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노예는 노예를 낳는 법 (4)
환하게 웃으며 손을 펄럭이는 한빈의 모습은 분명히 아군이었다.
마치 집 나갔던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돌아오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양석봉은 가출했던 희망이 잠시 돌아왔다.
이름도 없는 유학자의 가문이 자신의 가문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리 화해를 요청해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벌을 먼저 내려야 할까?
아니면 상을 내려야 할까?
고민은 필요 없었다. 일단은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양석봉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내미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서찰은 정갈하게 접혀 있어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흠, 일단 읽어 보지.”
“네, 읽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곳에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값싼 깨달음은 아닐 겁니다. 분명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더 신중히 읽어 보겠네. 그런데 이건 화해의 뜻인가?”
“어찌 보면 그렇지요.”
살짝 포권하며 눈웃음을 짓고 나가는 상대.
그 모습에 양석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 맞았다.
양석봉은 상대의 모습이 사라지자 주변을 쓱 살폈다.
유생들이 목을 길게 빼고 양석봉이 받은 서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유생이 다급하게 물었다.
“양 유생님, 그 서찰은 대체 무엇입니까?”
“알아서 꼬랑지를 내린 게 아니겠나?”
“꼬랑지를 내리다니요?”
“사고는 쳤지만, 수습하려고 하다 보니 정신이 돌아온 것이 분명하네.”
“그럼…….”
“이 서찰은 저자가 보내온 백기가 분명하네.”
“얼른 펴 보시지요.”
“일단 다른 곳에서 펴 보는 게 좋겠군. 이곳은 마가 끼었는지 느낌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야겠어.”
양석봉은 검지로 유생 중 몇을 가리켰다.
그들의 얼굴에는 조그마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물론 양석봉의 얼굴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양석봉 하나만이 아니었다.
팔 층에서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던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거기에 계속 추가되는 접시를 보고 나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던 것.
그는 무림인이 말하는 주화입마는 남의 일인 줄 알았다.
유생에게는 주화입마는 일어날 수 없는 일.
하지만 양석봉은 오늘 주화입마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열불이 가슴에서부터 솟아올라 머리를 잠식하자,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그 후는 비슷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몰래 팔 층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숨어서 보던 유생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상대방에게 뜯겨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 정도를 벗어났다.
이건 가문에게 선전포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생각을 하자, 양석봉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상기된 양석봉이 모습에, 다른 유생이 다급히 말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럽시다.”
모두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양석봉도 다급히 표정을 수습하고 답했다.
“다들 내려가시게.”
모두를 내려보낸 양석봉은 전낭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딱!
어찌나 세게 올려놨는지 무인이 내공을 실어 내리쳤는지 착각할 정도였다.
사실 이 동작 하나에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전낭을 올려놓고 나가려는 양석봉을 누군가 불렀다.
“어르신.”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봤던 점소이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양석봉은 사람 좋은 얼굴로 품속에서 은전 두 개를 꺼내 점소이에게 건넸다.
“이거 받게.”
사실 은전까지 건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볼썽사나운 일에 대해서 입을 닫게 하라면 이 정도는 써야 했다.
하지만 점소이의 얼굴을 그대로였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양석봉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다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는 손에 딸려 나오는 은전 몇 개를 그대로 점소이에게 건넸다.
마무리 수습을 하고 돌아서려는 양석봉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소이의 표정이 아직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양석봉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탁자를 내리쳤다.
탕!
얼마나 세게 쳤는지 접시가 부르르 떨었다.
점소이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으리, 음식값은 주고 가셔야죠.”
“음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양석봉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나으리께서 팔 층에서 드신 음식값까지 내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건 그분들이 팔 층에서만 음식을 드신 게 아닙니다.”
“팔 층에서만 처먹은 게…….”
그때였다.
점소이의 뒤에 황금색 면사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을 본 양석봉은 말을 급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은 만향각의 각주인 금 소저가 분명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천하절색이라 알려진 만향각의 각주였다.
만향각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구천구백구십구 가지의 향기.
마지막 하나의 향기가 금 소저가 내뿜는 향기라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향기를 맡아 본 사람은 없었다.
“그, 금 소저.”
양석봉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른 채 상대를 바라봤다.
면사 속 입꼬리가 살짝 출렁이더니 은 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구 층까지 가셨습지요.”
양석봉은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양석봉이 금 소저라 부른 사람은 금미랑이었다.
금미랑은 이곳에서는 금 소저라 불리고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감춘 채 이곳 군자현의 하오문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금미랑이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은 다른 지부장들과는 조금 달랐다.
