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유림 서원의 천재 유생 (7)
설화가 눈매를 좁히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가 들어가 봐야 한다는 것이고.”
“아.”
설화가 탄성을 흘릴 때, 한빈이 진법 안으로 들어갔다.
설화도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청화는 소군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갔다.
숲으로 들어간 한빈은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설화와 청화에게 말했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 숲에 있는 토끼를 모두 잡아.”
“한 마리도 빠짐없이요?”
“에이, 그건 불가능하지. 그냥 보이는 토끼를 전부 잡아 와.”
“네, 공자님.”
설화는 살짝 포권하며 다시 우혈랑검을 빼 들었다.
스릉.
순간 한빈이 재빨리 설화의 소매를 잡았다.
“설화야, 죽이지는 말고.”
“아……. 네!”
설화가 우혈랑검을 도로 품속에 넣었다.
한빈이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극적인 것은 좋지만, 중요한 것은 실수를 안 하는 것이야. 일 검에 생명을 빼앗기는 쉽지만, 그 생명을 다시 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아, 그것도 그렇겠네요. 이건 적어 놔야겠어.”
설화는 천을 꺼내더니 흑탄으로 그 위에 글을 썼다.
이것은 설화가 이동 중에 한빈의 말을 받아 적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받아 적은 말이 지금은 제법 많이 모였다.
설화는 이것을 ‘진룡어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설화와 청화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소군이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소군이었다.
한빈의 몇 마디에서 도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도 잠시, 소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은 쥐 잡듯 하면서 토끼의 생명은 또 소중히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던 소군은 뭔가 이상해서 주변을 돌아봤다.
“헉.”
소군이 입을 크게 벌렸다.
한빈과 청화 그리고 설화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었다.
모두 토끼를 잡으러 떠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소군은 움찔움찔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당황도 잠시, 소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한빈의 말이 떠올랐다.
한빈이 항상 강조하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밥값 하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밥값을 해야 할 때임을 소군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 * *
잠시 후.
한빈과 설화 그리고 청화가 한자리에 모였다.
처음에 흩어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설화는 재빨리 보따리에서 실타래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청화는 나뭇가지를 주워서 원을 그리며 바닥에 꽂았다.
설화는 실타래를 풀어 그 나뭇가지 주변을 둘러쳤다.
그들의 앞에는 토끼장이 만들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조금 허름해 보였지만, 토끼장을 감싼 실은 바로 천잠사였다.
누가 이 광경을 본다는 입을 벌리다 못해 턱이 빠지겠지만, 설화는 아무렇지 않게 토끼장을 만드는 데 첨잠사를 쓴 것이다.
그들은 다시 흩어져 토끼를 잡아 토끼장에 넣었다.
한빈은 그 뒤 비슷한 일을 한 시진 정도를 반복해서 수행했다.
토끼장에 토끼들이 바글대자 한빈이 입을 열었다.
“설화야, 청화야. 너희 눈에는 뭐가 보이지?”
“토끼요, 공자님.”
설화가 답하자 뒤를 이어 청화도 말을 이었다.
“저는 귀여운 토끼가 보여요, 공자님.”
그들의 대답에 한빈이 빙긋 웃었다.
“하하. 맞아, 저건 다 토끼지. 그런데 보통 토끼가 아니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 가운데 놈을 한번 잡아 보렴.”
“이놈이요?”
“그래.”
“여기 있어요.”
설화는 토끼의 귀를 잡고 한빈의 앞에 흔들었다.
한빈이 그 토끼를 넘겨받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 이곳을 잘 보렴.”
“헉, 저기에 왜?”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토끼가 알록달록해서 처음에는 몰랐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토끼의 알록달록한 부분은 무늬가 아니라 누군가 새겨 놓은 글자였다.
설화가 놀란 사이, 청화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저건 ‘시(時)’ 자네요.”
“그래, 시가 맞다.”
“왜 여기에 글자가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장유중 학장님이 내준 단서는 명확했지.”
“단서라니요?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설화는 강의실 밖에 있기는 했지만, 내공을 써서 청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기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화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장유중 학장님은 분명히 자연과 벗하라고 하셨지. 그리고 유생들의 건강이 걱정된다고 활동을 하라고도 하셨고…….”
한빈은 살짝 목소리를 높여 설명을 이었다.
“유림 서원에 처음 들어올 때 이상하게 토끼가 많았어. 그것도 수상하다 생각했지…….”
한빈의 설명에 설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단서들이 모여 하나의 명확한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한빈의 목소리가 조금 크다는 것이었다.
