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지나가다 줍다 (1)
한빈이 지금 처리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진사쌍검에 대한 처리였다.
남은 한 가지는 이번에 얻은 보상, 즉 책장의 추가를 어디에 사용하느냐였다.
책장의 추가는 실력편 혹은 응용편, 융합편에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가장 필요한 곳이 셋 중 어딘지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빈은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류하기로 했다.
필요한 상황이 오면 추가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한빈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자 구불구불 기괴한 모양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적사검과 청사검이었다.
한빈은 청사검을 들어 쓱 훑어봤다.
그러고는 서책 하나를 펼쳤다.
서책을 쭉 살펴본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지금 살펴본 서책은 다름 아닌 유림 서원의 규칙이었다.
순간 한빈은 팽강위의 부탁이 떠올랐다.
유림 서원 내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유림 서원에서 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몸을 지키는 수준이었다.
한빈도 그 규칙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유림 서원에서 무력을 사용했다가는 가문 간의 싸움으로 번지기 딱 좋았다.
무림세가끼리야 비무라는 핑계로 힘의 고하를 겨루지만, 유림 서원은 근본부터 달랐다.
검으로 힘을 겨룬다기보다는 혀로 힘을 겨루는 곳이라고 봐야 했다.
뭐, 상황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강호에서도 그렇듯 그곳에서도 예외는 있을 테니까.
유림 서원에서는 분쟁이 생기면, 서원 생도들끼리의 유혈 사태가 아닌 대리 비무의 형태로 진행한다고 들었다.
거기에 호위 무사를 제외한 사람은 병장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적사쌍검을 그냥 창고에 박아 놓기도 뭐하니 방법은 하나였다.
“청화야, 이건 청사검이라고 한다. 일단 맡아 두거라.”
“고, 공자님, 이걸 왜 제게…….”
“이건 무림 칠대기보 중 하나인 진사쌍검 중 한 자루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 무림 칠대기보 중 하나라고요? 대체 공자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 검을 제게…….”
다시 말끝을 흐리는 청화.
한빈은 솔직히 유림 서원에서는 생도의 병장기 휴대가 금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감동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청화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청사검을 받아 들었다.
반대쪽에서는 설화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이건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와도 같았다.
한빈은 설화를 바라보며 적사검을 건넸다.
“이게 백사검이었으면 설화와 어울렸을 텐데 아쉽구나. 이건 네게 맡길 테니 잘 보관해 줘.”
“네, 공자님. 목숨이 끊어져도 이 검만은 제가 지킬게요.”
생긋 웃는 설화는 마차 안에서 뭔가를 찾았다.
한참을 뒤적이던 설화는 재빨리 보따리 하나를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보따리에서 나온 것은 설화의 간식인 당과였다.
설화는 의리 있는 아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당과만이 아닌 떡도 들어 있었다.
설화는 당과를 하나 집더니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님, 드실래요?”
“하하. 괜찮다, 설화야.”
그때 청화가 손을 내저으며 떡 하나 집어 들었다.
“언니, 공자님은 떡을 더 좋아해요. 그렇죠, 공자님?”
양쪽에서 당과와 떡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한빈은 지금이 용린검법의 책장 추가를 선택하는 일보다 더 힘들다고 느꼈다.
이것은 아비가 좋냐 어미가 좋냐 하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 * *
한빈이 하북팽가를 떠난 지 한 시진 후.
대규모의 인원이 하북팽가에서 멀어졌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아미백선의 일행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 지대한 공을 세워 하북팽가의 위상을 높였던 적혈맹호대도 그들의 본거지인 천수장으로 돌아갔다.
경비 무사는 허탈한 표정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휑한 하북팽가의 앞을 바라봤다.
점심시간 때문에 정문을 지키는 무사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곳에서 강호 영웅들이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경비 무사의 귓가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모두가 떠나니 마음이 휑하지 않은가?”
그 목소리에 경비 무사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박도를 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것도 잠시, 경비 무사는 눈을 크게 떴다.
바람에 휘날리는 매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짜 매화 꽃잎이 아니었다.
바람에 흩날리던 상대의 소맷자락에는 매화 문양이 가득 차 있었다.
어찌나 수를 잘 놓았는지 매화 향기가 풍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앞머리가 살짝 흘러내리자 그는 마치 고매한 수법을 쓰듯 검지와 중지로 앞머리를 잡고 뒤로 넘겼다.
경비 무사가 외쳤다.
“화산의 매화낙조다! 아, 서 대협 아니십니까?”
매화낙조는 세간에 잘 알려진 화산파의 조법이었다.
경비 무사의 물음에 사내가 빙긋 웃었다.
“다행히 알아보는군.”
그는 다름 아닌 서재오였다.
서재오는 흡족한 표정으로 경비 무사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경비 무사가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매화검협을 몰라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경비 무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매화검협 서재오만은 모를 수 없었다.
하북팽가에 머무는 동안에 얼마나 티를 내고 다니는지, 무사에서 시비까지 모두 그의 별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대협이라 칭하면, 눈을 찡긋하며 ‘매화검협이라네.’ 하며 자신의 별호를 밝히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얄밉지만은 않은 게, 기분만 맞춰 주면 그의 품에서 철전이 술술 나왔다.
문 앞에 있는 경비 무사도 지금 군침을 삼키는 중이었다.
