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 지나가다 줍다 (3)
아이의 맥은 한빈의 기운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과는 달리 아이의 몸에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한 톨의 마기도 없었다.
단전에 있는 기운은 흡사 무당이나 화산의 기운과 비슷했다.
즉, 도가의 기운이라는 뜻이었다.
마교인들에게 둘러싸인 도가의 아이라?
한빈은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 사건을 누군가 자신에게 쥐여 줬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아이에게 용린검법의 기운을 사용했다.
‘기사회생.’
전력으로 쓴 것은 아니고 살짝만 흘려 넣었다.
순간 아이가 눈을 떴다.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한빈과 설화 그리고 청화였다.
아이는 셋을 멀뚱거리며 바라보다 뭔가 생각났는지 비명을 질렀다.
“악!”
그 소리에 설화가 바로 손을 썼다.
픽.
바로 아혈을 제압해 버린 거였다.
그 모습에 청화가 입을 딱 벌렸다.
“언니, 애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점혈하시면 어떻게 해요?”
“강호 속담에 조심해야 할 게 세 가지 있다고 했어.”
“노인, 여자, 아이요?”
“그래. 이 아이가 다른 동료를 부르는 거라면 어떻게 할 거지?”
“역시 언니예요.”
청화의 빛보다도 빠른 태세 전환에 설화가 흡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네 측은지심에 난 감동했어. 강호인이라면 사람을 죽일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릴 마음도 가져야 해. 바로 너처럼.”
“아니에요. 강호에서 의심은 미덕이라고 공자님이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언니가 최고예요.”
이 아수라장에 서로 칭찬을 주고받는 설화와 청화.
한빈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사실 설화의 말이 맞았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살수들은 주로 노인과 아이로 위장한다.
하지만 지금 이 아이는 위장한 것이 아니었다.
한빈은 피로 물든 아이의 얼굴을 씻기며 위장 여부를 철저히 살폈다.
완맥에 진기를 불어 넣으며 무공의 유무까지 살폈다.
일단은 의심 갈 만한 정황은 없었다.
거기에 주변에는 어떤 무인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린의 기운을 불어 넣었으니 마기가 있다면 반응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잠시 상태를 살피던 한빈은 아이의 혈도를 풀어 줬다.
아이가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아이는 설화를 보며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마치 허락을 받으려는 듯 보였다.
아이의 모습에 설화가 살짝 웃었다.
경계심이 풀어진 설화는 순식간에 마차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그러고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뭔가를 꺼내 아이의 입으로 향했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뾰족한 물건.
갑자기 날아온 뾰족한 물건에 아이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설화는 슬쩍 방향을 틀어 끝내 아이의 입에 넣었다.
순간 아이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아이는 입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입을 열었다.
“원래 정신이 드는 데는 당과가 최고야. 어때?”
아이는 눈을 멀뚱거리다가 꼬치를 잡고 당과를 바라본 후 답했다.
“마, 마시떠요.”
입에 당과가 한 움큼이라 발음도 잘 안 되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마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부는 비위가 상했는지 아직도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한빈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속은 좀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님을 유림 서원까지 모시라는 명을…….”
“괜찮습니다. 시체가 저리 널려 있는데 저 길을 지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마부를 바라봤다.
마부는 침음을 삼켰다.
“음.”
분명 백미랑으로부터 유림 서원까지 모시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저 처참한 광경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어릴 적 마적에게 가족을 잃고 하오문에 의탁해서 이제까지 살아온 그였다.
이런 장면은 어릴 적 그의 기억을 깨어나게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공자는 마치 자신의 아픔을 아는 것처럼 그를 배려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하오문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을 얼핏 들었다.
굴러들어 온 돌이 하오문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대하고 보니, 그는 진정한 성인이었다.
마부의 눈이 점점 촉촉해질 때 다시 한빈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대로 조처하십시오. 하오문이 처리하려 하지 마시고, 꼭 여기에 나와 있는 곳으로 연락을 취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차는 어떻게 할까요? 공자님.”
“그냥 가져가십시오. 저희는 다음 마을에서 마차를 새로 구하겠습니다.”
“아.”
“그럼 이만…….”
한빈은 몸을 돌려 일행에게 턱짓했다.
한빈의 신호에 설화가 재빨리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시체를 넘어 마차에서 멀어졌다.
한빈과 청화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바람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마부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형님!”
그는 바로 악비광이었다.
그는 소매로 입을 쓱 훔치더니 장창을 들고 다급하게 한빈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마부는 마차에 올라 재빨리 고삐를 잡았다.
