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지나가다 줍다 (2)
혈향(血香)이라는 말에 마부의 옆에 앉아 있던 악비광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형님, 혈향이라니요?”
“아니, 강호인이 무슨 혈향이라는 말에 그렇게 놀라나?”
“여기까지 오면서 잔뜩 긴장시킨 것이 형님 아닙니까? 그래 놓고 지금 모른 척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언제 긴장시켰다고 그래?”
“아니, 여기까지 오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라고 한 게 형님이잖아요.”
악비광의 굵은 눈썹이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파닥파닥 뛰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이곳까지의 여정을 떠올렸다.
사건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오는 기척이 멀리서 느껴지는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추격하면 따돌리든가, 기다렸다가 적의 멱살을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한빈은 전자를 택했다.
지금은 살짝 쉬어 가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으며 이제까지 너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암제와 금선 그리고 지선과의 대결이 끝나지 않았다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자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유림 서원까지 가고 싶었다.
그런데 짙은 혈향이 바람에 묻어 왔다.
한빈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향이었다.
악비광이 웃기만 하는 한빈의 모습에 못 참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형님, 혈향이 난다는 것은 근처에서 사달이 벌어졌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재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악비광이 옆에 있는 마부에게 고삐를 넘기더니 장창을 쥐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파바박.
그러고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설화가 물었다.
“악 공자님 혼자 괜찮을까요?”
“아마도…….”
“공자님, 그렇게 무책임한 발언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내가 언제?”
“악 공자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게 무책임한 거죠.”
설화의 말에 한빈이 씩 웃었다.
요즘 들어 살수의 흔적은 완전히 씻어 버린 설화였다.
누가 보면 평범한 강호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놀리는 듯한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가 다시 물었다.
“악 공자님은 괜찮겠죠?”
“설화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지금 날아오는 혈향으로 짐작건대, 이미 일은 마무리됐어. 지금 간다고 해도 아무도 살릴 수 없고 아무도 죽일 수도 없다는 말이지.”
“헉, 그걸 혈향으로 알아챈다고요?”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전생에 비하면 모든 감각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지 않아도 기감과 후각은 전생에서도 손에 꼽혔는데, 이건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눈으로 보지 않고 피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물론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으면 알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혈향으로 그것을 구별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강호의 어떤 고수가 온다 할지라도 똑같다.
한빈은 조용히 앞쪽에서 일어난 상황을 그려 봤다.
대충 십여 구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문파까지는 모르겠지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는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마차는 덜그럭 소리를 내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때였다.
마차가 멈췄다.
슬쩍 마부석을 바라보니 마부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혹시 현장은 처음입니까?”
“저, 저렇게 처참한 현장은 처음입니다. 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마부는 고삐를 돌렸다.
말들이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부는 말을 옆으로 돌려놓은 채 마차를 멈췄다.
그는 말이 놀랄 정도의 처참한 현장이라 판단했다.
마부는 마차에서 내린 뒤 코를 틀어막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마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다름 아닌 하오문에서 온 자였다.
하오문에서 온 자가 시체를 보고 저리 당황한다고?
누가 보면 코웃음 치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만큼 처참했다.
허리가 반 토막이 난 시체는 몸통과 다리의 주인이 서로 뒤엉킨 상태였다.
거기에 쏟아져 나온 인체의 조각들이 잔도 위를 덮고 있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
하오문도로서도 참을 수 없는 광경임이 분명했다.
현장을 보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화도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빈과 설화의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둘 다 왜 그래요?”
청화는 시체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오직 한빈과 설화의 표정이 궁금할 뿐이었다.
한빈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청화가 놀란 듯 한빈이 바라보는 곳을 가리켰다.
“고, 공자님! 저게 뭐예요?”
잔도와 벼랑이 이어지는 구석에서 바위가 들썩이고 있었다.
한빈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누구긴 누구겠어.”
“그러니까, 저 바위가 악 공자라는 거예요?”
청화가 놀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바위 옆에는 악비광의 장창이 잘 놓여 있었다.
덩치 큰 악비광이 잔뜩 몸을 웅크리자 바위처럼 보였다.
한빈과 설화가 찾던 것은 바로 악비광이었다.
먼저 상황을 살피러 갔던 악비광이 안 보이자 걱정이 되었던 것.
한빈은 악비광이 비위가 저렇게 약한지 몰랐다.
구석을 보지 못했기에 그제야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악비광은 연신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모든 걸 쏟아 내는구나. 휴.”
한빈의 한숨에도 청화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악 공자님, 독에라도 당한 거 아니에요?”
청화는 상태가 이상해진 악비광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때 설화가 재빨리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청화야.”
설화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청화가 물었다.
“왜 그래요, 언니?”