경비 무사는 서재오의 머리부터 발끝을 싹싹 훑었다.
그러고는 기쁨에 찬 눈으로 입을 열었다.
“매화검협 대협, 제 눈이 이상한지 오늘따라 매화 꽃잎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허허,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군.”
서재오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것은 사천당가와 하북에서 세운 공 덕분에 받은 매화였다.
이제 더 이상 매화가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사실 매화를 추가한 무복을 화산파에서 보내오기로 했지만, 서재오는 극구 사양했다.
대신에 하북의 유명한 점포에서 매화를 손수 추가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소맷자락에 가득 차 있는 매화 꽃잎이었다.
“저리 많은 매화는 처음 봅니다.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면 사람이 아닙죠.”
“자네, 혹시 참은 챙겼는가?”
“그게…….”
살짝 말끝을 흐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노골적으로 목적을 드러냈다가는 앞선 입에 발린 소리가 묻힐 수도 있었다.
경비 무사의 마음이 통했는지 서재오는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순간 경비 무사의 눈이 커졌다.
그가 든 것은 철전이 아니라 은전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은전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타다닥.
자세히 보니 크기로 봐서 말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황토색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하북팽가의 정문을 향해 달려왔다.
서재오는 은전을 들고 경비 무사는 목을 빼고 기다리는 상황에서 나타난 불청객.
경비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힘껏 소리쳤다.
“대체 어떤 놈이 매화검협 앞에서 경거망동이냐!”
앞으로 박도를 내민 경비 무사는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서재오가 들고 있는 은전을 가까스로 잡았다.
은전을 품에 넣은 경비 무사는 이를 악물고 서재오의 앞을 지켰다.
달려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감히 하북팽가 앞에서 드잡이질을 칠 인간은 지금 강호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경비 무사의 착각이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괴인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먼지구름이 가까워짐에 따라 막대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 기세의 폭풍이 경비 무사를 덮쳤다.
경비 무사는 마혈을 제압당한 것처럼 석상이 되어 버렸다.
그때 먼지구름이 걷히고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소매에는 조그마한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를 본 서재오가 눈을 크게 떴다.
“현문 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사형의 부탁으로 팽 공자를 찾으러 왔네.”
여기서 현문의 사형이란 다름 아닌 무당파의 태극검제를 말한다.
한빈에게 태극칠성보를 전수했던 바로 그 태극검제말이다.
태극검제가 현문에게 부탁한 것은 하나였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사천당가에 남아 있으라는 것.
숨은 뜻은 한빈이 태극검제가 남긴 일곱 걸음을 해석하는 것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 일곱 걸음을 통째로 뜯어서 마차에 싣고 사천당가를 떠났다.
그 후 사천당가를 찾아온 태극검제는 망연자실 강북을 바라봤다.
현문이 잠시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을 때, 서재오가 말했다.
“팽 공자는 떠났습니다.”
“떠나? 그럼 천수장이란 곳으로 가 봐야겠군.”
“팽 공자가 향한 곳은 천수장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어딘가?”
현문이 급한 듯 재촉하자 서재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유림 서원으로 떠났습니다. 마차를 타고 떠났으니 빨리 출발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험, 내가 부탁해도 될까? 서 대협.”
“아무래도 저는…….”
그때였다.
현문이 갑자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순간 그의 주먹에서는 목탁 소리와도 같은 관절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동시에 서재오가 표정을 굳혔다.
“아, 알겠습니다. 현문 어르신. 제가 모시지요.”
“그럼 출발하게.”
말을 마친 현문은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동시에 서재오가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현문이 따르는 것은 당연할 일.
그제야 굳었던 경비 무사의 몸이 풀어졌다.
그는 재빨리 손에 든 은전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매화검…….”
경비 무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히 서재오가 들고 있었던 것은 은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은 철전이었다.
망연자실 철전을 바라보던 경비 무사는 입을 벌렸다. 그는 자신이 앞을 경계하는 사이에 서재오가 은전을 철전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부자란 그런 것이었다.
베풀 때 베풀더라도 한도를 넘어서서 돈을 쓰지는 않아야 했다.
그것이 만금 전장의 후계자인 서재오가 어렸을 적부터 받아 온 교육이었다.
이제는 그 교육에 더불어 계약서의 중요성까지 깨닫고 있었다.
* * *
일주일 후.
마차는 시원하게 큰 원을 그리며 잔도를 달리고 있었다.
잔도란 높은 산에 길을 내기 어려우니 산 옆에 덧대어 만든 길을 말한다.
사실 중원의 발전은 잔도와 함께했다고 봐도 되었다.
잔도의 발전은 각 지역의 물자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활력소였다.
하나, 그 활력소인 잔도는 사실 알고 보면 전쟁의 산물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길.
하지만 지금처럼 평화의 시기에는 이 잔도 덕분에 사람이 먹고살고 있었다.
덜그럭, 덜그럭.
잔도의 위를 지나는 마차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물론 이것은 설화의 생각이었다.
설화는 조용히 마차 밖을 바라봤다.
설화가 한빈과 다니면서 발전한 것은 무공뿐이 아니었다.
살수 특유의 감각도 이전보다 몇 배는 발달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설화가 밖을 보면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작게 말했다.
“어디선가 혈향이 흘러들어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