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 지나가다 줍다 (5)
천애마검은 더는 대화가 필요 없다는 듯 그를 향해서 검을 뻗었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인 일점향에 오 할의 내공을 실었다.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슝!
그의 검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둘의 신형.
팡!
허공에서 굉음이 울렸다.
천애마검은 상대가 방금 전까지 있던 애묘의 입구에 착지했다.
반대로 흑의인은 천애마검이 있던 애묘에 내려앉아 쓴 입맛을 다셨다.
“역시, 천애마검이란 별호대로 검 끝이 쓰군.”
“그건 내가 할 말이군, 좌호법.”
“헉, 내 정체를 알았는가? 그렇다면 이딴 가면 따위는 쓰고 있을 필요가 없군.”
말을 마친 좌호법이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자 머리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며 찰랑거렸다.
달빛을 받은 좌호법의 모습은, 백옥으로 선녀의 형상을 깎아 놓은 것처럼 단아했다.
거기에 검은 눈썹은 마치 화룡점정이란 말이 어울리는 듯했다.
그 모습에 천애마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천애마검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제는 목소리를 바꿀 필요가 없지 않은가? 좌호법.”
“미안해요, 우호법.”
상대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좌호법은 입술을 삐죽이며 천애마검을 바라봤다.
그녀의 이름은 월인옥.
신교에서 지위는 좌호법이었다.
우호법인 천애마검과 더불어 교주를 호위하는 마교의 마인이었다.
정확히는 소교주를 호위하는 마인이라고 봐야 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교주를 누가 호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맡은 임무는 소교주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우호법 천애마검은 요즘 소교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보기에 이런 경우는 하나였다.
“좌호법, 진짜 소교주님은 어디 있지? 죽였나?”
“호호,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좌호법.”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군. 일단 그 혀부터 잘라 주지.”
“제 혀를 자르시면 어떻게 심문하시려고요.”
“손가락은 멀쩡하지 않나?”
말을 마친 천애마검이 다시 애묘의 입구에서 날아올랐다.
좌호법 월인옥도 같이 날아올랐다.
팡, 팡.
대기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연달아 울렸다.
달빛에 자욱하게 피어나는 먼지는, 마치 바둑판 위의 바둑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천산 골짜기의 애묘라는 바둑판 위에서 두 고수가 바둑을 두듯 수십 개의 바둑돌이 생겨났다.
팡, 팡.
격돌이 이어질수록 천애마검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검을 뻗은 천애마검이 외쳤다.
“내 검의 수준에 맞추고 있군! 바닥을 드러내기 싫다는 건가?”
“적어도 도망칠 기운은 숨기는 게 맞죠. 호호.”
월인옥이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상대의 검을 튕겨 냈다.
챙.
뒤쪽으로 살짝 밀린 천애마검이 등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은빛 삼절곤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쓰는 검과 은빛 삼절곤을 결합했다.
그러고는 검 자루에 내공을 주입했다.
순간 은빛 삼절곤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곧게 펴졌다.
탁. 탁.
천애마검은 완벽하게 변한 검을 들었다.
이제는 창이 된 그의 검.
월인옥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이십 년을 동고동락했는데 그런 수법을 감춰 놨군요.”
“도망칠 기운은 숨기는 법이라고 자네가 방금 그러지 않았나?”
“도망치시게요?”
“네 목을 벤 후.”
말을 마친 천애마검은 창을 곧게 뻗었다.
다시 번개처럼 앞으로 몸을 튕기는 천애마검.
이번에는 자신의 한 수를 숨기지 않기로 했다.
천애마검의 수법에 월인옥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언젠가는 우호법과 진심으로 부딪치길 원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군요.”
순간 그녀의 검이 울어 댔다.
우우웅.
동시에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공중에서 상대의 창을 맞이했다.
팡!
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각자 다른 애묘의 입구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잠시 상대를 응시하던 천애마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신교 내에서는 검객으로 알려졌지만, 자신은 창을 만지는 마인이었다.
이것은 교주와 몇몇 장로밖에는 모른다.
자신이 창을 쓴다는 것은 좌호법에게도 비밀이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일점향은 찌르기에 특화된 공격이었다.
그 찌르기의 잠재력을 십 할 끄집어내려면 창이 정답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태상교주였다.
태상교주는 천애마검에게 교주의 호위를 부탁한다며 지금 들고 있는 은원창을 건넸다.
그때 천애마검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교주와 소교주의 방패가 되리라 결심했다.
천애마검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제까지 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실력의 육 할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도 실력의 육 할 정도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격돌에서 알았다.
천애마검이 상대를 보고 있을 때 바람이 불어왔다.
휘잉.
천애마검의 눈이 커졌다.
그 바람에 상대의 검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월인옥의 검날이 이상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검은 검날이 세 개였다.
그때 월인옥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저도 숨겨 놓은 한 수가 있다고요, 우호법.”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순간 검날이 힘없이 휘어졌다.
천애마검은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이 검이 아니라 채찍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십 년을 동고동락해 오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애병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서로 똑같았던 것.
팡, 팡.
다시 시작된 그들의 격돌.
천애마검은 이대로면 자신이 얻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월인옥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박!
이번에도 둘은 허공에서 서로의 목을 노리며 스쳤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둘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자석이 붙듯, 둘의 병장기는 허공에서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새가 아니었다.
