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54화 (454/621)

454. 위국(爲國) (5)

한빈의 질문에 팽강위가 되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알고 있느냐?”

“그것은…….”

“비밀이겠지.”

한빈을 바라보는 팽강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말투도 어른스러워졌구나.”

“흠.”

한빈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환골탈태 이후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개를 돌린 것은 아니었다.

가족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모두 밝힐 수는 없었다.

개방과 하오문과의 관계, 그리고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 한빈 자신이라는 것 등 아직 그의 아비가 모르는 비밀은 많았다.

그때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그건 호패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북팽가의 실수가 세월을 따라 날아온 것이다.”

“하북팽가의 실수라니요?”

“내가 어렸을 적 영단산을 지나갈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팽강위는 살짝 고개를 올리며 회상에 잠긴 듯 설명을 이어 나갔다.

팽강위가 어릴 적, 당시 가주를 따라 상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산적 무리와 부딪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산적을 소탕하는 도중 일반 백성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던 한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버님, 그렇다면……. 그 증거가 바로 호패입니까? 어떻게 호패 하나로 하북팽가가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북팽가의 도법이 썰고 지나간 흔적 때문이다.”

“호패에 그 흔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 토막이 난 호패는 분명히 하북팽가의 칼에 의해 잘린 것이었다. 그 호패의 주인이 바로 천리 표국주의 동생이었다고…….”

팽강위를 슬쩍 말끝을 흐렸다.

천리 표국주와는 경쟁자이면서 둘도 없는 친우였다.

과거의 은원으로 이렇게 얽히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한숨을 쉬던 팽강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막내 한빈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을 숨기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옆에 있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면 불이라도 붙을 것 같았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자는 조금 전 팽강위가 한빈으로 착각했던 이무명이었다.

정작 이무명은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비록 아들이지만, 지금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가주와의 대화였다.

공을 세우고 귀환한 무사였지만, 가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팽강위는 묘한 분위기에 헛기침했다.

“흠.”

그 소리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무슨 일이냐? 불편한 일이 있다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한빈은 고개를 돌려 이무명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의 무복을 잡았다.

한빈은 이무명의 목덜미와 상의 사이로 손을 넣었다.

순간 가주전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사, 사 공자님이 지금 무슨 짓을…….”

“저런 해괴한 취미가 있었나?”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그래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러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망측하구먼.”

어떤 이는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한빈의 행동은 연인에게 하는 표현과 비슷해 보였다.

물론 가장 당황한 것은 이무명이었다.

“주군, 지금 무슨 짓입니까?”

“이 호위, 잠시만!”

한빈은 짧게 답하고 그의 목에서 손을 뗐다.

한빈의 손에는 이무명이 목숨처럼 여기는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목걸이에는 가죽 덮개가 매달려 있었다.

이무명은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소리쳤다.

“주군! 그건 제 생명과도 같은…….”

이무명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그의 마혈을 찍었기 때문이다.

픽.

한빈이 슬쩍 눈짓하자 설화와 청화가 이무명을 부축했다.

한빈은 이무명에게 빼앗은 목걸이를 들어 팽강위에게 보여 줬다.

그 모습에 마혈을 제압당한 이무명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팽강위도 난데없는 상황에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지금의 행동은 공을 세운 막내라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가주전에 모인 원로와 각주 들도 술렁였다.

“지금 저게 무슨 짓이야?”

“누가 사 공자를 끌어내야 하지 않나?”

“집법당주는 어디 있지?”

모두의 시선이 집법당주 팽대위에게 몰렸다.

하지만 팽대위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오히려 팽대위는 턱짓하며 다른 이들의 섣부른 행동을 말리고 있었다.

팽대위는 한빈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막내는 황당하기는 해도 이유 없이 일을 벌이는 법이 없었다.

팽대위는 빨리 결론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한빈은 목걸이에 붙어 있던 가죽 덮개를 벗겨 냈다.

덮개를 벗기자 목걸이에는 볼품없는 나무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한빈은 그것을 팽강위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혹시 이것과 같은 하북팽가의 도법이었습니까?”

“…….”

팽강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떨리는 눈빛만이 그의 심정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팽강위는 재빨리 목걸이를 낚아챘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목걸이를 살폈다.

목걸이는 분명 호패였다.

이 호패는 이(李)라는 글자 아래가 사선으로 잘려 있었다.

단면을 보면 하북팽가의 도법으로 잘린 것이 맞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리 표국주 이세명이 보여 준 반쪽짜리 호패와 잘린 부분이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이 호패와 그 당시 봤던 반쪽짜리 호패를 합치면 온전한 호패가 될 것이 분명했다.

