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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70화 (470/621)

470. 내가 누군지 알아? (4)

유생 간의 대결이 불허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 그들은 군자현에까지 그 학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시선에 양석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지. 다만!”

말을 단호하게 끊는 양석봉의 모습에, 한빈은 웃으며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수하들끼리 무엇을 겨룰지는 내가 정하도록 하지.”

“네, 그러시지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한빈의 모습에 양석봉은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상대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상대는 사과의 의미로 이곳의 음식값을 모두 부담하려는 것이다.

행색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신과 친구들을 알아보고 고개를 조아리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양석봉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 결과 이런 무리한 제안을 하는 것이고 말이다.

양석봉은 그 성의를 받아 주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이곳의 비용을 치를 능력이 있느냐였다.

“먼저 한 가지를 확인하지.”

“말씀하시지요.”

“여기 음식값을 치를 능력이 되는가? 만약 자네가 여기서 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치면 내 명성이 땅에 떨어질 것이 아닌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빈은 씩 웃으며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야명주 하나가 빛을 내고 있었다.

크기는 작지만 누가 봐도 최상급의 품질이었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점소이에게 걸어갔다.

다가오는 한빈을 본 점소이는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묘한 싸움에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이건 몇 달 치 삯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목이 오락가락할 상황까지 일이 번진 느낌이었다.

점소이가 당황하고 있을 때 한빈이 손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 주게.”

“네?”

“이 물건의 가치를 봐 주게. 오늘 밥값으로는 충분한지 봐 달라는 말이지.”

“헉!”

“왜, 모자라면 하나 더 꺼내고.”

“아닙니다요. 이 정도면 만향각 칠 층을 달포간 빌리셔도 될 돈입니다.”

“그럼 이건 자네가 잠시 맡아 두도록 하게.”

“이걸 왜 제가 맡아야…….”

“내가 지면 자네는 이것으로 저 손님들의 밥값을 내면 된다네.”

“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뭐 내가 이기면 그때는 돌려주면 되니 그리 부담 가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한빈은 점소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후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는군요. 그럼 저도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뭔지 말해 보게.”

“저는 야명주로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공자님은 무엇으로 증명하실는지요?”

“자네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네, 모릅니다. 꼭 제 막냇동생이 하는 말과 똑같군요.”

한빈은 고개를 돌려 소군을 바라봤다.

한빈의 시선에 소군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동생이라 칭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양석봉은 그 나름대로 자신과 시녀를 비교하는 말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기분이 상한 양석봉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허, 농이 과하군. 게다가 시녀보고 동생이라고? 신분에 귀천이 분명 존재하거늘.”

“저를 돕긴 하나 그들을 시녀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저와 계약으로 이어진 동생들입니다.”

순간 설화와 청화가 서로를 바라봤다.

계약으로 이어졌다는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동생이란 단어만이 그들의 귀에 박혔다.

소군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억도 온전치 않은 지금 믿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동생이라 칭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가슴에 암기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야명주와 맞먹는 돈이 지금 있으신지요?”

“험.”

양석봉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동시에 주위의 유생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유생들은 자신의 전낭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휙휙 돌린다.

전낭을 살펴본 양석봉의 눈썹이 눈에 띌 정도로 꿈틀했다.

상대가 내민 야명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뿐 아니라 상대의 밥값을 걱정할 돈은 아니었다.

“이거면 되겠나?”

“저희가 많이 먹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먹어 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그러나?”

“보기보다 저희가 조금 양이 많습니다.”

“허허.”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어떻게 말인가?”

양석봉의 말에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뒤쪽에 있던 설화가 보따리를 들고 쏜살처럼 뛰어나갔다.

설화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보따리를 그들이 있는 탁자 위에 펼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간다는 것은 공부의 기본이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지만, 유생들은 설화를 말리지 않았다.

안하무인이던 양석봉마저 팔짱을 끼고 설화가 먹을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유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난데없는 상황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설화의 모습이었다.

어떤 유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먹을 가는 것을 보니 동작이 잘 정돈되어 있군. 우리가 시녀라고 한 것은 사과하지.”

“흠, 나도 인정 안 할 수가 없군. 저런 동작은 십수 년은 꾸준히 먹을 갈아야 나오는 동작이지.”

“맞네. 우리가 외모만 보고 섣불리 판단한 듯싶네.”

“쉿, 먹을 가는 데 방해되네. 일단 구경부터 하세.”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설화는 귀를 막은 듯 평온한 표정으로 먹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설화는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표정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었다.

설화는 먹을 가는 행위에 대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먹을 가는 것은 계약의 시작이라 한빈은 늘 말하곤 했었다.

설화는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계약은 곧 상대에게 빨대를 꽂는 행동이었다.

계약에 앞서 의관을 단정히 하고 표정을 감춰야 했다.

야생에서 맹수가 먹이를 쫓으며 먼저 포효를 하던가?

