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59화 (459/621)
  • 459. 선묘도 (1)

    팽대위는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짝!

    그러고는 살짝 구겨진 봉투를 조심스럽게 펴기 시작했다.

    손에 뜨거운 진기를 조심스럽게 불어 넣고 쓱쓱 문지르는 모습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한빈은 팽대위의 저런 모습을 처음 봤다.

    예법하고는 담을 쌓은 것이 팽대위였다.

    거기에 더해 서류나 서찰 등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라면 멀리 던져두고 보는 것이 팽대위였다.

    그런데 저 봉투만은 정성을 다해 다림질까지 하고 있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숙부님, 대체 그게 뭡니까?”

    “…….”

    친근한 호칭에도 팽대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봉투를 빳빳하게 만드는 작업 중이었다.

    조금 과했는지 봉투가 칼날처럼 예기를 발했다.

    팽대위는 그제야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황궁에서 보내온 선물이라네.”

    “제게요?”

    한빈은 봉투와 팽대위를 번갈아 봤다.

    팽대위가 왜 그리 심혈을 기울여서 봉투를 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봉투를 전하라 했을 때는 무심코 품에 구겨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겨진 봉투를 보자 그것이 황제가 내린 물건이라는 게 기억난 것이 분명했다.

    봉투를 원상태로 만들기 위해 내공까지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팽대위는 흡족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아니면 누구겠나? 펴 보게.”

    봉투를 받은 한빈은 바로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위에서 아래까지 쓱 훑어봤다.

    “유림 서원이라고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유림 서원. 이건 우리 가문의 경사야, 경사.”

    “숙부님, 자, 잠시만요.”

    “왜 그러나?”

    “무림학관도 아니고 왜 유림 서원이란 말입니까? 제가 지금 거기에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게. 우리 팽가에서 관직에 나간 이가 있었는지?”

    “당연히 없었지요. 숙부님부터 책은 세 걸음 밖으로 놔주시지 않습니까?”

    “흠, 갑자기 내 얘기를 왜…….”

    “그리고 제가 이 나이에 글공부해서 언제 관직에 나갑니까? 그냥 관직을 준다면은 못 이기는 척 받겠지만요.”

    한빈의 말에 팽대위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는군. 잘 생각해 보니 관직을 줄 거면 그냥 주지, 왜 유림 서원에 입학을 하라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지금 가문에도 쌓인 일이 산더미인데, 제가 한가하게 글공부나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험.”

    팽대위는 한빈의 반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둘의 말싸움에 끼어들기 싫다는 듯 말이다.

    그때였다.

    한 줄기 바람이 한빈의 뺨을 스쳤다.

    휘익.

    한빈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왔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왜 거기에 꽁꽁 숨어 있나?”

    한빈의 말에 거무튀튀한 복장의 사내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타다닥.

    사내는 한빈의 앞에 멈춰 주변을 바라보다가 팽대위에게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팽 대협.”

    “오랜만이군, 광개.”

    “네, 사천에서 인사드린 후 정말 간만이죠.”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인가?”

    “팽 공자한테 긴히 전할 말이 있어 급하게 왔습니다.”

    광개의 말에 팽대위의 눈이 커졌다.

    광개가 다급히 전할 소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리 급하게 왔다는 것은 하북팽가에 또다시 광풍이 불어닥칠 수도 있다는 뜻.

    갑자기 굳어진 팽대위의 표정을 본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숙부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흠, 나는 그럼 잠시 여기서 기다릴 테니 편히 얘기 나누게.”

    팽대위는 병기 보관대에 있는 커다란 도 한 자루를 쥐고는 연무장 가운데로 나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팡, 팡.

    팽대위가 지금 펼치고 있는 도법은 다름 아닌 팽가의 절기 혼원벽력도였다.

    그의 성취는 거의 오 성에 다다랐다.

    글자는 멀리하고 칼을 가까이하는 그는 한빈이 복원해 낸 혼원벽력도를 본 이후 틈만 나면 수련에 매진하는 중이다.

    지금도 그냥 멍하니 한빈의 대답을 기다릴 수 없어서 수련하는 중이었다.

    사실 봉투만 전달하고 돌아가면 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림 서원의 초청장을 받게 되면 황궁에 보름 안에 답변을 주어야 한다.

    유림 서원의 정원은 황궁에서 관리하기에,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이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보름이지 여기에서 북경까지 밤새워 달려도 답변을 주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금의위와 동창이 돌아가기 전에 그들에게 답변을 쥐여 보내야 했다.

    이런 관례를 진행해야 하는 것은 접객당주의 소관이었다.

    문제는 그가 지금 손님들의 접대로 바쁘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팽대위는 이 귀찮은 임무를 맡았다.

    팽대위는 멀리 있는 한빈과 광개를 힐끔 보더니 다시 칼에 집중했다.

    슝, 슝.

    그는 거도에 내공을 잔뜩 담아 휘둘렀다.

    마치 그들의 대화는 일부러 안 듣겠다는 듯 말이다.

    광개는 연무장에서 혼원벽력도를 펼치는 팽대위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마디 했다.

    “역시 팽가의 혼원벽력도는 태산을 흔드는구려.”

    “광개, 괜히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본론부터 말해 주지?”

    “아, 그게…… 이건 비밀 이야기라서…….”

    광개는 경계하듯 옆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백미랑과 흑미랑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잠시 기 싸움이 펼쳐졌다.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

    개인적인 감정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개방과 하오문 사이의 기 싸움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백미랑이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뭔지는 몰라도 개방이 아는 것은 우리 하오문도 알아요. 괜한 생색내다가 창피당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말해요, 광개 대협.”

