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55화 (455/621)
  • 455. 위국(爲國) (6)

    가주 앞에 선 무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가주님, 어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황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지금 황궁이라 했느냐?”

    팽강위의 눈썹이 꿈틀댔다.

    황궁에서 성지가 내려온다면, 분명히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일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항상 상보다는 벌에 관한 결정이 빠른 것이 일반적인 황궁의 정치판이었기 때문이다.

    하북성을 안정화한 공에 대한 상이 벌써 나올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하북팽가에 예상치 못한 화가 닥칠 수도 있었다.

    경비 무사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안내하거라.”

    “그게……. 벌써 이 앞에 도착했을 겁니다. 동창의 서 태감이란 분과 가주님께서도 아시는 금의위의 강유찬 대인이십니다. 두 분이 어찌나 급하게 오시는지.”

    “서 태감이라…….”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팽강위였다.

    팽강위는 한빈을 슬그머니 바라보며 눈짓했다.

    혹시 아는 것이 있느냐는 뜻이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을 대신했다.

    * * *

    가주전 밖으로 나간 팽강위는 동창과 금의위의 행렬에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뒤쪽의 가마였다.

    짐꾼 넷이 메고 있는 가마는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져 있었는데, 그 위쪽이 불룩 튀어나온 상태였다.

    그 모양은 마치 개작두 같았다.

    팽강위는 동창과 금의위 무사들의 안색을 살폈다.

    모두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뭔가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진 것 같았다.

    “대체…….”

    팽강위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팽강위는 재빨리 강유찬이 들고 있는 금빛 두루마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성지를 받듭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팽강위가 예를 취하자 뒤쪽에 있던 팽가의 식솔들이 똑같이 따라 예를 취한다.

    만세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가주전 앞을 울리자 강유찬은 헛기침하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흠, 지금부터 폐하의 성지를 전하오니…….”

    강유찬은 성지를 읽어 나갔다.

    초반에는 황궁의 학사가 지은 것처럼 보이는 영혼 없는 문장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어찌나 문장이 긴지 성지를 읽던 강유찬마저 내심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읽어 나가던 강유찬이 눈을 반짝였다.

    “하북의 팽가에게 위국의 칭호를 하사하노니, 이는 만백성을 위한 공로와 나라를 음해하려는 세력을 막은 공로로…….”

    한 단어에 팽강위가 눈을 크게 떴다.

    무림세가가 받을 수 있는 칭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 번째가 수국(守國)이다.

    수국은 적이 침입해 왔을 때 의용군을 보내는 가문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하북팽가는 이백 년 전에 이 칭호를 받았었다.

    하북팽가는 본래 하북이 아니었다.

    원래는 강남에 자리 잡은 무림세가였다.

    하지만 북쪽에서 밀려들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가주를 비롯한 식솔들이 모두 강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팽가는 수국의 칭호를 받고 하북 땅에 집과 기틀을 마련할 자금을 지원받았었다.

    수국의 칭호가 지금의 하북팽가를 있게 해 준 원동력이라고 보면 된다.

    보국(保國)은 수국의 칭호보다 한 단계 높다.

    보국의 칭호를 받는 기준은 희생이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자가 가문에서 열 명이 넘으면 보국이라는 칭호를 하사한다.

    즉 가문에 멸문지화에 이를 정도로 희생을 해야 내려 주는 칭호였다.

    물론 그 칭호에 따른 지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가문이 다시 일어설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다음이 위국의 칭호였다.

    이 칭호를 받은 가문은 무림세가 중에는 딱 한 곳이었다.

    그곳이 바로 산서의 신창양가였다.

    신창양가는 누구나 인정하는 뼛속까지 충신 가문이었다.

    신창양가를 제외하고 위국의 칭호를 받은 가문은 모두 개국공신이었다.

    위국의 칭호를 받은 가문은 곧 왕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

    위국의 칭호를 받은 가문을 공격하는 일은 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다.

    팽강위의 눈은 한계까지 커졌다.

    그때 다시 강유찬의 말이 이어졌다.

    “팽가의 사 공자와 그의 스승인 적룡대협 그리고 청운사신에게는 별로도 상을 내리는 바이이니…….”

    순간 팽강위의 눈은 더욱 커졌다.

    사실 팽강위가 한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성지에까지 거론되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물론 걱정이 아닌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생긴 현기증이었다.

    그때 강유찬이 황금빛 두루마리를 접었다.

    탁.

    그러고는 그 두루마리를 팽강위에게 전했다.

    무릎을 꿇은 채 팽강위는 그 두루마리를 공손히 받았다.

    뒤쪽에 있던 집법당주 팽대위가 재빨리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미리 준비된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집법당주 팽대위가 성지를 보관함에 넣고 뚜껑을 닫자, 팽강위는 그제야 일어났다.

    그때 강유찬의 옆에 있던 서 태감이 뒤를 보며 턱짓한다.

    동시에 네 명의 가마꾼이 거대한 물건을 가지고 앞으로 나온다.

    그들이 멈춰 서자 강유찬은 붉은색 비단을 걷어 냈다.

    휘리릭.

    비단을 걷어 내자 안쪽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색 현판이 나왔다.

