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 선묘도 (2)
상체를 기울이는 광개를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다 방법이 있대도. 혹시 궁금해?”
“아, 그러니까…….”
광개는 슬쩍 말끝을 흐리며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유림 서원의 출입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유림 서원의 출입 방법을 알아낸다면?
이것은 개방이 최고의 정보 단체에서 천상계의 정보 단체로 발돋움할 기회였다.
강호의 정보만이 아니라 관료층 등의 정보까지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뭐, 강호와 연관이 없다면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관무불가침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황궁과 관료 그리고 강호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그런 이유로 완벽한 정보를 수집하자면 유림 서원에서 떠도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가족에게까지 비밀은 없었다.
관료들은 자신의 자제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 마련이었다.
그 황족과 관료들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이 바로 유림 서원이니, 그곳은 정보의 노다지였다.
입맛을 다신 광개는 은근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친구, 그 방법을 알려 준다면 내 앞으로 이 년 동안 개방의 전서구를 무료로 사용하게 해 주겠네.”
“아, 그거 좋은 제안이네. 그런데 어쩌나…….”
“왜 그러는가?”
“그 방법은 나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
“자네가 사용한다면 내가 못 할 게 뭐 있겠나. 그러니 가르쳐 주게.”
“그럼 일단 계약서부터 쓰지.”
한빈이 씩 웃자 광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 한 장을 후딱 쓴 한빈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탁.
그러고는 조용히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집법당주 팽대위가 아직 수련하고 있었다.
슝! 슝!
파공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팽대위에게 다가간 한빈은 목소리를 높였다.
“숙부님! 결심했습니다.”
그 소리에 팽대위가 동작을 멈췄다.
팽대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결심이란 건 안 간다는 통보겠지. 내 그대로 보고하지.”
“아닙니다, 숙부님.”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유림 서원에 갈 겁니다.”
“어? 유림 서원에 간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 간다고 하지…….”
그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한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보셔야죠. 저는 관직에 나가기는 싫습니다.”
“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검만 휘두르며 살 수 있습니까? 옛 성현의 말씀도 머리에 새겨야 무인으로서도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무학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옛 성현의 말씀도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인이 나아갈 길입니다.”
“…….”
팽대위는 넋을 잃고 한빈을 바라봤다.
이건 완벽한 태세 전환이었다.
무아지경에서 거도를 휘두르다 보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었다.
팽대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중천에 뜬 태양.
자신이 혼원벽력도를 펼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이 바뀔 수는 없었다.
팽대위가 당황하자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북팽가에서도 글깨나 읽었다는 인물이 나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하북팽가를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 팽대위.
한빈은 그윽한 미소를 머금고는 힘차게 말했다.
“제가 그곳에서 집법당에서 일할, 쓸 만한 서기를 알아보도록 하죠.”
순간 팽대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재빨리 한빈의 손을 잡았다.
“아, 그런 뜻이군. 내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군. 내 빨리 달려가서 유림 서원의 초청을 받아들이겠네.”
말을 마친 팽대위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급했는지 들고 있던 거도를 허공에 내팽개쳤다.
팽대위가 사라지자 거도가 연무장 바닥에 떨어졌다.
쨍!
청강석에 금속이 부딪히자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것은 마치 서원의 수업이 끝났을 때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광개에게 돌아왔다.
“유림 서원에 입학하기로 했네.”
“헉!”
광개가 비명을 토해 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쓴 방법은 간단해. 유림 서원의 초청장과 입학 허가증을 받고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서 들어가면 되지. 그럼 전서구는 이 년 동안 감사히 쓰도록 하지.”
한빈은 광개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 모습에 광개가 발끈했다.
“아니, 이건 약속이 틀리지 않나?”
“내가 분명히 나밖에 못 쓰는 방법이라고 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까지 충고를 했는데도 이렇게 나온다면 개방이 한 입으로 두말한다고…… 아니지, 생각해 보니 계약서까지 썼네.”
한빈이 계약서를 가리키자, 광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빈은 광개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화에게 걸어갔다.
설화는 한빈의 진지한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외쳤다.
“설화야, 짐 챙겨라!”
그 모습에 설화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청화도 설화를 따라 황급히 달려갔다.
갑자기 한빈과 설화 그리고 청하가 사라지자, 광개는 석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호에 산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유림 서원으로 간다고?”
그 말에 백미랑이 답했다.
“유림 서원에 가시는 게 아니라 들르는 거겠죠.”
“입학하면 육 년을 그곳에서 버텨야 하는데 어떻게 들른다는 표현을 씁니까?”
광개가 눈을 가늘게 뜨자 백미랑이 피식 웃었다.
“유림 서원은 자퇴가 자유롭잖아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곳이 유림 서원입니다. 광개 대협은 정보가 부족하시네요.”
