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 노예는 노예를 낳는 법 (1)
유생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빈을 짐승 보듯이 바라봤다.
유생들은 양석봉의 호위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양석봉의 호위는 강북 사도련의 무인이었다.
즉, 사파란 말이었다.
한번 검을 쓰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다.
유생이 사파를 호위로 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정파나 사파나 모두 똑같은 무인일 뿐이었다.
비슷한 돈을 지불하고 자신을 더 잘 지켜 준다면 그것이 최고였다.
거기에 정파에 비해 사파의 행동은 시원시원했다.
정파 무인을 호위로 둔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조금 사적인 일을 시키려 들면 대의명분에서 벗어난다면서 손을 젓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사파는 달랐다.
조금만 신경 써 주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유생들은 다시 양석봉의 호위를 바라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기를 느꼈는지 살짝 어깨를 떠는 무인들도 있었다.
사파 주에서도 가장 악랄하다고 평가받는 것이 양석봉의 호위였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생 중 하나가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내기는 성립되었다! 이 내기에 대한 증인은 황제 폐하요. 폐하를 대신해서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지금부터 비무를 시작한다.”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호위가 탁자를 높이 쌓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각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호위는 사각의 공간에 암막을 덧씌웠다.
그 안에서 누가 죽는다고 해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밀실이 만향각의 칠 층에 만들어졌다.
양석봉의 호위는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한빈이 턱짓하자 설화가 앞으로 나갔다.
설화를 본 양석봉의 호위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
설화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보던 소군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얼굴을 감싸 쥔 소군의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소군아, 왜 그래?”
“제, 제가 말했을 때도 저런 느낌이었나요? 왠지 창피해서요.”
소군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손가락 사이로 소군의 볼이 살짝 보였다.
그 볼은 잘 익은 홍시처럼 벌게져 있었다.
소군은 진심으로 창피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군은 얼핏 설화의 무공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설화와 상대의 무공은 천양지차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강호 속담과도 일맥상통했다.
자신의 외침이 저리 들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이 꼬이는 소군이었다.
주변의 소란에도 설화와 양석봉의 호위는 서로를 바라봤다.
앞으로 나온 호위는 얼굴만으로도 상대를 기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설화가 아무 대답이 없자 호위는 자신의 외모를 보고 상대가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먹을 갈던 아이였다.
그 동작의 정갈함은 분명 어릴 적부터 다져 온 솜씨였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무공을 알겠는가?
호위는 살짝 내공을 실어 말했다.
“아이야, 다시 한번 묻겠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제가 어떻게 알아요?”
“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강북 사파의 백대고수에 속하는 참살도 우마라 한다.”
사실 조금 과장된 측면은 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강북 사파의 이백대 고수에는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백대고수가 별거 있겠는가?
앞에서 버티고 있는 놈들이 다 뒈지면, 자신이 백대 고수에 드는 것이 아니던가?
“……음, 처음 들어 보는데요.”
하지만 상대의 말에 참살도 우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가 활동하던 곳은 험하기로 감숙이었다. 이곳과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모를 수도 있지. 너같이 강호를 모르는 아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고 말이다. 내 여기서 기회를 주마. 그냥 졌다고 인정하면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마.”
말을 마친 참살도 우마는 자신의 박도를 만졌다.
사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유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성향에 맞춰 행동한 것뿐이었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면, 저 정도로 반반한 계집을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다는 것이 우마의 속마음이었다.
사파처럼 행동하는 것은 남들이 없을 때에 한했다.
지금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정파의 가면 하나 정도는 쓰고 있어야 돈이 된다는 것을 우마는 알았다.
우마는 슬쩍 양석봉을 바라봤다.
자신에 행동에 대한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우마는 양석봉의 대답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양석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려 하는 자의 식구였다.
굳이 피를 보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냥 주종 관계를 확인받으면 만족했다.
사실 양석봉이 아이의 먹을 가는 솜씨를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대의 서예 솜씨를 보지 않았다면?
양석봉은 상대를 사람 취급도 안 했을 것이었다.
자신의 밑으로 기어들어 온다고 해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자신의 발밑에서 어울릴 수 있는 품격과 학식을 갖춘 자만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양석봉은 주변을 바라봤다.
친구라 하지만, 정확히는 주종 관계로 얽힌 이들이었다.
언제든 자신의 명에 따라 죽는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유생들이었다.
상대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다면 적어도 저들 중 중간 자리를 주리라 양석봉은 결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동생인지 시녀인지는 몰라도 주종 관계가 성립되면 자신의 옆에서 먹을 갈게 할 심산이었다.
양석봉의 시선에 참살도 우마가 작게 포권했다.