팽강위는 지금 이 호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북팽가가 천리 표국주 이세명의 동생을 죽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지.

아니면 그것을 반박하는 증거일지는 오직 막내만이 알고 있었다.

팽강위는 목걸이를 다시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목걸이를 받아 들고 조용히 이무명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다시 그 목걸이를 걸어 줬다.

목걸이가 돌아오자 이글이글 타올랐던 이무명의 눈빛도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도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팽강위의 눈빛을 보면 자신이 생명처럼 아끼는 목걸이가 이들에게도 중요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라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웅성거리던 이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빈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오직 한빈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자 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반쪽짜리 호패를 이 호위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

“이 호패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호위는 이 호패를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몸에서 떼 놓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한빈이 이무명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모두를 바라봤다.

모두의 목울대가 동시에 꿀렁인다.

마치 모이를 기다리는 비둘기처럼 진실을 갈구하는 원로와 당주 들.

한빈은 그들에게 선심을 쓴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이무명 무사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무명 무사는 어릴 적 기억 중 일부분을 잃었습니다. 그렇죠? 이 호위?”

한빈은 이무명을 바라봤다.

이무명은 한빈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무명은 지금 한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한빈이 하는 말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상황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었다.

이무명이 눈을 깜빡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무명 무사가 기억을 잃은 이유는 어릴 적 겪었던 충격 때문입니다. 기억을 잃고 쓰러졌던 이 호위를 구해 준 것이 바로 하남정가이고요. 여기서부터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호위, 이제 일어나 보게.”

한빈의 말에 이무명은 눈만 깜빡였다.

마혈과 아혈을 동시에 제압해 놓고 일어나라는 건 또 무슨 발상이던가?

이무명은 가끔 야속하게 구는 한빈이 미웠다.

그때였다.

설화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자님, 점혈은 풀어 주셔야죠.”

“아, 그렇군.”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썼다.

픽.

순간 이무명이 굵직한 한숨을 뱉어 냈다.

“휴.”

그러고는 일어나서 한빈에게 한 발 다가왔다.

“주군,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 호위가 내게 해 준 말이었고. 하남정가가 이 호위를 발견한 것이 어디라고 했지?”

“영단산 절벽 아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하북팽가가 산적을 소탕했던 곳이자 천리 표국주가 동생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네.”

“그렇다면…….”

“뭐, 천리 표국주를 만나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자네가…….”

한빈은 말을 맺지 않았다.

그것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란 때문이었다.

본래 출생의 비밀이란 것은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거기에 지금 살짝 밝혀진 가능성은 하북팽가와 천리 표국의 대립 관계를 단번에 녹일 수 있는 실마리였다.

그때 팽강위가 이무명에게 한 발 다가왔다.

“내가 천리 표국주를 만나 이 일을 소상히 밝힐 것이네. 만약 섣불리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눴다면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길 뻔했네.”

“감사합니다, 가주님. 표국주님을 만나는 자리에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내가 자리를 마련하겠네. 하지만 시일이 조금 걸릴 것일세.”

“아, 혹시 천리 표국에 무슨 일이라도…….”

“우리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였네, 갑자기 황궁으로부터 명이 내려왔네.”

“황궁이라니요?”

“황국의 현비 마마께서 천리 표국주에게 북해빙궁으로 보낼 표물을 호송하라는 서찰을 보내왔네. 말이 부탁이지 황궁의 지엄한 명이었다. 덕분에 충돌할 일은 없었지.”

“다행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시점에서 황궁의 명이 떨어졌네…….”

팽강위는 조용히 가주전 밖을 바라봤다.

그곳은 황궁이 있는 북경 방향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한빈에게 집중되었다.

이 자리는 한빈의 공로를 칭찬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공을 세운 것이다.

한빈을 바라보는 이들 중 가장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이는 물론 이무명이었다.

이무명은 지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출생의 비밀에 한발 다가섰다는 희열보다는 한빈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이무명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주군, 대체 당신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빈은 허허롭게 허공을 바라봤다.

마치 득도한 도인과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용린검법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린검법 실력편의 확장이었다.

실력편이 확장되면 기본 구결이 늘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조금 더 많은 천급 초식을 수집해야 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꼴이 될 것이었다.

독고진을 기습했던 의문의 인물은 그만큼 고강했다.

모두가 조용히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주전으로 경비 무사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타다닥.

가주와 원로 그리고 당주 등 하북팽가의 중심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비 무사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곧바로 가주 팽강위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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