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 유림 서원의 천재 유생 (5)
양석봉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
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비명을 토해 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한빈이었다.
양석봉은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계약은 계약이고 일단은 한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 식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잡았다.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그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척했다.
그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 유생님 아니신가요?”
“…….”
양석봉은 젓가락을 놓고 멍하니 한빈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빙긋 웃는 그 모습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얄미운 입은 열렸다.
“왜 모른 척하십니까?”
“흠, 마지막으로 준 쪽지에 모른 척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만 있을 때는 예외지요.”
“대체 왜 여기에 온 것이오?”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뭔 이유가 있겠습니까?”
“음, 이곳으로 단서를 찾으러 왔군.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소. 그러니 단서를 찾으려면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양석봉은 빨리 한빈을 쫓아내고 싶었다.
“솔직히 단서를 찾아서 온 것이 아닙니다. 뭐, 양 유생님도 볼 겸 식사도 할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허허, 왜 나를…….”
“그야 계약 때문이죠.”
“마지막에 준 쪽지에 따르기로 했잖소.”
“그런데 상황을 보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지금 유생 모두가 최유지 유생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열 명을 모으겠습니까?”
“음.”
양석봉의 눈썹이 꿈틀댔다.
양석봉이 제안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그의 밑에 열 명의 충실한 유생을 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조건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만향각에서 있었던 일이 소문이 퍼지면서 입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금도 부족했다.
자신의 무리를 만들려면 자금은 필수적이었다.
그 모든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한빈이라는 유생이 날려 버렸다.
사실 왜 유생을 모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양석봉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필요한 유생을 다섯으로 줄여 드리지요.”
“허허, 그래 주시겠소?”
“그런데 공짜는 아닙니다, 양 유생.”
“공짜가 아니라면…….”
“내가 양 유생에게 시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시죠.”
“어떻게 하면 되겠소? 팽 유생의 말대로 하리다.”
“그럼 동의하시는 것으로 알고 시행하겠습니다.”
“뭘 시행…….”
양석봉은 말을 맺지 못했다.
대신 눈을 크게 뜨고 한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양석봉은 이런 증상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무림인들이 쓰는 점혈법이라는 무공이었다.
눈만 깜짝일 수 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수법이 분명했다.
양석봉은 순간 사고가 얼어붙었다.
유림 서원에서 자신에게 무공을 썼다는 것은 학칙 위반이었다.
학칙을 위반하면서도 이 짓을 벌인다는 것은…….
여기까지 생각한 양석봉은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살인 멸구?’
그때 다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긴장하지 맙시다, 양 공자. 내 말에 동의하면 눈을 깜빡이시죠.”
말을 마친 한빈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양석봉은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사람이 눈을 깜빡이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과도 같았다. 숨을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양석봉은 한참을 참다가 결국 눈을 깜빡였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한빈이 말을 이었다.
“역시 동의하시는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양석봉은 이를 악물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깜빡인 것을 어찌 동의했다고 해석하는가?
상대는 그가 본 인간 중에 가장 자기중심적이었다.
한빈은 허공과 양석봉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재빨리 책장 추가를 선택했다.
순간 용린검법에서 글귀가 나왔다.
[실력편의 책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용린검법에 변경 사항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확인하겠습니까?]
순간 한빈이 눈을 빛냈다.
최유지와 유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실력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괜히 확인했다가 깨달음이랍시고 갑자기 무아지경에 빠져들면 난감한 일이었으니.
한빈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글귀가 바뀌었다.
[실력편 상급(上級)이 심화편으로 변경됩니다. 담을 수 있는 구결이 더 많아졌습니다.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계속 찾으십시오.]
한빈은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겨우 참으며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확인했다.
[심화편(深化篇)]
지금만큼은 한빈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가는 한빈의 입꼬리를 본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설화야.”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공자님, 많이 수상한데요…….”
눈을 가늘게 뜨며 한빈의 표정을 살피는 설화.
한빈은 재빨리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한빈은 심화편을 다시 살펴보았다.
뭐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심화편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즉, 모든 구결이 실력편에 나와 있던 그대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아래를 보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 ]
빈칸이 하나 새로 생겼다. 한빈은 재빨리 그 칸에 집중했다.
순간 용린검법이 주는 단서가 나타났다.
[심화편을 획득하신 관계로 새로운 구결이 추가됩니다. 새로운 구결을 획득하시겠습니까?]
한빈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공간이 채워졌다.
[지(智) : ]
순식간에 새로운 구결이 추가되었다.