이런 곳에는 오래 있어 봐야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얼마나 갔을까?
마부는 누군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천천히 마차를 멈추었다.
마차를 멈춘 마부는 그들의 복장을 살피고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휴.”
상대는 다행히도 정파였다.
마부가 그들을 정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소매에 빽빽하게 수놓아진 매화를 보면 분명 화산파였다.
화산파 중에서도 가장 인재라 불리는 매화검수.
거기에 다른 이는 무당의 상징인 태극이 수놓아진 무복을 입고 있었다.
화산이나 무당 모두 도가의 문파였다.
일단 횡액을 면했다고 생각한 마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도인분은 어쩐 일로 길을 막으셨습니까?”
“내 물어볼 것이 있어 마차를 세웠소.”
말한 이는 화산파의 매화검수였다.
“네, 하문하시지요. 저는 하오문의 잡일을 하는 마삼이라고 합니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는 최대한 자신을 낮췄다.
화산이 도가 계열이긴 해도 무림의 문파.
거기에 매화검수가 아니던가.
신분을 속이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오문의 사람이셨구려. 마침 잘됐군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마차에 누가 있습니까?”
“마차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음, 분명 제가 찾는 흔적은 마차의 바퀴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라…….”
“살펴보셔도 됩니다.”
마부는 손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그러자 화산파의 사내가 순식간에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쪽을 살핀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벌써 사라졌군요.”
“네?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됐습니다. 나중에 팽 공자를 보게 되면 매화검협과 현문이 찾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지, 지금 매화검협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마삼과 대화를 나누는 화산파의 매화검수는 다름 아닌 서재오였다.
서재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자신이 별호를 밝히면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반응이 상대에게 나왔다.
“그렇다면 팽 공자의 지인이 아니십니까? 진작 말씀하셨으면…….”
마삼은 말끝을 흐렸다.
매화검협이 하북팽가 사 공자의 친우라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나 있는 상태였다.
상대가 매화검협이라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마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소매를 바라봤다.
분명 진짜 화산파의 무복이 맞았다.
그런데 조금 의심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것은 매화검수치고는 말투가 너무 가볍다는 점이었다.
마삼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재오가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마차에서 내렸으면 다시 흔적을 찾으면 됩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저 앞쪽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마삼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에 서재오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마삼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 그런 일이 있군요.”
서재오가 고개를 끄덕일 때, 뒤쪽에 있던 무당의 도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다름 아닌 현문이었다.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바뀐 현문이 혼잣말을 뱉었다.
“아, 더는 강호의 일에 말려들게 하지 말라 사형이 신신당부했거늘, 어찌 이런 일이…….”
현문은 난감한 듯 길게 이어진 잔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얘기는 안 했네. 하지만…… 팽 공자가 강호의 일에 휩쓸린다면 위험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태극검제가 한 말이라네.”
“헉.”
뜻밖의 말에 서재오가 탄성을 터뜨리자 현문은 길게 이어진 잔도를 가리키며 외쳤다.
“뭐, 일단 빨리 따라잡는 것이 좋겠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서재오는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렸다.
순간 사라지는 두 개의 신형.
그들이 사라지자 마부 마삼은 재빨리 말고삐를 잡았다.
자신처럼 까마득한 아랫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 아니 하오문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 전 그들의 마차를 가로막았던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 그 전조일지도 몰랐다.
그는 일단 돌아가 이 사태를 문주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 * *
“에취.”
산자락에서 재채기 소리가 울렸다.
“공자님, 고뿔에라도 걸리신 거예요?”
“아니다. 전에는 귀가 가렵더니 이제는 콧속이 근지럽네. 누가 내 얘기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
“누가 공자님 얘기를 해요? 우리가 여기 있는지도 모를 텐데요.”
설화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래쪽에는 잔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한빈 일행은 사건 현장을 떠나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구걸십팔보를 익힌 한빈과 설화는 순식간에 산자락으로 몸을 숨겼다.
마차를 버린 이상 노출된 잔도를 이용한 필요는 없었다.
한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도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아이에게 물었다.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편안하게 말해도 좋다.”
“기, 기억나는 게 전혀 없어요.”
“그럼 언제부터 기억나는데?”
“기억나는 것은 세 명의 얼굴밖에 없어요.”
“세 명이라……. 그게 혹시 우리니?”
“네, 맞아요. 그 전 기억은 전혀 없어요.”
“그럼 이름도 기억 안 나겠군.”
“그, 그게…….”
“생각나는 게 있다면 말해 봐.”
“소군이라 불렸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언제 어디서 누가 저를 그렇게 불렀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소군이라.”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생과 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