“나의 주군도 허락하셨다.”
“그냥 일단 들어가서 싸워요. 참살도 아저씨.”
“그래,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했느냐?”
“일단 싸우자고요.”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우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화가 끊었다.
“일단 싸워야 관도 짜고 수의도 입히고 그럴 거 아니에요. 일단 싸워요.”
“클클, 네년이 진정…….”
우마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에 있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끝을 흐렸다.
그때 성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관 걱정부터 하지 말고요.”
“허, 내 너를 어여삐 여겨 기회를 주려 하거늘, 복을 차 버리는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마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암막 비무는 서로의 체면을 세워 줄 수도 했지만, 반대로 암막 비무를 할 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즉,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당사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마는 안에서의 일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유생 하나가 암막을 가리키며 외쳤다.
“일단 시작하시오!”
그 말에 우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설화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둘이 암막으로 가려진 공간으로 들어가자 모두는 숨을 죽였다.
그때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다른 유생의 호위 중 하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 혹시 들었나?”
그의 말은 호위들만 알아들을 정도로 작았다.
그의 말에 다른 호위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뭘 말인가?”
“이상하게 먹을 갈던 저 아이의 발소리가 안 들려서 그런다네.”
“그게 무슨 말인가?”
다른 호위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는 말을 이었다.
“참살도 우마가 들어갈 때는 내공이라도 실은 것처럼 쿵쿵 울리지 않았나?”
“그런데?”
“뒤따라 들어간 아이의 발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어.”
“자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저 나이에 초상비(草上飛)도 아니고 어찌 소리가 안 들리겠는가?”
“하긴,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때 다른 호위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 호위 귀는 우리 중에서도 제일 밝지 않은가? 이십여 장 밖의 모깃소리도 듣는 것이 장 호위인데…….”
그 호위는 바로 목소리를 줄였다.
그들의 주인이 눈을 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막 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만이 안쪽의 승부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호위들이 떠드니 경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귀 밝은 호위의 의문은 깊은 침묵 속에 묻혔다.
* * *
암막이 쳐진 공간으로 따라 들어간 설화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 모습에 참살도 우마는 코웃음을 쳤다.
“계집.”
작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고개를 돌린 설화가 말했다.
“정정당당하게 셋을 세면 시작하기로 해요.”
“그러자꾸나. 아니, 네게 삼 초를 양보하마. 아니지, 내 삼 초를 피하면 네가 이긴 것으로 하지.”
“그냥 공평하게 해요.”
“그래. 그럼 내가 숫자를 세지. 하나!”
참살도 우마는 숫자를 세는 동시에 박도를 움켜쥐었다.
사파인에게 이런 규칙 따위는 무의미했다.
게다가 셋을 셀 때까지 기다릴 여유 따위는 참살도란 별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둘을 세면 상대의 혈도를 제압하고 마음껏 여자아이를 짓밟을 것이었다.
참살도 우마는 이제 둘을 세려고 했다.
‘헉!’
그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 둘이라고 숫자를 셌던 것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그때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그 소리와 더불어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털썩!
참살도 우마의 몸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이것은 분명 마혈을 제압당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혈과 마혈을 차례대로 제압당한 것은 맞지만, 상대의 동작을 볼 수 없었다.
참살도 우마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산공독이었다.
하지만 산공독이라고 하기에는 단전에서 느껴지는 내공이 제법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거기에 왜 셋도 세지 않았는데 공격을 한 것일까?
참살도 우마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참살도 우마가 볼 수 있는 것은 어이없게도 만향각 칠 층의 바닥뿐이었다.
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너무 빨리 끝났네요. 제가 아저씨의 경지를 너무 높게 봤나 봐요. 그렇다고 다시 풀어 주고 싸울 수도 없고…….”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암막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퍽.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복부에 통증이 밀려 들어왔다.
동시에 몸이 뒤집혔다.
이제 천장을 보게 된 참살도 우마의 얼굴을 아이가 내려다봤다.
“아, 답답하네. 일단 시간을 좀 끌어야 하는데,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 줄게요. 우리 공자님이 그러는데, 사파는 꼭 둘에서 공격한대요. 그래서 제가 선수를 친 것뿐이에요. 어차피 아저씨도 셋에서 공격할 마음은 없었잖아요.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떻게 항복을 받아 내야 하는지 그게 중요한 건데…….”
아이는 턱에 손을 받치고 생각에 잠겼다.
참살도 우마는 우연히 아이의 눈빛을 바라봤다.
순간 그는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본성을 드러낸 아이는 눈빛에 진한 혈향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아수라의 눈빛과도 같았다.
참살도 우마는 이 암막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