“가지 마. 지금 네가 보는 광경보다 더 처참한 장면을 목격하게 될 거야.”
“네?”
청화가 되물었지만, 더는 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체에 다가가던 한빈이 갑자기 멈췄다.
그는 팔을 들어 뒤따라오는 설화에게 신호를 보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 이들은 마교인들이다. 일단 독이 있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
“마교요?”
“지금 저 시체 중 반은 확실히 마교인이다.”
한빈이 반이라고 했던 것은 마교인의 표식이 보이도록 하늘을 보고 있는 시체가 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설화는 재빨리 물었다.
“피 때문에 잘 안 보이는데요. 뭘 보고 구분하신 거예요?”
“저 목에 보이는 표시는 마교의 상급 무사들에게만 있는 표식이지.”
“마교의 상급 무사요?”
“뭐, 정파로 치면 절정 정도라고 할까?”
“이들이 모두 절정이라고요?”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 숨을 거뒀다.
한마디로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힘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절정 정도의 무사들이라면 상대의 힘을 알아봤을 테고, 이런 꼴을 당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화경의 고수와 십수 명의 절정의 무사가 부딪친다고 가정해 보자. 절정인 무사들은 상대를 알아보고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래도 화경의 고수에게 끝내 당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시체가 한곳에 모일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죽이고 나서 모아 놓은 것도 아닌 게, 신체의 일부가 사방으로 흩어진 것으로 봐서 그들이 숨을 거둔 장소는 이곳이 분명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가 물었다.
“이들은 왜 도망치지 않은 거죠? 혹시 정파의 백대고수 정도 되는 자에게 당한 걸까요?”
“절정 고수 십수 명을 몇 호흡 만에 이렇게 만들어 놓은 백대고수라…….”
한빈은 고개를 흔들자 설화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답했다.
“백대고수가 아니라 정파의 은거 기인이겠네요.”
“꼭 정파라고도 볼 수 없지. 저 상처를 보면 마교의 흔적에 가깝거든.”
한빈은 상처 쪽을 가리켰다.
토막 난 살점 사이에 보이는 무공의 흔적은 분명 정파보다는 사파, 사파보다는 마교에 가까웠다.
깔끔하게 끊어 내는 공격이 정파의 특징이라면, 사파의 흔적은 조금 더 지저분하다.
그것은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교의 흔적은 깔끔하면서도 지저분한 것이 특징이었다.
공격은 예리하지만, 무공에 담긴 마기 때문에 상처가 흐물흐물해지기 마련이었다.
강북 지역에 마교도라?
심지어 이 정도의 마교인이 동쪽으로 오면서 개방과 하오문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니?
한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마교가 아직 봉문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번에 싸웠던 잔혈마도의 경우는 예외 사항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독단적인 행동.
하지만 지금은 무력대 하나가 통째로 나온 상황이다.
혹시 정마대전이 조금 더 당겨지는 것은 아닐까?
한빈의 걱정이 이것이었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세가 간의 문제 혹은 문파 간의 문제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악비광이 몸을 흐물거리며 뒤쪽에서 나타났다.
“형님.”
“몸은 좀 괜찮고?”
“괘, 괜찮습니다.”
“입에 침 좀 닦고.”
“아, 침이라니요?”
악비광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청화였다.
청화는 코를 씰룩대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악비광을 바라봤다.
“어쩐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혈향은 아니고 꼭 토사물 같은…….”
청화의 말에 악비광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은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악비광은 하필이면 시체를 밟았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한 악비광의 시선.
그와 동시에 악비광은 다시 구석으로 달려갔다.
강호인이긴 해도 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은 보지 못한 듯했다.
그때였다.
한빈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유난히 시체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던 한빈은 갑자기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누가 보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한빈은 시체를 하나하나 걷어 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옆으로 던지던 한빈이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시체 중 일부를 들어 올렸다.
순간 설화가 달려갔다.
한빈이 들어 올린 것은 시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였다.
키로만 봐서는 한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온몸이 피투성이라 성별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공자님, 그 아이는 대체…….”
“쉿.”
한빈은 검지를 입에 대고는 아이의 맥을 잡았다.
그러고는 혈도의 몇 곳을 찍었다.
픽, 픽.
순간 아이가 입을 벌렸다.
콜록.
기침 속에 핏덩이가 섞여서 나왔다.
그때 뒤쪽에 있던 청화도 달려왔다.
한빈은 둘에게 아이를 맡기고 주변을 살폈다.
위험은 없는 상황이지만,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마차 근처로 와서 아이의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제야 겨우 아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키에 걸맞게 얼굴도 열 살 정도로 보였다.
한빈은 아이의 완맥을 다시 잡았다.
숨이 돌아온 지금은 아이의 배경을 살펴봐야 할 때였다.
한빈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기운을 슬쩍 불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