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 진사쌍검 (2)
한빈은 소군의 앞에 진사쌍검을 내려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군이 눈을 멀뚱거리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이 검은 네가 보관한다. 검동이라고 들어 봤지?”
“검동이요?”
“그래, 시비 중에 특별하게 검을 관리하는 아이를 말한다. 너는 이제부터 이 검을 맡아라. 길이도 적당하니까, 관리하는 데는 그리 힘들지 않을 거야.”
“제가 이 검을요?”
“내가 이 검을 네게 맡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검은 상서로운 기운을 지녀서 귀기를 막는 데 유용한 검이지. 네가 들었던 귀곡성을 이 검이 막아 줄 것이다.”
한빈의 설명에 설화와 청화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래도 되냐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소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언니들 표정이 왜 그래요?”
“부러워서 그러지. 아마도 설화와 청화는 네게 큰 임무를 빼앗기는 기분일 거야. 그러니 네게 잘 위로해 줘라.”
“그, 그렇군요. 공자님.”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참, 이 검은 잘 때도 품고 자야 한다. 잃어버리면 만향각에서 보여 줬던 야명주 열 개로도 감당이 안 될 테니까.”
“헉.”
소군이 입을 딱 벌렸다.
소군은 본능적으로 진사쌍검을 품에 안았다.
귀곡석을 막아 준다는 말보다는 야명주 열 개로도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이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소군은 이 검을 잃어버리는 순간 공자라는 사람이 계약서를 내밀 것이라 생각했다.
소군은 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설화는 혀를 찼다.
귀곡성 때문에 놀란 아이에게 그 원인으로 생각되는 검을 맡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놀람도 잠시,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는 얼굴에는 완벽하게 의문은 사라지고 믿음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 한빈이 시킨 일 중에 아군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던 일들도, 지나고 나면 그때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화는 고개를 돌려 청화를 바라봤다.
청화의 표정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청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다.
한빈이 빠져나간 방에서 설화와 청화는 다시 자신들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소군.
소군은 살짝 어깨를 떨고 있었다.
소군은 전음이라고 한 말이 가장 두려웠다.
귀곡성이 진짜 전음이라고 한다면,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군은 이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한빈 일행이 자신을 구해 줬던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 시체 더미에서 나오면서 목격했던 당시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 토막이 난 시체.
주변을 가득 채운 핏물.
많은 무사가 한 번에 죽어 나갔다는 것은, 대적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는 증거였다.
죽어 나간 자는 분명히 신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신교인들은 자신을 지키다가 그 꼴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신교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껴 탈출한 것은 떠올랐지만,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뒤 상황을 맞춰 본다면, 그 시체들은 자신의 수하가 분명했고 전음을 보내오는 이는 수하들을 죽인 절대자가 분명했다.
의문은 의문을 낳는 법이었다.
기억의 편린들은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소군의 눈이 감겨 왔다.
더는 귀곡성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상서로운 기운이 품속으로 스며든다.
마치 누군가 자장가를 불러 주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잠에 빠져든 소군의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분명 잔도의 한가운데였다.
풍경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수많은 무사와 마주하고 있는 조그만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꿈이라는 것을 아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떨려 왔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무사들은 아이의 목을 베기 위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다.
아이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포위망이 좁혀졌을 때.
갑자기 붉은 기운이 무사들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은 무사들은 썰고 지나갔다.
말로만 듣던 이기어검과도 같았다.
붉은 기운은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다시 달려드는 무사들.
붉은 기운은 달려드는 무사들마저 토막을 냈다.
순간 붉은 기운이 사라지자, 아이가 쓰러졌다.
반 토막 난 무사들의 시체가 아이를 덮는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소군은 비명을 토해 냈다.
‘악!’
하지만 꿈속에서 깨어나지는 못했다.
이것은 소군이 잃어버렸던 기억 중 일부가 분명했다.
소군은 이 기억이 왜 돌아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보름달이 뜨던 때 기억이 조금 돌아왔고…….
순간 소군은 자신이 검 두 자루를 안고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검에서 나온 기운이 자신의 기억을 돌려놓은 것 같았다.
소군이 본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시간이 정지된 듯 꿈은 멈췄다.
끔찍한 광경이 정지된 채 눈앞에 떠 있자, 소군은 꿈에서 깨려 발버둥 쳤다.
그때였다.
“밥 먹어야지, 소군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덕분에 소군을 깰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군의 상의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재빨리 수건을 건넸다.
“괜찮은 거야? 또 악몽을 꾼 거야?”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혹시 이 검을 맡는 게 부담스러우면 공자님께 말씀드려 볼까?”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소군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설화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소군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일어나자.”
