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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83화 (483/621)

483. 유림 서원의 천재 유생 (6)

정확히는 심화편의 가장 아래 빈 곳이 빛을 내고 있었다.

아직은 빈 곳이지만, 그곳에 변화가 생기려 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때였다.

눈을 멀뚱히 뜨고 있던 양석봉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말이요…….”

“네, 말씀하시죠.”

“그 머리가 좋아지는 점혈이 진짜 가능한 것이오?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팽 유생이 그렇게 적극적인 것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고 말이오. 물론 나야 그런 방법이 필요 없지만 말이오.”

양석봉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본심은 다른 듯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한빈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용린검법의 심화편에 글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智) : 일(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숫자가 나타났다.

한빈은 감정을 추슬렀다.

‘지’라는 구결이 하나 생겼다고 머리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시작이 반이었다.

‘지’의 구결 하나를 얻은 것을 가지고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만져 봤다.

마치 머리 뚜껑이 열린 기분이었다.

머리만 환골탈태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양석봉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봤다.

“너무 무리한 것이 아니오? 표정이 왜 그러시오?”

“아닙니다. 모든 의문이 풀린 것 같아서 그럽니다.”

“허허, 이거 참.”

양석봉이 불안한 표정으로 한빈을 쳐다봤다.

한빈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이다.

양석봉이 볼 때 한빈의 눈동자는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여러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양석봉은 그제야 한빈이 자신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대화를 편하게 나누지만, 계약서가 존재하는 한, 상하 관계가 뚜렷한 상태.

양석봉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한빈은 그의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물론 용린검법의 심화편을 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한빈은 심화편의 ‘지’란 글자 하나를 획득함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일어났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

지(智)의 속성이 활성화되면서 자신이 모르고 있던 지식이 머릿속에 생겼다.

지식이 밀려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났다.

지금 새로운 구결을 획득하게 된 것은 바로 논쟁을 통해서 상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었다.

지를 획득할 수 있는 요건은 몇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논리나 시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지혜에 관련된 구결을 얻는 논리는 간단했다.

신체에 대한 구결을 얻을 때는 신체를 공략했다.

지혜를 얻으려면 머리를 뚫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는 법이었다.

한빈의 눈은 어느덧 평온해졌다.

세찬 풍랑이 지나가고 한빈의 눈동자는 잔잔한 강물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었다.

“다들 밥 먹자.”

“네?”

설화가 깜짝 놀라 되묻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밥 먹으러 온 거면 밥을 먹어야지.”

“그건 맞긴 하는데 조금 전까지…….”

설화를 말끝을 흐렸다.

한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정작 한빈은 조금 전까지 양석봉의 이마를 꿰뚫기 위해 젓가락을 들지 않았던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설화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한빈이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자 양석봉은 입을 벌렸다.

자신은 죽을 뻔했는데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의 일행 중 정상적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양석봉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양석봉의 시야에 당황한 채 젓가락을 들고 석상이 되어 있는 소녀가 들어왔다.

양석봉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정상적인 아이가 하나는 있군.”

“혹시 저보고 말씀하신 거예요?”

소군이 조심스럽게 묻자 양석봉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저.”

“소저요?”

“아, 뭐라 불러야 할지.”

순간 옆에 있던 설화가 웃음을 토해 냈다.

양석봉도 재빨리 젓가락을 들었다.

자신의 당황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양석봉은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에게 묘한 분위기 풍겨 온다는 것은 은연중에 깨달았다.

그것은 절대자의 풍모였다.

안휘 양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주군에 대한 예절이었다.

황제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것이 관리의 목표가 아니던가?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양씨 가문의 어르신들을 보면 하나같이 패왕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양석봉은 그것이 궁금해서 조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조부는 그 기세가 황제의 옆에 있으면서 묻은 것이라고 했다.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던 관리조차 패왕의 기세를 흘리고 있는데, 나라의 주인은 과연 어떨까?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러니 패왕의 기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양석봉은 중앙 정계의 고위 관리뿐 아니라 강호의 고수도 패왕의 기세를 풍기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미세하지만, 그런 패왕의 기세가 일개 시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느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패왕의 기세를 흘리는 시녀를 어떻게 하대하겠는가?

그러니 소저라 불렀지만, 불러 놓고 보니 어쩐지 어색했다.

양석봉이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을 때였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제는 이상하게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니 계약 관계와는 상관없이 호기심이 이는 인물이 바로 한빈이었다.

“자, 밥을 먹었느니 슬슬 출발할까나?”

고개를 들어 보니 한빈 일행이 벌써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그 모습에 양석봉이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가?”

“시험의 단서를 알 것 같습니다.”

“허, 그게 무슨 말이오? 팽 유생.”

“그 이상은 비밀입니다.”

“비밀이라…….”

