라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배움을 청하는 이라면…….”

“맞네. 그러니 저 친구들도 유생이라 할 수 있지.”

장유중은 손가락으로 힘차게 강의실 입구를 가리켰다.

한빈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장유중이 가리킨 곳에는 다름 아닌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이 당황한 채 서 있었다.

장유중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들어오라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한빈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설화 일행을 불러들였다.

그녀들이 자리에 앉자, 장유중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하, 똘똘하게 생겼구나.”

“저희가 앉아도 되나요? 할아버지.”

설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장유중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아버지라니?”

“…….”

설화는 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라는 호칭 외에 다른 호칭은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한 설화의 표정을 본 장유중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스승이라 불러도 좋다.”

“스승님이요?”

“그래. 유림 서원에 소속된 유생이 아니니 학장이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그냥 스승이라고 불러도 된다. 배우기 싫으면 그냥 나가도 뭐라고는 안 하겠다.”

“아,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여기 앉아서 배워도 되나요?”

“당연하지. 나는 웬만한 유생들보다도 학문에 관심을 쏟는 너희의 모습을 진작에 봤다.”

“저희 모습을 봤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첫날 강의 때부터 저 밖에서 누구보다 더 눈을 빛내고 있지 않았냐?

“눈을 빛낸 건…….”

설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의실을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빈이 강의실에 있는 동안 설화가 맡은 임무는 다름 아닌 강의실의 감시였다.

장유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멀리서도 너희의 불타는 마음을 느꼈다.”

“그건…….”

설화가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설화나 청화가 내뿜는 미약한 기세를 느낀 것도 같았다.

사실 설화는 장유중에게 놀라고 있었다.

설화는 기척과 기세를 절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약한 기세를 느끼려면 무공의 경지가 초절정은 되어야 했다.

설화는 지금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녀는 장유중이 학문에 있어 화경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그때 청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스승님, 저 오늘부터 공부할래요.”

“저, 저도요.”

소군도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들의 모습에 장유중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천재 하나에 노력파가 넷이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빈이 조심스럽게 묻자 장유중이 웃었다.

“허허, 그건 지금 말할 것이 아니네. 누가 천재이고 누가 노력파인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알겠지. 그런데 말이야…….”

장유중이 살짝 말끝을 흐리자, 한빈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말씀하시지요.”

“내 평생 이번만큼 즐거운 강의가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네.”

“…….”

한빈은 답하지 않았다.

장유중이 무엇을 그리 즐거워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유중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새벽까지 호롱불이 켜져 있는 것은 양석봉의 처소만이 아니었다.

호위 무사와 시비들의 처소에도 호롱불 하나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한빈의 시비들 처소였다.

장유중은 그녀들이 이름이 각각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주인을 따라 낯선 곳에 왔으면 피곤할 것이 분명했다.

그 힘든 상황에도 밤새도록 호롱불을 켜 놓고 배움에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은 장유중의 가슴 한쪽에 열정이라는 불을 지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밖을 바라보니 강의실 밖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것도 그녀들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강의실 안쪽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들의 모습에 장유중은 감동했다.

배움에 귀천이 어디 있는가?

장유중은 진심으로 그녀들의 스승을 자처하고 싶었다.

강론을 끝낸 장유중은 안경을 벗었다.

그는 흐뭇한 눈빛으로 안경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 안경 덕분에 조금 더 제자들에게 열정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안경을 쓰고 강의실을 나갔다.

밖을 보니 한빈 일행이 점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갈 길을 가려던 장유중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한빈이 가는 길 주변에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유중은 재빨리 안경을 썼다.

순간 전각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유생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놈들을!”

장유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빈 일행에게 해코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전에 구멍으로 볼 때는 희미하게 보였지만, 이번에는 똑똑히 봤다.

장유중은 그들을 사람답게 만들리라 결심했다.

* * *

한빈은 휘적휘적 전각 사이를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한빈은 조용히 발길을 멈췄다.

탁.

“아까부터 왜 그렇게 따라오십니까?”

“왠지 같이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오.”

양석봉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흠.”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장유중 학장님의 태도 말입니다. 어떻게 팽 유생이 해코지당한 거라고 착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는 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눈이 안 좋아서 착각하실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귀까지 안 들리지는 않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진실을 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으신 거겠죠.”

“그게 어떻게 진실…….”

양석봉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기 때문이다.

양석봉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할 때, 한빈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궁금하십니까?”

“네, 궁금합니다.”

“궁금하면 은전 오백 냥을 내시지요!”

“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남의 영업 비밀을 가져가려면 대가가 있어야지요.”

“헉.”

양석봉은 튀어나오는 비명을 황급히 막았다.

한빈은 당황한 양석봉을 놔둔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양석봉이 손을 뻗었다.

“같이 갑시다, 팽 유생.”

이번에 같이 가자는 말은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원수 같았는데, 이번 강의 시간을 기점으로 묘하게 한빈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빈 덕분에 장유중의 눈에 든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장유중이 새벽까지 유생들의 처소를 감시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호롱불이 켜진 것 하나만으로 장유중이 착각하리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한빈에 대한 의문은 봄날 새싹이 트듯 양석봉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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