아니면, 매가 쥐를 낚아챌 때 미리 날갯짓하던가?

모든 맹수는 적의 목에 이빨을 꽂아 넣을 때까지 본색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설화가 한빈에게 배운 덕목 중 하나였다.

설화는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찬사를 받다니!

설화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설화는 비슷한 힘과 비슷한 속도로 천천히 먹을 갈다가 동작을 멈췄다.

“공자님, 다 됐어요.”

“수고했다, 설화야.”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는 커다란 탁자 위에 종이를 활짝 펼쳤다.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치듯 시원하게 탁자 위에 깔린 한지.

한빈은 조용히 세필을 꺼내 들었다.

‘전광석화.’

검술이나 서예나 끝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로 통하는 법이었다.

만류귀종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였다.

휙, 휙.

한빈의 붓이 날듯이 한지 위를 누볐다.

아마 넓은 광장에서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친다면 이렇게 시원한 글씨체가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

한빈의 붓은 경공술을 펼치듯 한지 위를 누볐다.

순간 유생들은 다시 탄성을 토해 냈다.

“허허. 서체는 모르겠지만, 저 서체를 보게. 분명히 명문가의 자제가 분명하네.”

“그렇다면 우리가 실수를 한 게지.”

“흠, 나중에 사과라도 해야 할 듯싶네.”

그들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오죽하면 양석봉마저 한빈의 속도에 감탄했다.

양석봉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라면 저리 붓을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

양석봉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대를 인정하자 속에서는 불길이 솟아올랐다.

자신은 안휘를 넘어 중원 전체의 천재라 소문이 난 유생이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빨리 쓰는 자가 있다니.

심지어는 그 서체 또한 정갈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탄도 잠시, 양석봉은 이번 기회에 상대를 철저히 눌러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힐끔 자신의 호위를 바라봤다.

양석봉의 호위가 누구던가?

그의 아비가 안휘의 천재라 소문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중원의 검객 중에 추리고 또 추려 최후에 결정한 일인이었다.

양석봉은 미안한 표정으로 한빈의 붓 끝을 바라봤다.

그때 마침 한빈의 붓 끝이 멈췄다.

탁.

한빈의 글을 본 모든 유생은 눈을 크게 떴다.

다 써 놓고 보니 가로와 세로에 자를 대고 선을 그은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것이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한지를 쓱 내밀었다.

“이 정도의 약속이면 만족하실는지요.”

“흠.”

양석봉은 살짝 침음을 삼켰다.

장문에 비해 내용은 간단했다.

요약하면 진 쪽은 승자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물론 값을 치르게 되면 노예가 될 일은 없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노예라고 써 놓지는 않았지만, 모든 조항이 뜻하는 것은 노예였다.

어떻게 하면 노예를 효율적으로 부를 수 있는가가 조항별로 표시되어 있었다.

양석봉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보며 표정을 수습했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기뻐서였다.

본인이 원하면 승부와 관계없이 주종 관계를 맺는다는 조항을 보면 상대의 뜻은 확고했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고 알아서 기어들어 오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점소이에게 보여 준 야명주도 자신을 향해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어쩌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었다.

한나라의 재상이 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잘만 하면 이인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한빈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사삭.

“저는 서명했습니다. 동의하신다면 서명하시죠.”

“좋네.”

양석봉도 팔을 걷어붙이고 붓을 들었다.

슥슥.

서명한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재능의 종류는 내가 정한다고 했었지.”

“그러시지요.”

“나는 비무로 하겠네.”

“비무라면?”

“아무 규칙이 없는 비무를 원하네. 그러니 자네의 밑에 있는 시녀, 아니 동생 중 하나를 내보내게.”

“흠, 그런 비무라면 생사결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나?”

양석봉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지금 데려온 호위를 보니 전부 한가락 하는 사내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기를 무르자는 이야기인가?”

“저는 동생이 험한 꼴을 당하는 건 못 봅니다. 비무를 하더라도 암막 비무로 진행하시죠.”

“암막 비무라…….”

“이곳에 장막을 치고 둘이 싸운다면 승낙하겠습니다.”

암막 비무란 한빈의 말대로 주변에 장막을 친 후 둘만이 마주 본 상태에서 진행하는 대결이었다.

암막 비무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체면을 중시하는 강호의 문파들은 상대에게 패배하면 목숨을 끊을 때도 있었다.

아니면 반대도 승부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복수를 계획하고 말이다.

암막 속에서 벌어지는 결투에 대해 소리를 듣고 판단할 수는 있어도, 정확하게 누가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암막 비무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였다.

당신에게는 이길 수 없으니 체면만은 세워 달라는 숨겨진 뜻이 있었다.

양석봉은 당연히 후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그렇게까지…….”

양석봉은 뒷말을 삼켰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고 싶냐는 말을 생략한 것이다.

양석봉이 보기에는 동생을 희생해서 굴복하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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