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73화 (473/621)
  • 473. 노예는 노예를 낳는 법 (3)

    한빈의 말에 설화가 놀란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학칙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겠지.”

    “그럼 혹시…….”

    “내가 어떻게 유림 서원의 학칙을 알고 있겠어. 속은 놈들이 바보지.”

    “아, 이것도 적어 놔야겠네요. 아무리 배워도 저는 모자란 것 같아요.”

    설화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청화도 옆에서 한빈의 말을 열심히 적고 있다.

    그때였다.

    계단 쪽에서 뭔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그 소리에 설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을 바라봤다.

    “공자님, 일단 저쪽을 살피고 올게요.”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별일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음, 누군가 굴러떨어진 것 같아서요.”

    “소리로 봐서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뭐, 우리만 아니면 됐지.”

    “그것도 맞는 말씀이네요.”

    말을 마친 설화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청화는 차도 마시지 않고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다만 새로 합류한 소군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설화의 옆에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소군은 소름이 쫙 돋았다.

    처음에는 그리 많은 지필묵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왜 밥을 먹는데 가지고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지금의 결과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어 냈다.

    “정말 치밀…….”

    소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재빨리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설화가 반응했다.

    “소군이가 이제 업무의 본질을 이해하는구나.”

    “네?”

    “우리가 하는 일이 허술해 보여도…….”

    “허술해 보이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네. 나나 청화도 다 계획을 세우면서 움직이거든. 우린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모든 상점을 다 확인했어.”

    설화의 말에 소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

    하지만 설화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든 상점에 점수를 매기는 건 기본이지.”

    “아, 점수요.”

    소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일행의 비밀이 지금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 모습에 설화가 만족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점수. 나 같은 경우에는 어떤 마을에 도착하면 당과 파는 가게의 점수를 일부터 십까지 나눠서 먹이거든.”

    “당과요?”

    “그럼, 당연하지. 여기 청화 같은 경우는 떡집부터 찾아서 점수를 먹여.”

    설화가 고개를 돌리자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기껏 먹는 이야기였다니!

    그때 설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자님이 그러셨거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헤헤.”

    설화가 해맑게 웃자 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

    너무 현실적인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 와닿는 말이기도 했다.

    왜 그 말이 와닿는지는 모르겠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점소이가 접시를 내어 왔다.

    그는 탁자 위에 접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탁. 탁.

    접시는 은빛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덕분에 접시 위에 어떤 요리가 담겼는지 알 수 없었다.

    몇 개의 접시를 내려놓은 점소이는 한빈에게 고개를 숙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수고했네.”

    한빈은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 동작에 물러나려던 점소이가 움찔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전낭 속에서 돈을 꺼냈다.

    “자, 말만 수고했다고 하면 서운하지. 여기 받게.”

    “네, 감사합니다요.”

    점소이는 재빨리 한빈이 건네는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손을 펴더니 살짝 실망의 눈빛을 보였다.

    한빈이 건넨 돈은 철전 한 닢이었기 때문이다.

    실망의 눈빛도 잠시, 그의 표정은 바뀌었다.

    그는 머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나으리.”

    그 모습에 소군은 쓴 입맛을 다셨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속담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는 말이었다.

    점소이도 점소이지만, 밑에서 끙끙대고 있을 양석봉이 왠지 불쌍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상대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놓고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물론 낭떠러지로 떨어진 인물이 그리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런 일들이 눈앞에 있는 자들에게는 일상이라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소군은 이런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그때였다.

    설화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토해 냈다.

    “공자님, 야명주 하나 값치고는 너무 초라하지 않나요?”

    “양보다는 질이지.”

    말을 마친 한빈은 접시의 뚜껑을 열었다.

    첫 번째 접시에는 생선구이가 놓여 있었다.

    그 요리를 본 모두는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요리였다.

    군자현에 생선이 귀하긴 하지만, 야명주의 값어치와 맞먹는 요리 중 하나라고 한다면 너무 초라했다.

    그때 한빈이 젓가락을 들었다.

    “천년화리 구이라……. 한 점 먹어 볼까?”

    그 말에 설화와 청화의 눈이 커졌다.

    두 번째 접시에는 백년하수오 무침이 들어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접시도 강호인에게는 영약에 버금가는 음식이 들어 있었다.

    한빈이 내민 야명주보다야 값은 덜 나가겠지만, 이들 음식을 한곳에서 맛보는 값치고는 저렴했다.

    하지만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접시가 바닥을 드러내자 한빈은 점소이를 불러 은밀하게 귓속말을 전했다.

    순간 점소이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돌아갔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뭐라고 하셨는데 표정이 저래요?”

    “사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그냥 같은 거로 한 상 더 내오라고 했어.”

