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내가 누군지 알아? (2)
설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고 청화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빈은 설화와 청화를 번갈아 보다가 시선을 소군에게 옮겼다.
한빈은 설화와 청화의 표정이 왜 그러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여장을 한 소군의 모습은 천상 여자아이였다.
올망졸망한 눈 코 입과 얼굴의 윤곽은 사내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변장!
한빈은 설화와 청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수고했다. 너희의 변장 실력이 정말 발전했구나. 가만 보자, 이 정도로 변장하려면 부분적으로라도 가피(假皮)를 사용했을 듯도 한데…….”
한빈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말한 가피는 동물의 가죽을 얇게 가공해서 피부 위에 붙이는 변장의 도구였다.
인피면구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데 비해, 가피는 부분적으로 입체감을 줄 때 사용된다.
한빈은 뚫어지라 소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너희의 실력은 정말 완벽하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피의 흔적이 안 보여.”
“…….”
하지만 설화와 청화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칭찬을 받으면 기뻐서 날뛰는 것이 설화였다.
뭐, 소군이 저렇게 삐져 있는 것은 당연했다.
사내놈에게 여장을 시켰으니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빈은 기분 좋은 듯 설화와 청화를 쓰다듬었다.
순간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반응이 없다고?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다시 소군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유림 서원에서 들킬 염려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이 정도의 변장이라면 누구도 소군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빈의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한빈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소군의 볼을 잡았다.
소군이 귀엽기 때문에 잡은 것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이 변장의 견고함을 확인해야 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여자아이의 티가 나네. 이 정도면 백 점을 주마.”
순간 소군의 눈썹이 꿈틀댔다.
소군은 못 참겠다는 듯 한껏 표정을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소군은 참지 못하고 마령지체가 담고 있는 마기를 실어 사자후를 내질렀다.
순간 소군의 눈이 커졌다.
우선 이성을 잃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놀랐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기가 전혀 응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보름달이 떴을 때 모아 놓은 마기마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마기를 잃었는데도 기억은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기억은 아니지만, 며칠 전 찾은 기억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소군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누군데?”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소군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는 후퇴가 최고였다.
소군은 상대의 정체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설화와 청화라는 두 시녀는 상대를 ‘공자님’이라고 부르기만 했지,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괜히 물어봤다고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 오면 자신만 곤란했다.
소군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설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공자님, 우리가 변장을 잘한 게 아니에요.”
“이 정도면 만점인데, 잘한 게 아니라니? 너무 겸손을 떨어도 좋아 보이지 않는 법이지.”
“그게 아니라, 소군이는 원래 여자아이예요.”
“뭐? 그러니까…….”
한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황한 한빈의 모습에 청화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화 언니 말이 맞아요. 소군이는 원래 여자아이예요. 저희가 착각한 거예요.”
“꾀죄죄한 모습에 그렇게 피까지 흠뻑 뒤집어쓴 데다 짧은 머리까지……. 솔직히 착각 안 할 수가 없죠.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설화는 소군을 가리켰다.
소군은 죄인처럼 시선을 피하고 있다.
그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잘됐네.”
“네?”
설화가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여자아이로 변장시켜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원래 여자아이라면 잘됐잖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어.”
“아, 공자님, 이건 스스로 도운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렇다고 치고, 우리는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한빈이 밖을 가리켰다.
순간 설화의 눈이 빛났다.
“제가 이곳에서 당과를 제일 맛있게 만든다는 곳을 알아 놨거든요.”
“그래.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화가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저도 봐 둔 떡집이 있어요. 공자님.”
“그래, 알았다. 소군이는?”
한빈은 소군을 바라봤다.
하지만 소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
멍하니 있는 소군을 본 한빈이 말했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일단 다 먹어 보면 되지, 뭘 그리 고민해.”
“그, 그것도 그러네요.”
소군이 마지못해 답했다.
하지만 소군의 눈빛에는 의문이 한가득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들통난 후에 일행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다.
보통은 꼬치꼬치 사연이라든가 출신을 캐물어야 정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뭘 먹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설화와 청화라고 불리는 시녀들도 이상했다.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안 후에도 놀라지 않고 묵묵히 치장을 해 줬다.
물론 나와서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그 전까지는 놀란 티도 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보통 일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묻혀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소군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빈은 그런 소군을 조용히 바라봤다.
소군의 마기는 한빈이 억제해 놓은 상태였다.
이것은 점혈을 하는 수법과도 같았다. 어찌 보면 점혈보다는 산공독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한빈이 쓴 수법은 용린검법의 초식 중 금제법에 해당하는 근묵자흑이었다.
