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88화 (488/621)
  • 488. 천재와 노력파 (3)

    그의 말에 나머지 유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강의실에는 양석봉과 팽한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유중은 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너희 둘을 남으라 했는지 알겠느냐?”

    “…….”

    한빈이나 양석봉 모두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서원에 오면서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을 지켰다. 사람이 아니면 내 학문을 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너희 둘에게만 내 학문을 전하겠다.”

    “…….”

    양석봉은 아무 말 없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장유중이 비인부전을 중시한다는 것은 양석봉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장유중이 왜 지금 비인부전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두를 내보내고 둘만 남겼을 때, 그는 질책을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둘만 가르친다니?

    양석봉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본 장유중이 흰 수염으로 반듯한 미소를 그렸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 송구하오나 제 지식이 짧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도 궁금하겠지. 잠시 이리 나와 보아라.”

    “네?”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니 편히 나와 보아라.”

    “알겠습니다.”

    양석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쪽에 있던 한빈도 눈치껏 그의 옆에 섰다.

    “나는 밖에서 유생들의 됨됨이를 확인했네.”

    “저희의 됨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답의 단서를 얻은 게 최유지 유생이 아니지?”

    “…….”

    양석봉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장유중을 바라봤다.

    순간 등골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왜일까?

    이제까지는 대쪽 같은 학자의 모습만 보였던 장유중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최유지 유생과 나머지 유생이 뜻을 같이했겠지.”

    “…….”

    양석봉은 답할 수 없었다.

    장유중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최유지에게 단서를 돈을 주고 팔았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장유중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뒤 일은 안 봐도 훤했다.

    양석봉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 장유중이 웃었다.

    “무엇을 그리 긴장하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까지 더듬는 것을 보니,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직접 말해 보아라. 네 잘못을 말이야.”

    “그, 그러니까…….”

    양석봉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모든 것을 말한다면 한빈과의 계약 내용마저 밝혀야 했다.

    당황한 양석봉의 표정을 본 장유중이 웃었다.

    “이제는 됐네. 자네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네.”

    “헉,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 학장님.”

    “내 눈은 한 치 앞을 보기에도 노쇠했지만, 마음만은 천 리를 꿰뚫어 보고 있네.”

    은근히 미소를 짓는 장유중.

    양석봉의 등에서 돋은 소름이 머리까지 치솟았다.

    지금 장유중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완벽하게 전후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비인부전이니 뭐니 하면서 안심시켰지만, 장유중은 자신과 한빈을 질책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잘못 보인다는 것은 관직으로 나갈 앞길이 막힌다는 것.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마도 만향각에서 한빈을 만난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양석봉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을 감았다.

    순간 따스한 손길이 그의 어깨에서 느껴졌다.

    힐끔 눈을 떠 보니, 장유중이 이전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석봉은 그것이 범인을 밝혀낸 포졸의 미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 장유중의 입이 열렸다.

    “나는 모두가 팽한빈 유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네. 오직 자네만이 그 못된 행동에 동조를 안 하더군.”

    “네?”

    “거기에 팽한빈 유생으로부터 금품을 갈취하는 것도 보았네. 오직 자네만이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지.”

    “…….”

    양석봉은 아무 말 못 하고 힐끔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양석봉은 다급하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달랬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상황을 아득히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장유중은 현실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스린 양석봉은 안타깝다는 듯 장유중을 바라봤다.

    양석봉은 장유중이 나이가 들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장유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가 한 명을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나서지 못하는 것은 죄이나, 거기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생각했네. 거기에 더해 칭찬할 일이 하나 더 있다네.”

    “그, 그게 무슨 일입니까?”

    “유림 서원에 입학한 유생 중 밤새도록 호롱불이 켜져 있는 곳은 자네의 처소밖에 없더군.”

    “그건…….”

    양석봉이 말끝을 흐렸다.

    새벽까지 호롱불이 켜져 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한빈이 문제의 단서를 준 후 돌아가면서 점혈을 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고 수혈을 짚고 간 덕분에 호롱불도 못 끄고 탁자에 엎드려서 지내야 했다.

    양석봉은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장유중의 눈에 들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모든 것을 고백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양석봉의 눈빛은 다시 흔들렸다.

    새벽에 유생들을 살피는 것으로 봐서 정신이 흐려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당황한 양석봉의 표정을 본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말 안 해도 되네.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메우려 한 게지. 안 그런가?”