잠시 허공에서 멈췄던 그들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슝!
새도 날갯짓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
자신의 병기에 모든 힘을 몰아넣은 월인옥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지금은 내공의 싸움이었다.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내공을 돌린다면 무조건 자신의 목숨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떨어진다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월인옥은 상대의 동귀어진 수법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 증거로 상대는 웃고 있었다.
천애마검이 웃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번에 쓴 수법은 일점향이 아닌 일접향(一椄香)이었다.
무조건 하나의 물건을 자신의 병기에 붙일 수 있는 수법이었다.
병장기가 서로 붙게 되면, 상대가 내공을 거두지 않을 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내공을 거두면 상대는 천애마검의 검기에 갈가리 찢어지게 된다.
어찌 보면 동귀어진의 수법이 맞았다.
하지만 천애마검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천애마검은 자신의 애병에 슬쩍 성질이 다른 진기를 흘려 넣었다.
순간 창대를 이루었던 삼절곤 중 하나가 툭 분리된다.
삼분지 일 토막이 난 창대가 아래로 떨어지자, 천애마검은 그것을 다리로 차올렸다.
탁.
순간 창대가 월인옥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휭!
순간 월인옥의 집중력이 흩어지자 천애마검의 검기가 그녀의 전신을 덮쳤다.
화르륵.
그녀가 죽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를 옥죄던 힘이 풀렸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붕 떠올랐다.
정확히는 하강하던 그녀의 몸이 멈췄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반대로 천애마검은 자신의 복부에 꽂힌 암기를 바라봤다.
검은색 부챗살 하나가 흉물스럽게 자신의 복부에 매달려 있었다.
복부에서 몸 곳곳으로 퍼지는 낯선 기운.
그것은 분명히 산공독이었다.
이대로면 모든 것이 묻힐 것이었다.
언젠가는 쓸데없이 신교와 정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즉 수만 신교인의 목숨이 달린 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결심한 듯 품속에 손을 넣었다.
순간 절벽 아래에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났다.
쿠아앙!
월인옥은 아래를 보는 대신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 헤어졌던 가면을 쓴 흑의인이 있었다.
흑의인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면을 쓴 흑의인은 허공을 박차고 절벽 쪽에 있는 애묘에 착지했다.
“내가 그리 조심하라 하지 않았더냐?”
“죄송해요. 그런데 내려가서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내 흑죽선에 맞았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게다.”
흑의인은 부채를 쫙 펼쳤다.
검은색 부채는 마치 검은 공작이 날개를 펼치는 것 같았다.
부채를 보던 월인옥이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부챗살이 하나가 없군요.”
“살아난다고 해도 저 아래에서 한 줌 핏물이 될 테지. 그럼 나는 그만 가 보겠다. 우호법이 실종됐으니 신교의 내부도 발칵 뒤집히겠지. 당분간은 오지 않으마!”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제가 발판을 닦아 놓을게요. 약속하신 것 잊지 마세요. 교주의 자리는 제 거예요.”
“십 년 뒤에.”
말을 마친 가면 쓴 복면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보름 후.
한빈 일행은 유림 서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추격을 피해 이곳까지 오느라 대부분 산길을 따라 왔다.
덕분에 한빈 일행의 복장은 말이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개방도로 오해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유림 서원이 있는 군자현에 도착한다.
군자현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군자현에 들러서 옷가지와 생필품을 구매한 뒤 유림 서원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러니 고생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설화와 청화는 땀을 뻘뻘 흘리며 토끼구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는 소군의 말 때문이었다.
덕분에 저녁 식사는 무조건 토끼구이였다.
한빈도 이쯤 되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한빈은 모닥불 위에 조그마한 철통을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 육포를 넣었다.
순간 향기가 주변으로 풀풀 풍겼다.
토끼구이를 뒤집던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공자님, 그건 뭐예요?”
“남해루(南海淚)라는 음식이다.”
“남해루라고요?”
“해남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지.”
“해남에서 육포를 이렇게 넣어서 먹어요? 그리고 남해의 눈물이란 게 무슨 뜻이에요?”
“이걸 맛본 남해의 어부들은 백이면 백, 모두 눈물을 흘리게 마련이지.”
“왜 눈물을 흘려요?”
“뭐, 물고기만 먹다가 육지의 고기 맛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는 하지만······.”
“하지만, 뭐요?”
“이게 그렇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네. 설화가 한번 먹어 보고 얘기해 줘.”
한빈이 남해루를 한 그릇 떠서 설화에게 내밀었다.
설화는 아무 기대 없는 듯 그것을 한 입 넣었다.
순간 설화의 눈이 커졌다.
“와, 이거 맛있어요.”
“이게 맛있다고?”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청화에게도 내밀었다.
청화도 마찬가지로 입을 딱 벌린다.
한빈도 고개를 갸웃하며 남해루를 한 입 넣었다.
어부도 아닌 설화가 눈물까지 흘리며 저리 맛있게 먹을 이유는 없었다.
한빈은 바로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토끼구이 때문이었다.
하도 기름진 것만 먹다 보니 시원한 국물과 육포의 향이 몇 배는 강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긴, 한빈이 남해루를 끓인 이유도 보름간 기름진 토끼구이로 거의 매 끼니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청화가 토끼 꼬치와 남해루 한 그릇을 가지고 소군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