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노예는 노예를 낳는 법 (2)
순간 여자아이의 기세가 점점 강해졌다.
그 살기가 참살도 우마의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참살도 우마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제길!’
아혈이 제압당한 상태이기에 목소리는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때 여자아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참살도 우마의 눈이 살짝 뒤집혔다.
이건 분근착골의 수법이 맞았다.
근육을 갈가리 찢고 뼈를 떼어 내는 고통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제는 상대가 여자아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아이가 저런 지독한 수법을 쓸 수는 없었다.
상대는 고문의 장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참살도 우마가 알게 된 것은 바로 뒤였다.
* * *
암막 밖의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유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암막으로 들어간 지 꽤 됐는데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참살도 우마가 상대를 너무 거칠게 다룬다고 생각했다.
어떤 유생은 조심스럽게 양석봉을 바라봤다.
양석봉도 참살도 우마의 행동에 대해 못마땅한 듯 암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석봉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사람의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을 끌어도 너무 끌었다.
안쪽에서 상대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암막 비무의 원칙을 알기에 관여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자신이 호위를 불러낸다든가 안으로 들어가서 말리게 되면 이 비무는 패배로 끝난다.
들어가서 말리든가, 자신의 대리 무사를 불러내는 쪽은 패배로 간주한다.
이것이 암막 비무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양석봉은 조용히 상대를 바라봤다.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공자라는 작자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다.
서체는 훌륭하지만, 성품은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암막이 살짝 들리더니 누군가 나왔다.
그는 먼저 들어갔던 참살도 우마였다.
그 뒤를 따라서 소녀가 천천히 나왔다.
그들을 바라보던 유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모습이 들어갈 때와 비교해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온 참살도 우마는 천천히 자신의 주군인 양석봉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오자 양석봉은 흐뭇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됐느냐?”
이렇게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암막 속에서 일어난 비무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직접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의 발언이 이 비무의 유일한 증거였다.
모두는 참살도 우마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승부는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 참살도 우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그래, 잘……. 지금 뭐라 했느냐?”
“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군을 모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참살도 우마는 바로 몸을 돌렸다.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가 봐도 이해하지 못할 승부였기 때문이다.
설화는 한빈에게 다가가 작게 포권했다.
“공자님, 저 이겼어요.”
“많이 다쳤느냐?”
“손 속에 사정을 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둘의 대화는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한빈이 물어본 것은 참살도 우마라 불린 상대의 상태였다.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 참살도 우마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호위 하나가 그에게 달려갔다.
유생을 모시는 호위 중, 참살도 우마가 가장 고수였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갑자기 패했다고 하며 자리를 떠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떠나는 참살도 우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유생들을 호위하고 있는 사파 무인 전체의 문제였다.
유림 서원에 있는 호위 대부분이 강북 사도련의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참살도 우마가 의리 없이 떠나 버린다면 강북 사도련 무인의 전체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호위는 계단을 내려가는 참살도 우마의 소매를 잡았다.
“자네, 이렇게 떠나면 어떻게 하나. 진상이라도 밝히고 가야 하지 않은가?”
“더는 싸우고 싶지 않은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네.”
“자네, 이럴 텐가?”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없네. 휴우.”
한숨을 내쉰 참살도 우마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참살도 우마는 연신 기침을 쏟아 냈다.
호위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는 참살도 우마를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계단을 올라올 뿐이었다.
계단을 올라오던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뭐지?”
그의 손에는 혈흔이 남아 있었다.
이 피가 어디서 묻은 것인지 호위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장막 옆에 있는 탁자에서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칠 층은 유생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군자현의 관리도 있었고 다른 쪽에는 꽤 돈이 있어 보이는 상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강 건너 불구경을 바라보던 양석봉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양석봉의 곁으로 다가왔다.
양석봉의 눈빛이 살짝 출렁였다.
상대의 대리인이 비무에서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양석봉은 아직도 상대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실력을 보여 준 것을 보면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양석봉은 어떻게 승낙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양석봉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살짝 올라가는 상대의 입꼬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선 한빈은 계약서를 펼치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겠습니다, 공자.”
순간 양석봉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것도 잠시, 양석봉은 표정을 수습했다.
“약속을 지키지. 다만 이 계약은 자네들의 밥값을 우리가 못 치렀을 때만 해당하지 않나?”
양석봉은 계약의 핵심 내용을 찔러 들어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기의 시작은 상대의 밥값을 치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한빈은 점소이를 불렀다.