    “…….”

    양석봉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안휘 최고의 재능이 갑자기 부족한 재능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뭐, 최고의 학자인 장유중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갑자기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정도의 노력이면 재능이 다소 부족해도 등용하기에는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하네. 아마 내 수업의 의미를 자네는 모를 테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양석봉의 대답에 장유중의 흡족한 미소가 이어졌다.

    “내 수업을 통과한 자 중에 조정에서 밀려난 자는 없네. 아니 관직에 못 나간 자도 없다네.”

    “헉.”

    양석봉은 턱이 빠질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장유중의 눈에 들면 출셋길이 보장된다는 건 익히 알았다.

    그런데 이 수업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출셋길이 열린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놀란 양석봉을 뒤로한 채 장유중은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빈은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빈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심화편(深化篇)]

    [……]

    [지(智) : 일(一)]

    심화편 중 가장 최근에 획득한 구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지 구결은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지(智) : 삼(三)]

    다시 눈을 깜빡하면 구결의 숫자가 바뀌었다.

    [지(智) : 구(九)]

    최종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홉이란 숫자였다.

    그렇다면?

    한빈의 지혜는 이전보다 아홉 배가 늘어난 것일까?

    한빈은 지금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지식이 늘어난 만큼 한빈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에 ‘지’의 구결이 활성화되었을 때의 변화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이 구결은 유생들을 머리로 굴복시켜서 얻은 것.

    굴복시킨다는 의미에서 계약서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양석봉에게 미리 계약서를 써 놨기 때문에 ‘지’의 구결이 활성화되는 것이 수월했던 것 같았다.

    한 가지 결심이 한빈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최대한 ‘지’의 구결을 채우자는 다짐이었다.

    이곳 유림 서원만큼 지혜를 획득하게 좋은 곳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지혜는 강자와의 대결에서 꼭 필요한 구결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장유중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네는 마치 신선 같아 보이네.”

    “아닙니다, 학장님.”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기에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허공을 보며 용린검법을 확인하는 모습이 신선의 풍모와 닮았다는 것은 한빈도 인정하는 바였다.

    장유중은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장유중은 한빈의 어깨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왜 능력을 숨기고 있나?”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보기에 자네는 유림 서원이 배출할 최고의 천재가 될 것일세.”

    “네?”

    “사실 이 문제는 풀라고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네. 그저 자신의 경지를 알라고 내놓은 것이지.”

    “…….”

    한빈은 답하지 않고 표정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대강의 상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튀어 보였다.

    “그런데 자네는 그 문제를 풀었더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상황을 인정하는 한빈을 본 장유중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자네는 이쯤 해서 의문이 들 테지…….”

    장유중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유생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휑하기만 했다.

    빈자리를 확인한 장유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왜 저들에게 상을 내렸는지 궁금하겠지.”

    “…….”

    한빈은 물끄러미 장유중을 바라봤다.

    사실 궁금하지는 않았다.

    최유지가 받은 선묘도는 어차피 한빈의 것이 될 터였다.

    계약서에 의하면 그들이 얻는 모든 물건은 한빈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양석봉이 한빈과 맺은 계약보다 더 악독한 계약서였다.

    한빈의 표정을 본 양석봉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약점은 딱 하나일세.”

    “제 약점이라니요?”

    한빈이 처음으로 당황하자 장유중이 말했다.

    “자네의 약점은 너무 순수하다는 점일세.”

    순간 뒤쪽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헉.”

    그 비명의 주인은 바로 양석봉이었다.

    장유중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놀란 표정을 보니 내가 너무 모든 상황을 꿰뚫어 봤다는 것에 놀란 것 같군. 자네들은 내가 이 상황을 어찌 이리 소상히 아는지 궁금하지 않나? 이리 따라와 보게.”

    장유중은 강단 쪽으로 걸어가며 손짓했다.

    양석봉은 강단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족자에는 하늘을 나는 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족자의 앞까지 간 장유중이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창공에 떠 있는 매였다.

    “이쪽을 잘 보게.”

    “그건 매가 아닙니까?”

    양석봉이 고개를 갸웃하자 장유중이 말했다.

    “매가 아닌 눈을 잘 보게나.”

    장유중의 말에, 양석봉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살피던 양석봉은 입을 턱 벌렸다.

    “대, 대체 이건…….”

    그가 말을 못 잇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매의 눈에는 미세하게 구멍이 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