“헉.”
광개는 한 방 맞았다는 표정으로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 * *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황궁에서 온 행렬이 하북팽가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은 하북팽가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병사들이 정렬해 있는 가운데, 강유찬과 서 태감이 천천히 앞쪽으로 나온다.
그들이 지나가자 병사들이 병기를 높이 들어 올린다.
마치 파도가 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장관이었다.
그들이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많은 무사가 에워싸고 있는 행렬의 중간에 있는 마차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효명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효명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개했다.
그 모습에 그녀의 시비인 조미가 말했다.
“공주 마마, 날이 찹니다.”
“햇볕이 이렇게 따사로운데 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조미.”
“달리는 마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차가울 수 있는 법이죠. 공주 마마의 몸은…….”
“아니야. 난 다 나았어. 난 조금이라도 신선 오라버니가 있는 곳을 더 보고 싶어.”
“그런데 신선이 진짜 하북팽가에 사나요?”
조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모시는 효명 공주는 마차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신선 타령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호위들에게 이곳에 사는 신선을 본 적이 있냐고 질문을 던지며 계속 닦달했다.
덕분에 호위들은 효명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효명은 계속 호위들을 닦달했다.
지금도 창문을 열자 호위들이 재빨리 멀찌감치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호위를 본 효명은 고개를 돌려 조미를 바라봤다.
“조미는 나 못 믿어? 진짜 하북팽가에 신선이 있다니까. 내 손을 잡고 구름 위를 막 걷는데…….”
효명은 아까 있었던 일을 조미에게 다시 늘어놓았다.
조미는 그냥 듣는 척만 했다.
구름 위를 걸었다고 한 것부터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효명의 착각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구름 위를 걸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착각은 어쩔 수 없었다.
효명을 이끌며 펼쳤던 상대의 경공이 너무 놀라웠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호위 하나가 마차로 달려왔다.
호위가 달려오자 효명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호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효명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하북팽가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혹시 신선…….”
“그게 아니고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유림 서원에 입학하신답니다.”
호위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호위가 돌아가자 효명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어떻게 하지.”
“뭐가요?”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유림 서원에 오면 좀 미안한데…….”
“뭐, 할 수 없죠.”
“그래도 내 생명을 구해 준 분인데, 헛걸음하게 하는 건 미안하잖아. 안 그래? 조미.”
“크흠.”
조미는 뭐라 할지 몰라 입을 막고 헛기침했다.
사실 지금 상황은 효명이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도 같았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정식으로 혼담이 오간 것도 아니고 서로 마음을 전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마저 마음이 변했다고 오늘부터는 신선 오라버니라니!
조미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효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유림 서원에 오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뭐라고요?”
“마음이 바뀌었다고 얘기는 해 줘야지.”
“아, 공주 마마.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아니야. 최소한의 사과는 해야 도리지.”
효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자, 조미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겨우 표정을 수습하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같은 시각 가주전으로 향한 한빈은 귀를 후볐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또 누가 내 얘기 하나 봐. 갑자기 귀가 근지럽네.”
“에이, 여기에서 공자님 얘기를 할 사람이…….”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래? 설화야.”
“생각해 보니 공자님 얘기를 안 할 사람이 여기에는 없잖아요. 온통 다 공자님 얘기인데.”
“그런가?”
한빈이 피식 웃자 청화도 한마디 거들었다.
“설화 언니 말이 맞아요. 지금 온통 다 공자님 얘기뿐이에요. 헤헤.”
그들은 웃음을 뒤로하고 재빨리 가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전 안쪽으로 들어서자 팽강위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한빈아, 일단 이리 앉아라.”
“네, 아버님.”
“너 때문에 가문의 위상을 높인 것은 좋으나 조금 심려되는 것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아버님.”
“네가 유림 서원으로 간다는 결심을 했을 때 나는 가주로서 뿌듯했다.”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유림 서원의 실상을 강유찬 대인에게 듣고 나니 많이 걱정되더구나.”
“걱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유림 서원의 특성상 그곳은 작은 황궁이라고 하더구나. 즉 정치적인 술수와 암계가 판을 치는 곳이지. 그런 곳에서 네가 해를 입을까 두렵구나.”
말을 마친 팽강위는 한빈을 바라봤다.
순간 부자 간에 마주친 시선.
한빈은 미소를 지었다.
팽강위가 저토록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미소에 팽강위는 뒤쪽을 바라봤다.
팽강위의 뒤쪽에서 무사가 기다란 상자를 들고 온다.
무사는 그것을 팽강위와 한빈이 마주 보고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탁.
팽강위는 상자를 슬쩍 한빈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가 맡아 두는 것이 맞겠구나.”
“이게 뭡니까? 아버님.”
한빈은 상자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허공에 떠 있는 용린검법이 반짝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