앞에 선 점소이가 멀뚱거리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려줘도 될 것 같네만은.”
“아, 참. 맡겨 놓은 야명주가 있었죠.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이제는 한 점의 의심 없이 깍듯하게 한빈을 대하는 점소이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팔 층으로 안내하지.”
“네, 팔 층이요? 팔 층은 칠 층과는 차원이 다른…….”
“괜찮네. 내가 내는 게 아니니 오늘은 좀 편안히 즐기겠네.”
한빈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양석봉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처음 보인 표정이었다.
그는 달려와서 질책하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계약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칠 층에서 밥값을 계산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와서 팔 층에서 먹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양석봉의 말에 그의 동료 유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양 유생의 말이 맞네. 분명히 칠 층의 식비를 담보로 내기한 것이 아니던가?”
“허허, 자네도 유생이라면 계약 내용을 잘 읽어 보게. 이건 자네가 쓴 계약서가 아니던가?”
어떤 유생은 탁자에 남아 있는 계약서를 들고 항의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팔 조 팔 항에 보시면, 식사 중 혹은 식사 전의 층간 이동에 관한 사항이 나와 있습니다. 이래도 계약 위반인지요?”
한빈의 말에 유생들은 계약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살피던 유생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양석봉은 다급하게 그것을 빼앗아 자신이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이, 이건…….”
그 모습에 한빈이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계약서를 쫘르륵 펼쳤다.
“그래서 계약서는 항상 각자 보관하는 것이죠. 일단 올라가겠습니다.”
한빈은 점소이에게 턱짓했다.
그 모습에 양석봉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만향각의 팔 층은 자신도 가 본 적 없었다.
팔 층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돈과 여기 있는 유생들의 돈을 다 합친다고 해도 값을 치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양석봉은 슬쩍 점소이의 눈치를 봤다.
시선이 마주친 점소이는 한껏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오랜 친구와도 같았다.
사실, 양석봉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군자현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약을 위반하고 도망친다면 그 사실이 안휘까지 퍼질 것은 뻔했다.
양석봉은 조용히 상대가 탁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곳에 그렇게 많이 왔건만 팔 층의 모습은 처음 보는 그였다.
팔 층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탁자는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주변으로 칠 층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탁자를 둘러싼 곳곳에 나무가 심겨 있었고, 여기저기에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가 정원인지 팔 층 전각의 꼭대기인지 모를 정도였다.
거기에 솔솔 풍겨 나오는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줬다.
양석봉은 왜 이곳의 음식이 그리 비싼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양석봉은 문득 상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니 상대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때 양석봉의 머릿속에 계약서가 떠올랐다.
양석봉은 계약서를 꺼내서 서명을 읽어 봤다.
“팽한빈이라…….”
양석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팽한빈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봤다.
유명한 유학자 가문에서 팽씨 성은 없었다.
그때 양석봉의 머릿속에 하북에 있는 무림세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무림세가의 자제가 유림 서원에 올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저런 필체를 가질 수도 없었다.
먹을 갈던 소녀는 또 어떤가?
그녀도 유명한 유학자의 가문 출신임이 분명했다.
순간 양석봉의 마음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
유명한 유학자의 가문이라면 자신과 척을 질 리가 없었다.
아니, 시골의 볼품없는 서원 출신이라고 해도 자신의 가문을 알 터.
그렇다면 적당한 선에서 끝낼 것이 분명했다.
“휴.”
양석봉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도 잠시, 양석봉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헉!”
그것은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는 한빈 일행을 본 직후였다.
* * *
한빈은 기다리는 점소이에게 아주 간단하게 주문을 했다.
하지만 점소이의 눈을 한없이 떨렸다.
“공자님, 지금 하신 말씀이 진심입니까?”
“진심이네.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내어 오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괜찮다고 해도. 저자가 만약에 값을 못 치르면 내가 책임지겠네. 뭐, 이게 있으니 나도 안심할 수 있지.”
한빈은 자신의 품속을 툭툭 쳤다.
그곳에는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점소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은 탁자 위 야명주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한빈의 주문은 그 야명주의 가격에 버금가는 요리를 내오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점소이가 놀란 이유였으며.
몰래 이 광경을 훔쳐보던 양석봉이 거품을 문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설화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궁금한 게 있어요.”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편하게 물어봐.”
“어떻게 유림 서원의 학칙을 다 외우신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까 유림 서원의 학칙을 술술 읊으셨잖아요.”
“아, 그거…….”
“네, 그거요.”
“세상에 학칙을 외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