    “헉.”

    설화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막았다.

    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바닥을 보는 것이 아니고 칠 층에 있는 양석봉 일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아마 저들은 이런 자를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건 사파보다 악랄하고 신교도들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이었다.

    지금만큼은 한빈이 진정한 ‘마(魔)’ 자체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이름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소군은 확신했다.

    현 강호에 존재하는 이들 중 마와 가장 가까운 이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성화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진정한 마를 앞에 두고 배우라는 가르침이라 소군은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소군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계약서를 썼는지 기억이 가물거려서였다.

    기억을 떠올리던 소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그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군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가 고파서…….”

    “배가 고프면 안 되지. 공자님, 그냥 주문하는 김에 한 상 더 내오라고 할까요? 제가 다녀올게요.”

    “잠시만 기다려라.”

    “공자님, 왜요?”

    “그냥 주문하는 김에 한 번에 세 개의 상을 준비하라 전해 줘라.”

    “네, 공자님.”

    설화는 활짝 웃으며 점소이에게 달려갔다.

    소군은 그제야 자신이 말 한마디가 칠 층에 있는 양석봉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알아챘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다른 자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신교에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상대의 운명을 결정했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이다.

    소군이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 파악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점소이가 천천히 걸어왔다.

    추가로 주문한 음식은 없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있었다.

    대신 뒤쪽에서 면사를 쓴 여인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점소이가 한빈의 앞에 멈추자 여인은 점소이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면사를 벗었다.

    “귀인을 뵙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설화는 여인을 가리키며 외쳤다.

    “헉, 언니가 여기에 어떻게…….”

    “언니, 언제 오신 거예요?”

    그들의 물음에 여인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저를 닮은 분을 보셨나 보네요. 저는 군자현을 담당하고 있는 금미랑이라고 해요.”

    그 대답에 모두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백미랑 언니와 흑미랑 언니의 쌍둥이세요?”

    “언니들을 만나셨군요?”

    금미랑은 도리어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설화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네, 만났어요. 그런데 세쌍둥이실 줄을 전혀 몰랐네요.”

    “사실 세쌍둥이는 아니에요. 정확한 숫자는 비밀이에요.”

    찡긋 웃는 금미랑의 모습에 설화는 입을 벌렸다.

    금미랑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런데 군자현 하오문 지부의 암어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백 소저에게 들었소.”

    “저는 그 암어를 다 외우신 게 신기해요. 일단 장소를 옮기시죠.”

    금미랑은 그들은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팔 층이 아닌 만향각의 구 층으로 안내한 것이다.

    뒤따라가던 설화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한빈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공자님,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밥도 넘기지 못하는 거 아시죠?”

    “당과는 넘어가던데.”

    “아, 진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암어는 대체 언제 전하신 거예요?”

    “만향각의 문 앞에서 말했는데.”

    “그때요? 언제 말씀하셨어요?”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이 누군가에게 암어를 전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앞서가던 금미랑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군자현 하오문 지부의 수장을 만날 수 있는 암어는 바로 한빈이 만향각의 입구에서 읊었던 긴 설명이었다.

    이곳 하오문의 암어는 군자현이라는 명칭대로 다른 지부의 암어보다 몇십, 아니 몇백 배가 길었다.

    그 암어를 다 전한 이는 한빈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하오문의 귀빈임을 뜻하는 철전까지.

    금미랑이 이곳으로 단걸음에 달려와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 * *

    한 시진 뒤, 칠 층.

    양석봉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이곳에 모인 유생들은 수하를 다급하게 전장에 보냈다.

    덕분에 만족할 만한 자금이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 유생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돈과 권력을 좇아 양석봉에게 붙었다.

    하나 지금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탁자 위에 모인 음식값을 본 양석봉은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돈이 준비됐으니 받아 가게.”

    “아이고, 공자님.”

    “호들갑 떨지 말게. 우리가 이곳을 이용하는 게 한두 번인가? 내기는 내기이니 부담 갖지 말고 넣어 두게. 그리고 그자한테는 우리가 값을 치렀으니 계약 내용은 없던 것으로 하라고 이르게.”

    “그, 그게 아니라…….”

    “허허, 그리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돈을 받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네.”

    “그게 아니라, 그 공자님이 요리를 추가해서 돈이 조금 모자랍니다.”

    “요, 요리를 추가했다고? 대체 얼마나 모자란다는 말인가?”

    “아까 그 야명주로 치면 네 개 값어치의 음식을 드시고 계십니다.”

    “이런 미, 미친. 그렇게나 처…….”

    양석봉은 말을 맺지 못했다.

    언제 왔는지 한빈이 손에 종이 한 장을 펄럭이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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