양석봉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말했다가 틀리면 제가 미안해지지 않습니까?”

한빈이 씩 웃었다.

양석봉은 한빈의 말에 백번 공감이 되었다.

갑자기 상대가 무인이 아닌 서생으로 느껴지는 양석봉이었다.

양석봉이 멍하니 보고 있을 때, 한빈 일행이 들어왔던 입구로 도로 나갔다.

점점이 멀어지는 한빈 일행을 본 양석봉은 머리가 멍해졌다.

태풍처럼 자신에게 다가온 일행이 산들바람처럼 조용히 사라지자 허탈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최유지와 유생들이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양석봉과 시선이 마주친 유생들은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최유지였다.

“양 유생은 시험을 포기했나?”

“자네가 이렇게 사람을 모아서 덤비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단서를 모으겠나. 다 모이면 나한테 귀띔이나 해 주게. 그래, 시험에 대한 단서는 많이 찾았나?”

“하나도 못 찾았다네.”

“못 찾았는데 그 표정은…….”

“허허, 자네는 감이 많이 떨어졌군. 생각해 보게. 나는 지금 소거법(消去法)을 쓰고 있는 것일세.”

“오호, 소거법이라!”

양석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거법이란 유림에서 정답을 도출해 낼 때 쓰는 수법이었다.

정답이 아닌 것을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면 어느덧 정답에 도달하게 되는 법.

그들이 찾고 있던 단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단서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하나씩 뒤지다 보면 어느새 진짜 단서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양석봉이 저 많은 유생을 거느린다면?

그도 소거법을 썼을 것이다.

이미 많은 대상을 제외했으니 이제 진짜 단서에 가까워졌을 터.

그 자신감이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최유지는 슬쩍 몸을 돌리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양석봉을 바라봤다.

“자네 말일세.”

“얘기해 보게, 최 유생.”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단서를 찾으면 내게 팔게. 어차피 나머지 친구들에게도 제안한 내용일세.”

“알겠네. 단서를 발견하면 자네에게 달려가지.”

“고맙네.”

최유지가 돌아서자 양석봉이 눈을 빛냈다.

다른 유생과 멀리 있는 탁자에 앉은 최유지는 자신과 닮아 있었다.

가문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다.

양석봉은 만약 자신이 단서를 찾으면 아주 비싼 값에 팔리라 결심했다.

최유지는 분명 그것을 받아들일 테니까.

양석봉은 다시 시선을 입구 쪽으로 돌렸다.

그는 한빈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최유지 일행보다 시험에 대한 단서를 찾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가 되는 것은 왜일까?

* * *

한빈은 산책하듯 천천히 유림 서원의 전각 사이를 거닐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단서를 찾는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밥을 먹었으면 응당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

“헤헤, 맞아요. 역시 공자님이세요.”

“참, 너희는 챙겨 온 당과나 먹거라……. 아, 벌써 꺼냈구나.”

한빈은 설화를 보며 웃었다.

설화는 벌써 당과 꼬치를 들고 있었다.

청화와 소군은 말없이 떡을 나눠 먹고 있었다.

한빈 일행은 누가 봐도 산책을 하는 중이었다.

평화롭게 전각을 거닐던 한빈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한빈이 향한 곳은 뒷산이 있던 곳이었다.

방향을 바꾸긴 했지만, 한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걸어갔다.

설화와 청화도 아무 의심 없이 즐겁게 한빈의 뒤를 따랐다.

물론 소군은 예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단이 이해가 안 되었다.

식당에서의 행동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설화와 청화도 이상했다.

아니, 그 전에 제갈세가의 사람이 생명의 은인이란 말을 운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소군도 제갈세가는 알고 있었다.

천하 십대세가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가끔 중앙 정계에도 진출해서 관과 무림의 중간에 있는 가문.

즉, 문무를 겸비한 가문이었다.

그런 제갈세가에서 은인이라고 한다고?

문제는 하는 짓이 사파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악하다는 점이었다.

한빈 일행에게 조금이나마 가족애를 느끼는 만큼 의문도 점점 커지는 소군이었다.

그들은 어느덧 수풀이 우거진 곳에 다다랐다.

그곳은 뒷산과 이어지는 숲이었다.

한빈은 숲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누가 봐도 수상하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자님.”

설화가 묻자 한빈이 숲을 가리켰다.

“누가 진법을 설치해 놨어.”

“유림 서원의 경계에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잖아요.”

“여긴 경계가 아니잖아. 즉, 인위적이라는 거지.”

“아, 그렇다면 혹시 적이!”

설화가 우혈랑검을 빼 들었다.

스릉.

설화의 손에서는 우혈랑검이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설화야, 너는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할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너무 긴장하고 있어. 진법이 있다고 적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 그리고 이 진법에는 살심이 느껴지지 않아.”

“나쁜 뜻은 없다는 얘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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