    그곳에는 ‘위국(爲國)’이라는 글자가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판을 본 팽강위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위국이라는 글자는 황제가 직접 쓴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도 일단은 한 번 더 예를 차리는 것이 맞았다.

    그 후 황궁에서 나온 이들은 가주전에 위국이란 현판을 직접 달아 주었다.

    모든 것은 궁중의 법도에 따랐기에 이 과정은 두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강유찬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팽강위에게 가볍게 포권했다.

    “휴, 황궁의 예법이 엄격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주님.”

    “아닙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라 얼떨떨할 뿐입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죠.”

    “네, 나머지 이야기는 안에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팽강위가 손을 들어 접객실 방향을 가리켰다.

    * * *

    잠시 후, 접객실에서 대강의 상황을 듣고 난 팽강위는 눈을 크게 떴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위국의 칭호가 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

    위국의 칭호를 받기까지 일어난 일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것은 동창과 관련된 일이었다.

    동창은 위상호와 이어진 끈을 끊기 위해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것은 이번 사건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왜곡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사건을 줄여서 은폐하거나, 사건을 부풀려서 몇십 배 더 큰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는 몇백 년간 흠집 하나 없던 만근교가 끊어졌다는 점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사건을 은폐하는 것은 물 건너갔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사건을 부풀렸다.

    나라가 뒤집힐 위험을 무림세가가 막은 일로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하북에서 중원 전역으로 일이 부풀려진 것이다.

    그 후 그들은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빛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나라를 구한 무림세가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무림세가가 앞장서서 나라의 위험을 막고, 그 뒤를 금의위와 동창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이 합의 과정에서 금의위는 동창의 약점 하나를 받았다고 한다.

    설명을 듣던 팽강위는 연신 탄성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우물 안의 개구리라더니 우리 팽가가 딱 그 꼴인가 싶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주.”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큰일이 오갔다는 것은……. 흠, 이번에는 복이었지만, 흉도 소리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좋게 생각하십시오. 위국의 칭호를 받은 이상 하북팽가를 건드릴 사람은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강유찬은 뒤를 돌아봤다.

    뒤쪽에 있던 금의위 무사 둘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탁. 탁.

    두 번의 소리가 들리자 두 자루의 검이 나란히 놓였다.

    난데없는 상황에 팽강위의 표정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이것은 흉인지 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

    강유찬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것은 폐하께서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에게 내린 상입니다.”

    “이걸 왜 제게…….”

    “사 공자에게 전하면 알아서 할 겁니다.”

    강유찬이 피식 웃었다.

    그도 황궁에서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을 설명하기까지 참 난감했다.

    강유찬은 한빈에게 설명을 들은 덕분에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둘만의 비밀이었다.

    황궁에서 이것을 말하는 순간 초점이 흐려진다.

    혼란의 시기에는 영웅이 나와야 하는 법.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황제도 원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 때문에 황궁의 관리들은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들의 전인인 사 공자에게 이 상을 전하는 것이었다.

    강유찬의 표정을 본 팽강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두 자루의 검은 대체 뭡니까? 대인.”

    “가주님, 놀라지 마십시오. ……혹시 말입니다. 청사검과 적사검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혹시 삼황오제 시절에 명검이라 불리던…….”

    “네, 맞습니다. 진사쌍검이라고도 불리죠. 무림인이 말하는 무림칠대 기보에 속하는 물건입니다.”

    “허.”

    팽강위가 헛숨을 터뜨리자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아직 놀라기에는 이릅니다.”

    말을 마친 강유찬은 품에서 슬쩍 봉투를 꺼냈다.

    강유찬은 그 봉투를 팽강위 앞에 놓았다.

    팽강위가 봉투를 잡고는 뻘쭘한 표정으로 강유찬을 바라봤다.

    이것을 누구에게 전하라는 건지 열어 보라는 건지 몰라서였다.

    황궁이 아니라 다른 집단이라면 그냥 속 시원히 까 봤을 팽강위였다.

    하지만 예법에 살고 예법에 죽는 것이 황궁 아니던가?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잔칫날 재를 뿌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팽강위는 신중했다.

    그때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그 서찰에 있는 것이 사 공자에 대한 상입니다. 지금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네, 그러지요.”

    팽강위는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며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만근교를 팽가교로 바꾼다라…….”

    “거기 적힌 대로입니다. 폐하께서는 만근이 아닌 백만 근이 견딜 수 있도록 다시 다리를 세우라 명하셨고 그 이름을 팽가의 이름을 따서 팽가교라 칭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같이 둘째가 바로 황제께서 내린 ‘위룡’이라는 별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말을 잇던 강유찬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 상은 자신이 봐도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림 서원에 대한 입학 허가증이었다.

    무사들의 세계를 무림이라 한다면, 유학자들의 세계를 흔히 유림이라 칭한다.

    여기서 유림 서원이란 황실의 보호 아래 문, 무를 모두 겸비한 인재를 길러 내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현재 최고의 유학 기관이 바로 유림 서원이었다.

    황궁에서 출세하려면 유림 서원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었다.

    황족에서부터 고위 관료의 자제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모든 권력자의 자제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유학자들은 들어가도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관직에 진출하려는 자에게는 약속된 땅이라고 해야 했다.

    그 외에 유림 서원에 입학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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