    대협이라고는 칭했지만, 아랫사람 보듯 깔아 보는 듯한 백미랑의 표정에 광개가 발끈했다.

    “지금 무슨 말이오? 우리 개방은 그런 허접스러운 정보는 취급하지 않소.”

    “우리 정보가 허접하다고요?”

    “흠, 그 말은 미안하오. 하오문의 정보가 허접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 개방의 정보가 우월할 뿐인데…….”

    “잠깐만요.”

    백미랑은 광개의 말을 끊고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그렇게 발끈하는 것을 보면 내 말이 맞는가 보군.”

    “지난번에 팽 공자님에게 줬던 하북의 정보는 모두 하오문에서 나온 게 아닌가요? 성문이 봉쇄되었을 때는 거지들도 어쩔 수 없었잖아요.”

    “거지라…….”

    광개의 이마에 지렁이가 꿈틀댔다.

    그 모습에 백미랑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입에 붙었네요.”

    “뭐, 상관없소. 이거 하나만 물어보리다.”

    “말씀하시지요.”

    “혹시 천수현갑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소?”

    “천수현갑이라면…….”

    살짝 말끝을 흐리는 백미랑.

    순간 옆에서 대화를 방관하던 한빈이 눈을 반짝였다.

    천수현갑은 무림 칠대기보 하나였다.

    천수현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 효능은 후세에 전해지고 있었다.

    천수현갑(千壽玄甲)은 무기가 아닌 갑옷이었다.

    그 갑옷을 입으면 목숨이 천 개로 늘어난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보물이었다.

    천수현갑의 재료는 전설상의 신수인 현무의 등껍질이라고 하지만, 본 사람이 없어 그 진위를 따질 수는 없었다.

    사실 한빈은 사천당가에서 떠나오며 백미랑과 광개에게 앞으로 찾아야 할 무림 칠대기보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용린과 만월은 이미 한빈의 손에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개.

    그 남은 다섯 개 중 하나의 이름이 광개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때 광개가 어깨를 쫙 펴고는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 같군요.”

    “…….”

    “개방은 천수현갑에 대한 정보를 바로 오늘 아침에 입수했소.”

    말을 끊은 광개는 주변을 쓱 훑어봤다.

    마치 물건의 값을 올리려는 장사꾼같이 눈을 빛내는 광개.

    한빈은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짝!

    그 소리에 광개가 억울한 듯 한빈을 바라봤다.

    “팽 공자! 왜 그러시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게 어때?”

    “흠.”

    “어차피 내가 알면 여기 있는 백 소저와 흑 소저도 알 텐데 그냥 편하게 털어놓지?”

    “이건 고급 정보인데…….”

    광개가 살짝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재빨리 보따리를 들고 왔다.

    설화는 보따리를 한빈 앞에 놓더니 천천히 풀었다.

    살짝 풀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문서.

    한빈은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계약서가 어디 있더라?”

    순간 광개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말하면 되지 않나? 팽 공자.”

    광개가 이렇게 당황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한빈과 맺은 불공정 계약서 때문이었다.

    당황한 광개의 모습에 백미랑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개방의 광개가 당하는 모습이 백미랑에게는 시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재미있다는 듯 광개를 바라보던 백미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황하던 광개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백미랑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물론 광개가 웃는 이유는 백미랑이 한빈과 맺은 계약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빈이 헛기침하며 재촉했다.

    “흠, 일단 본론부터 말하지.”

    “알았네, 팽 공자. 우리가 알아낸 정보는 천수현갑이 있는 위치를 적어 놓은 지도가 있다는 것일세.”

    “지도라고? 그럼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장보도가 있다는 건가? 천수현갑에 관한 장보도는 처음 들어 보는데…….”

    “팽 공자가 들었다면 어찌 고급 정보라 할 수 있겠나?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냥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네.”

    “지도가 아니라면?”

    “선묘도라는 그림이 바로 천수현갑의 위치를 품고 있다네.”

    “오호, 그럼 선묘도는 어디 있는데?”

    “이건 진짜 비밀인데……. 선묘도는 바로 유림 서원이란 곳에 있다네.”

    “개방에는 고수가 많은데, 왜 선묘도를 손에 못 넣은 거지?”

    “유림 서원은 경비가 삼엄해서 무림 고수도 발을 끊은 곳이라네. 설사 담장을 넘는다고 해도 신분이 들통나는 날에는 아마 중원을 떠야 할 것이네.”

    “유림 서원과 선묘도라…….”

    “내 하나 충고하지.”

    “하나 말고 더 말해도 되니까 편하게 말해 보라고, 광개 대협.”

    한빈이 대협이란 호칭을 붙이자 광개의 눈썹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험, 내 충고는 간단하네. 절대 유림 서원에 몰래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게. 설령 들어간다 해도 나오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을 걸세.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익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일세.”

    “꼭 시험해 본 사람 같군.”

    “흠.”

    슬쩍 헛기침하는 광개를 본 한빈이 말했다.

    “보아하니 실험해 본 게 분명해. 혹시 사부님이…….”

    “험.”

    다시 헛기침하는 광개를 본 한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았어. 더는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군. 그럼 유림 서원에 가서 선묘도만 찾으면 간단하게 끝나는 일이군.”

    “허허, 내가 몰래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버럭 소리치는 광개의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언제 담장을 넘는다고 했지? 나는 정문으로 들어갈 거라 걱정 안 해도 돼. 광개 대협.”

    “어라! 정문으로 들어간다고?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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