“언니, 고마워요.”
소군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식당으로 향하자, 소군은 두 자루의 검을 소중하게 품에 안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제 찾은 기억은 소군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을 지켜 주려다가 죽었다고 생각한 무사들은 사실 자신이 죽인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노리던 자객이었다는 것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이 검의 힘을 빌리면 자신의 기억을 온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당으로 간 한빈 일행은 아침을 먹기 위해 탁자에 앉았다.
한빈 일행은 검을 들고 있는 소군 때문에 일부러 구석 쪽으로 갔다.
외부 손님이 검을 들고 오는 일은 있어도 아침부터 검을 들고 식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조그만 소군이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은 뭔가 어색해 보였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은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따라 주변이 어수선해 보였는데, 어디선가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대충 들어 보면 어떤 손님이 점소이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빈이 구석에 앉은 관계로 그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빈은 점소이와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은 화가 난 듯 점소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그들의 대화였다.
“이보게, 방을 바꿔 주게.”
“자꾸 막무가내로 방을 바꿔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별채 쪽은 꽉 찼습니다. 별채가 아닌 평범한 방으로 바꿔 달라고 하시면…….”
“비싼 돈을 주고 별채를 빌렸으면 당연히 같은 곳으로 바꿔 줘야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그러니까요. 다른 별채는 손님이 꽉 찼다고 설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자네, 내가 누군지 모르나?”
“…….”
“그러면 다른 손님하고 우리 방을 바꿔 주면 되지 않나?”
“그 손님들의 사정도 있는데 자꾸 그러시면…….”
“그러면 나보고 귀신 나오는 방에서 잠을 자라고?”
손님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자, 점소이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럼 내가 직접 그 손님한테 가서 방을 바꿔 달라고 할 터이니 안내하게. 아니, 내가 식사를 마친 후 그쪽 별채로 가도록 하지.”
사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점소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한빈 일행은 서로를 바라봐야 했다.
설화도 듣고 청화도 들었던 것 같았다.
가장 눈을 빛내는 것은 역시 소군이었다.
소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었나 봐요. 저 아저씨들도 귀신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아, 다행이다. 휴.”
소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사쌍검이 귀곡성을 막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소군이었다.
하지만 그 전음의 정체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거 꺼림칙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온 자객이라면 언제 당할지 모르는 상태.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귀곡성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귀곡성의 정체가 적의 전음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일단은 목이 달아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청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목소리, 왠지 귀에 익은데요.”
“오호, 청화가 귀가 밝아졌네.”
칭찬 한마디를 건넨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청화가 재빨리 한빈을 불렀다.
“공자님, 밥 안 먹고 어디 가세요?”
“잠시만, 저 손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오게.”
“그럼 다녀오세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이는 청화.
나머지 인원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를 바라봤다.
한빈이 향한 곳은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토해 낸 손님이 있는 쪽이었다.
한빈은 모퉁이를 돌아 그들 손님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간밤에 피곤한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빈은 그들의 앞에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말씀 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누군지 알고 식사 자리에 감히…….”
상대는 고개를 들고 불만을 토해 내다가 멈췄다.
사내뿐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동작을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들은 숨도 쉬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혹시 양 유생님 아닙니까? 안휘 쪽에서 유명하다는 양 유생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상대는 전날 만났던 양석봉 일행이었다.
이 객잔의 별채를 쓰고 있던 것이 아마도 양석봉 일행인 듯싶었다.
한빈의 질문에 양석봉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한빈과의 계약이었다.
덧붙여진 부속 계약서에는 분명히 서로 알은척을 하지 말자는 조항이 있었다.
양석봉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뉘신지요?”
“저는 하북에서 온 유생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오, 팽 공자셨구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간밤에 귀신을 봤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는지요.”
한빈의 질문에 다른 사내들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을 물 먹여 놓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모른 체하는 상대의 모습에 표정 관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때 양석봉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본 게 아니라 들은 겁니다.”
“들었다면…….”
“귀신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오호.”
한빈이 눈을 빛내며 나머지 설명을 마저 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러니까…….”
양석봉의 대답은 간단했다.
양석봉의 숙소에 모여서 유생들과 한잔하는데, 귀곡성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 시각은 소군이 귀곡성을 들었던 시각과 일치했다.
양석봉에게 답을 들은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우리 계약은 유림 서원으로 들어가면 바로 시작되는 거 잘 기억하시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빈은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양석봉과 대화해 보니 귀곡성의 정체를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