역시 배움이 길은 끝이 없었다.
‘지’라는 글자로 봐서는 지능과 관계있는 구결이 분명했다.
유림 서원에 오니 ‘지’라는 구결이 굴러들어 왔다는 것은?
분명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결에 대한 감상을 마친 한빈은 양석봉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양석봉에게 전에는 볼 수 없던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양석봉의 머리에는 투명한 점이 찍혀 있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그 점을 살폈다.
다 좋은데 점이 머리에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이제까지 한빈은 적에게도 구결을 취했지만, 아군과의 비무에서도 상대를 죽이지 않고 구결을 취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구결이 나타나는 곳이 대부분 요혈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머리라?
구결을 위해서 이마를 뚫는다면?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구결을 얻자고 애먼 유생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식사가 나왔다.
식사를 가져온 것은 유림 서원의 식당 관리인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쟁반을 내려놓고는 한빈 일행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식 나왔어요, 유생님들.”
“잠시만 기다리시죠.”
“…….”
“이건 별건 아니지만, 제 성의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멋.”
여인이 깜짝 놀라 탁자에 놓은 은전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유림 서원에서 수고했다고 돈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유명한 객잔이나 음식점에서는 가끔 이렇게 큰돈을 주고 가는 손님이 있다지만, 유생들은 돈을 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부로 나가서는 펑펑 써 재끼지만, 유림 서원의 식당에서는 이렇게 성의를 표시하는 일은 없었다.
당황한 여인의 모습에 한빈이 은전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앞으로 계속 신세 질 텐데 잘 부탁드린다는 표시입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품속에 은전을 넣었다.
자리를 떠나려던 여인이 말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유생님.”
“아닙니다. 그렇게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 있는 유생님과 조용히 얘기를 나눠야 해서 이만…….”
“그럼 식당 문을 걸어 잠글까요?”
“네?”
“조용히 대화를 나누신다고 하시니 그 정도 편의는 봐드릴 수 있죠.”
여인은 씩 웃으며 기분 좋게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문을 잠그고 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일개 식당 관리인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식당 관리인이지만, 아무래도 이곳의 권력자에게 잘 보인 기분이었다.
이제 식당에는 양석봉과 한빈 일행만이 남아 있었다.
한빈이 젓가락을 들자 모두가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빈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음식이 아니었다.
한빈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양석봉의 이마였다.
딱.
순간 식사를 시작하던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
“네, 공자님.”
설화는 재빨리 신경을 껐다.
가끔씩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다 보니, 설화와 청화는 그러려니 하며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문제는 소군이었다.
소군은 지금 한빈이 무엇을 하려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상대의 이마를 젓가락으로 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고문이었다.
한빈의 행동을 바라보던 소군은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리 봐도 정파의 무인 같지 않았다.
소군이 보기에 한빈은 정파가 아닌 사파에 가까웠다.
한빈은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결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양석봉의 이마에 일렁이는 구결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진짜 뚫어야 할까?”
순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옆에서 식사를 하던 설화는 재빨리 쟁반을 들고 다른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청화도 뭔가 눈치챘는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소군은 별책 부록처럼 그녀들에게 끌려갔다.
한빈이 다시 젓가락으로 양석봉을 찌르자 모두는 입을 벌렸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한빈의 젓가락이 향한 곳은 견정혈이었다.
한빈이 아혈과 마혈을 점했던 바로 그곳.
순간 양석봉이 꿈틀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 비명에 지켜보던 설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 서원에서의 유혈 사태는 피했다고 생각하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물론 청화와 소군의 표정도 풀어졌다.
하지만 양석봉은 아니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양 유생이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머리가 좋아지는 혈도에 대해서 연구 중이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충 저에 대해서 알아보셨을 테지만, 저는 하북팽가 출신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건 자랑이 아니라 하북팽가라면 무가 쪽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가문입니다. 그런 제가 이곳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
“강호인인 제가 험난한 유림에서 견딜 수가 있을까요?”
“험, 말이 될 듯하면서…….”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머리가 좋아지는 혈도였습니다.”
“헉.”
탄성을 토해 낸 양석봉이 한빈을 바라봤다.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양 유생을 해코지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다짜고짜 무공을 쓰면 학칙에…….”
“그것도 그렇습니다. 학칙은 병장기의 사용만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옛 성현의 말씀에…….”
한빈은 쉬지 않고 자기 뜻을 늘어놓았다.
“흠.”
양석봉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했다.
논리적으로 파고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