항상 비밀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한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 * *
한빈 일행이 있는 장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 정자에는 장유중이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여인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가롭게 차향을 음미하던 여인이 정자의 처마에 달린 풍경(風磬)을 보더니 다급하게 찻잔을 놓았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풍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 옆에 있던 장유중이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혜화야.”
“아무래도 누군가 진법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오라버니.”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혜화라 불린 여인은 장유중의 친동생인 장혜화였다. 장혜화는 다름 아닌 유림 서원 식당의 관리자였다.
모두가 그저 주방의 일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신분을 숨기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장유중은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식당이라고 생각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편안하게 자고, 좋은 옷을 입고 싶은 것은 의, 식, 주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식(食)은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하찮게 여기는 관리자만이 그곳에 있다면?
아마도 백이면 백, 모두 그들의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학장과 학사들이 안 보는 곳에서 유생들은 그들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혜화는 이제껏 유생들의 분란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 그저 관찰자로 묵묵히 식당을 관리해 왔을 뿐이었다.
오늘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유생 하나가 자신에게 은전을 찔러준 것이다.
여태껏 유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유생들은 공부만 아는 족속이었다.
정확히는 세상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삐뚤어진 자가 많았다.
세상을 모르고 공부만 하던 이들이 관리가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바로 가문이나 태풍보다 무섭다는 관리의 비리였다.
유림 서원은 그들의 인성까지 검증한다.
하지만 정작 유생들은 누구로부터 검증받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곳에서는 일꾼조차 나라에서 준 품계가 있었다.
유생들은 열두 시진 내내 그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이런 세세한 안배가 유림 서원을 지금의 명문 서원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장혜화는 이제까지 유생들에게 높은 점수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유생에게만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은전을 찔러줘서는 아니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였다.
장혜화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낸 시험에 그 유생이 통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유중이 낸 문제는 맞히라고 낸 문제가 아니었다.
학문의 깊이가 끝이 없다는 것을 유생에게 알려 주기 위해 낸 문제였다.
그런데 강의 첫날에 그 단서가 있는 진법 안으로 들어왔다고?
이것은 말이 안 되었다.
난처해하는 장혜화의 표정에 장유중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어서 안내해야지. 뭘 꾸물거리느냐, 혜화야.”
“대체 어떻게 이 장소를 알아냈을까요?”
“그야 첫 강의에 내 말을 빠짐없이 들었던 유생이 있었겠지.”
“들었다 하더라도 갓 입학해서 말귀를 알아듣는 유생이 있다고요?”
“네가 누군가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가 보죠. 길을 잃은 걸 수도 있으니까요.”
“허허, 그것도 그렇겠구나. 만약에 내 말을 알아듣고 이곳으로 온 것이라면 문제를 못 풀더라도 천재로 인정해야겠지.”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일단 가 보죠.”
“그러자꾸나.”
장유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혜화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장유중은 조용히 동생의 뒤를 따랐다.
그의 동생인 장혜화는 어찌 보면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병법과 진법의 천재라 불렸다.
하지만 여인이라는 이유로 관리로는 등용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
그나마 그녀가 활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곳 유림 서원이었다.
유림 서원이 난공불락의 요새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장혜화가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진법 덕분이었다.
그때 장혜화가 재촉하듯 외쳤다.
“오라버니, 빨리 오세요. 제 걸음 똑같이 따라와야 하는 거 아시죠?”
“그래, 대신 천천히 가자꾸나.”
“네, 천천히 따라서 오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혜화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잠시 뒤, 그들은 침입자가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침입자들을 관찰했다.
안쪽에서는 이쪽을 못 보기에 그들은 마음 편히 진법 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장혜화와 장유중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유중이었다.
“허허, 지금 단서에 거의 접근했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
장혜화는 답하지 않았다.
단서에 접근한 유생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단서에 접근한 유생은 다름 아닌 유림 서원에서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꼈던 자였다.
분명히 식당에 있어야 할 자가 어떻게 여기에 왔단 말인가?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있었다.
만약 자신의 오라버니가 낸 문제를 풀 유생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 유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혜화가 입을 벌리고 있자, 장유중이 물었다.
“대체 왜 그리 놀라느냐? 혜화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라버니.”
“단서에 접근했지만, 문제를 푸는 것은 아마 어려울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저 친구의 천재성은 인정해 줘야겠지.”
“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문제의 정답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요?”
“풀이 과정이 중요하지. 해결 방법을 모른 채 정답만 외치는 관리는 이 나라에 필요 없단다.”
“흠.”
“왜 그리 아쉬운 표정을 짓느냐?”
“저는 저 유생이 잘되었으면 해서요. 그런데 저 유생의 이름이 뭐죠?”
“팽한빈이라고 하더구나. 하북팽가의 직계로 알고 있다.”
“하북팽가요?”
장혜화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