근묵자흑은 머릿속에 한빈의 구결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그 구결을 통해 단 한 명을 금제할 수 있는 방법.
근묵자흑은 일전에 아미백선 정소군에게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한빈은 아미백선에게 구결을 회수했기에 다시 금제법을 걸 수 있었다.
한빈이 소군에게 심어 놓은 구결은 바로 ‘심(心)’이었다.
심은 진룡파혼검을 운용할 때 필요한 속성이었다.
용린의 기운이 가장 잘 함축되어 있는 초식이기에, 소군에게 들어가서 적절하게 마기를 막고 있는 것이다.
소군은 영문도 모른 채 마기를 금제당한 상태였다.
정마대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소군을 데리고 다니려면 이 정도의 대비는 해 두는 것이 맞았다.
* * *
잠시 후.
한빈 일행은 팔 층 전각의 아래에 서 있었다.
그곳의 중간에는 커다란 현판이 하나 달려 있었다.
만향각(滿香閣).
한빈은 설화를 보며 물었다.
“네가 말한 곳이 여기라고?”
“네, 맞아요. 여기가 군자현에서 당과를 제일 맛있게 만든대요.”
설화가 당당히 말하자 청화도 끼어들었다.
“맞아요. 제가 봐 둔 떡집도 이곳이에요.”
청화가 만향각을 가리키자, 옆에 있던 소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화와 청화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만향각은 군자현에서도 유명한 곳이지. 만향이란, 중원 곳곳의 향기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빈은 활짝 웃으며 만향각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한빈은 전생에도 이곳에 꼭 와 보고 싶었다.
정보로만 접한 음식점이 바로 만향각이었다.
군자현은 중원 각지의 유생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만향각은 중원 각지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을 모두 재현했다.
그 맛도 현지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뒤처지지 않으니,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설화가 말한 당과도.
청화가 말한 떡도 모두 만향각에서 맛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한빈의 설명은 일각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설화는 볼을 부풀리며 한빈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옆을 힐끔 보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보더니 다들 한마디씩 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봐서 이곳의 점소이가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어떤 이는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한빈의 설명을 듣고 갔다.
그때였다.
옆에서 꼬르륵 소리가 흘러나와서 보니 청화가 배를 만지고 있었다.
소군은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결심한 듯 외쳤다.
“공자님, 저희 배고파요!”
“알았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거의 끝난 거 맞죠?”
“아직 시작이다. 설화야.”
“헉.”
설화가 비명을 토해 내자 한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올라가자. 확인해야 할 것은 다 확인했으니까.”
“헉, 뭘 확인하신 거예요?”
“그건…….”
“비밀이죠?”
설화가 씩 웃으며 한빈의 뒤를 따랐다.
한빈이 만향각으로 들어서자 점소이 하나가 재빨리 뛰어왔다.
점소이는 글자가 적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칠십이(七十李).
앞에 칠십은 점소이의 고유 번호고 뒤에 적힌 것은 점소이의 성이었다.
이것은 만향루만의 특징었다.
이곳 만향루의 점소이들은 매출에 따라 자신의 몫을 분배받는다.
덕분에 이들은 중원 전역에서도 가장 친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돈을 많이 쓰는 손님에게 한정된 평가이기도 했다.
점소이의 허리가 낫처럼 꺾였다.
“어서 옵쇼. 어디로 모실까요? 만향각은 일 층부터 팔 층까지…….”
한빈이 손바닥을 보였다.
“설명은 됐고 천천히 둘러보고 정하지.”
그 모습에 설화와 청화는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귀가 아플 정도로 설명은 한 게 누구던가?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귀찮다는 듯이 단호한 표정을 짓다니!
설화가 고개를 돌리니 소군마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게 저희 만향각은 층마다 가격이 달라서 일단 설명을 듣고…….”
“설명은 됐다고 해도. 일단 천천히 올라가 보지. 다시 내려오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점소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순간 점소이의 입가에 피어나는 염화미소.
그 미소에 설화는 혀를 찼다.
저것은 진정한 영업용 미소였다.
한빈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천천히 한 층 한 층 오르기 시작했다.
한빈은 쓱 훑어보더니 점소이에게 턱짓했다.
한 층 더 올라가자는 신호였다.
그렇게 올라온 것이 벌써 육 층이었다.
이쯤 되니 점소이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향각은 한 층을 오를 때마다 가격이 비싸진다.
하지만 음식이 달리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품질은 같지만, 가격만 높아진다.
다만 다른 점은 주문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많아진다는 점과, 가격이 비싼 관계로 자리를 잡기 편하다는 것이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매상이 높아지지만, 손님이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육 층을 힐끔 본 한빈이 다시 턱짓했다.
“다음 층도 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