금미랑이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신비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그들이 상상하는 금미랑의 얼굴은 천 가지, 만 가지도 넘었다.
즉, 어떤 얼굴로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상 상황에서는 요긴하게 쓰일 수밖에 없었다.
순진하게 금미랑을 바라보던 양석봉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만향각에 구 층이 있던가?”
“네, 딱 일곱 번 열렸었죠. 이번까지 계산하면 여덟 번째예요.”
“일곱 번이라…….”
“그 전까지는 딱 일곱 가문이었어요.”
“혹시 그 가문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중원에 그 가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인가?”
“구 층을 열면서 가문이 파산했거든요. 참, 구 층을 연 값을 계산하셔야 하니 제 이름 정도는 아셔야겠죠. 저는 금미랑이라고 해요. 호호.”
환하게 웃는 상대의 모습에 양석봉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웃음 한 방에 금미랑의 미모에 대한 상상은 모두 날아갔다.
그때 금미랑이 말했다.
“청구서는 어떻게 할까요? 가문으로 보낼까요? 아니면 공자님이 직접…….”
“내가 직접 하겠소.”
“그럼 계산해 주시지요. 여기요.”
금미랑은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점소이는 그 두루마리를 받더니 펼쳤다.
쫘르륵.
두루마리에 펼쳐지자 양석봉의 눈이 한 단계 더 커졌다.
그곳에는 팔 층과 구 층에서 먹고 간 청구서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 청구서를 본 양석봉은 그 음식값이 왜 그리 비싼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저런 요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천년화리 구이에다가…….”
청구서를 읽어 나가던 양석봉은 문득 팽한빈이라는 서생에게서 받은 서찰을 떠올렸다.
그는 재빨리 서찰을 꺼내 읽어 봤다.
서찰을 펴서 읽어 보던 양석봉의 입이 점점 열렸다.
이것은 화해를 요청하는 서찰이 아닌, 또 하나의 계약서였다.
이 계약에 서명하면 만향각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서명할 수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서명했다가 그렇게 당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추가 계약서의 내용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계약의 내용은 비밀로 하자고 했다.
거기에 더해 팽한빈이라는 자는 오늘 여기에서 있었던 일도 모두 묻자고 했다.
이것은 양석봉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서로만 알고 외부로 밝히지 말자는 것이 앞쪽의 내용이었다.
입꼬리 살짝 올리려던 양석봉은 다음 내용을 읽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에 금미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빈 일행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한빈이 묵고 있는 숙소는 군자현에서도 가장 큰 객잔이었다.
사실 군자현은 과거 시험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과거가 치러지는 시기에, 이곳에는 수백 수천이 아닌 수만 명의 유생이 들이닥치곤 한다.
덕분에 군자현에 있는 객잔들은 그때를 대비해서 만들어졌다.
그럼 평소에는 어떻게 관리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군자현은 지, 필, 묵, 서책 등으로 유명해서 평소에는 그만큼의 유동 인구가 상인들로 채워지는 편이었디.
한빈이 있는 곳은 네 개의 별채가 하나의 마당을 쓰고 있었다.
별채에 들어선 한빈은 주변을 쓱 둘러봤다.
그들은 이곳 군자현의 특징처럼 대체로 유생들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바라보자 유생들이 자신의 방으로 다급히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빈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공자님.”
“내 시선을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
“에이, 오해겠죠. 공자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데 피해요. 그렇지, 소군아?”
설화는 소군을 바라봤다.
멍하니 있던 소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한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바로 만향각의 칠 층에서 마주친 유생들이었다.
모두가 다 모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빈에게 험한 꼴을 당한 유생들이 분명했다.
그때 청화가 소군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눈을 찡끗하며 속삭였다.
“나도 여기서 배운 건데, 강호에서는 때린 사람이 발 뻗고 자는 법이래.”
“그거 반대 아닌가요?”
소군이 고개를 갸웃하자 청화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토 달지 말고 외워. 받아 적으면 더 좋고.”
“아, 알았어요.”
소군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군은 오늘 일로 이들은 정파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 * *
소군과 설화, 청화가 있는 방에는 세 개의 침상이 있었다.
침상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셋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가장 구석진 곳에는 소군이 누워 있었다.
구석이 가장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에 설화가 배려한 것이었다.
침상에 누운 소군을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을 배경으로,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다시 되짚어 보니 한빈과 설화, 그리고 청화의 행동은 묘하게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늘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오늘 먹은 요리는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절대 맛볼 수 없는 요리였다.
오늘 먹은 요리까지 하나하나 떠올리자, 소군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웅.
흐흐.
소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감겨 오던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