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53화 (453/621)

453. 위국(爲國) (4)

한빈은 계속 독고진의 상태를 살폈다.

돌처럼 굳었던 한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독고진의 혈색도 조금씩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독고진.

옆에 서 있던 청화는 마른침만 삼켰다.

청화도 마찬가지였다.

공독지체가 만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도움으로 공독지체를 이루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가?

그중에는 청화의 할아버지인 당무천을 구한 사건도 있었다.

덕분에 자신이 출생을 알게 되었고 어릴 적 헤어졌던 가족까지 찾았다.

한빈이 준 은혜는 다음 생까지 갚아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청화는 그게 한스러웠다.

청화는 힐끔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의 눈빛도 떨리고 있다.

시선이 마주치자 설화가 청화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청화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청화는 핏줄로 이어진 가족은 당문이지만, 정으로 이어진 가족은 한빈과 설화라 생각했다.

설화와 청화가 따뜻한 시선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독고진이 굵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흐아.”

“괜찮으십니까? 독고 대협.”

한빈의 말에도 독고진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 파랗게 변했던 입술이 붉은색을 찾았다.

순간 독고진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타올랐다.

그와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팽 공자, 고맙네.”

“정신이 돌아오셨군요, 독고 대협.”

“정신은 멀쩡했던 걸 알지 않았나?”

“네, 알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생명을 빚졌군. 자네는 사파의 영웅일세.”

“하하.”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파인 자신이 사파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사파의 영웅이 될 때는 적룡대협으로 변장했을 때뿐이었다.

한빈은 뭔가 기억났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독고진의 눈동자는 아직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련주님을 이렇게 만든 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한빈은 대협이라는 칭호 대신 련주라고 불렀다.

그 칭호에 독고진은 눈빛에서 분노를 거두었다.

대협이라고 불렸을 때는 한 명의 무인이지만, 련주라고 불리는 순간 그는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수장이 된다.

그러니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했다.

잠시 뭔가를 떠올리던 독고진이 말을 이었다.

“모른다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빙공에 당했다면 상대와 격돌이 있었을 테고…….”

한빈은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독고진은 한빈의 말을 끊었다.

“기습을 당했다네.”

“어떻게 대협이 기습을 당할 수 있습니까?”

한빈이 독고진을 부르는 호칭이 다시 대협으로 돌아왔다.

그가 감정을 수습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만큼 은밀하고 무림삼존만큼 강대했다네.”

독고진의 눈이 강가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기가 찼다.

한빈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와 대결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겨 놓고 강자와의 만남을 갈구하는 저 모습은 진정한 사파제일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한빈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나는 강자는 절대 사양이었다.

강자와의 대결을 통해서 강해진다는 것은 전부 헛소리였다.

철저한 준비만이 강자를 꺾을 수 있었다.

지금 문제는 상대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뭔가를 떠올린 한빈은 다시 물었다.

“위상호의 식솔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소리만 들었다네. 그들의 발소리를 들어 보면 강가로 갔을 것이네.”

“강가라면…….”

상황이 대충 한빈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표정을 본 독고진이 물었다.

“자넨 짚이는 일이라도 있는 표정이군.”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곳을 지나는 선박을 봤습니다.”

“흠, 그곳에 나를 기습한 자가 타고 있겠군.”

“눈처럼 하얀 배였습니다.”

“그런 배를 여기에 띄운다고?”

독고련의 눈이 커졌다.

위상호의 식솔을 데려갔다는 것 자체가 은밀한 임무였다.

그런데 눈에 띄는 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고진의 표정을 본 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협, 한 가지만 말해 주십시오.”

“뭐든 물어보게.”

“대협을 제압한 초식이 몇 수였습니까?”

“단 한 수였다네. 내 등을 격중하는 그의 일장에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네.”

“대협을 공격한 수단이 장법이라 확신하시는 이유는요?”

“상처가 없지 않은가? 이게 내가중수법의 특징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지 않은가?”

독고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한빈이 답했다.

“대협의 말씀이 맞습니다.”

“허허.”

독고진이 멋쩍게 웃었다.

독고진에게는 더는 정보를 캐낼 것이 없자 한빈은 고개를 돌려 하얀색 배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곳은 북쪽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아른거렸다.

한빈은 잠시 눈을 감고 그 단어에 집중했다.

분명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인데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올챙이처럼 획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한빈은 희미하게 보이는 단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빈은 재빨리 실력편의 ‘안(眼)’을 사용했다.

안을 떠올리자 흐물거리던 글자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그것은 두 글자였다.

백경(白鯨).

“백경이라…….”

한빈의 혼잣말에 독고진이 물었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제가 봤던 배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그 배의 이름이 백경이라는 말인가? 그런데 백경이라면 전설의 배가 아닌가?”

“네, 맞습니다. 등선해서 신선이 되면 하늘 위로는 구름을 타고 다니고 강물 위로는 백경을 타고 다닌다는 전설이 있죠. 저리 티끌 한 점 없이 하얀 배를 보면 분명 백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든 힘을 다 쏟아 그들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겠네, 동생.”

“동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협.”

“사파를 구하고 내 목숨까지 구했으면 형제의 연을 맺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형제의 연이라면…….”

“싫은가?”

“그건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한빈은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십대세가와 강남 사도련의 새로운 협약으로 정파와 사파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둘이 의형제를 맺는 데 명분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다음 살펴볼 것이 이익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한빈은 돌아서서 사람 좋은 얼굴로 독고진을 바라봤다.

한빈의 표정을 본 독고진이 말했다.

“표정을 보니 결심을 한 게군.”

“네, 당연히 저야 좋지만, 배분이 꼬일까 봐 조금 걱정했습니다.”

“허허, 무인 간의 연을 어찌 배분 같은 형식적인 논리로 따질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걱정 하지 말게.”

“네.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돌아가는 대로 술잔을 마주하고 형제의 예를 갖추도록 하게.”

“지금 여기서도 가능합니다.”

“허허, 여전히 성질은 급하군. 그런데 준비를…….”

독고진은 살짝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이 오른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독고진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한 걸음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보따리 하나를 내려놨다.

그 모습에 독고진이 놀라 물었다.

“이게 뭔가? 혹시 약이라면 나는 이제 괜찮네.”

“약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곳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독고진은 자신도 모르게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는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독고진은 입을 한계까지 벌렸다.

지금 한빈 일행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후 이곳으로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정신이 있어 저 보따리를 가지고 온단 말인가?

독고진은 묵묵히 먹을 갈고 있는 설화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소리에 설화가 조용히 독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님이 계약서는 목숨만큼 소중한 거라고 하셔서요. 헤헤.”

해맑게 웃는 설화 모습에 마주 웃던 독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때 한빈이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것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형님.”

“편히 말하게, 동생.”

“저는 홍칠개 사부님과 사제의 연을 맺을 때도 계약서를 썼습니다.”

“음, 나도 그 소문을 들었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저는 형제의 연도 주군과 사부 그리고 부모의 연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그러니 당연히 계약서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제자와 계약서로 사부의 관계를 확인했다고 한다면 형제의 관계도 계약서를 쓰는 것이 타당하군. 좋네.”

먹을 다 간 설화는 그들의 대화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한빈만 만나면 모든 이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설화는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자신도 한빈과 계약했다는 것은 떠올리지 못했다.

* * *

며칠 후, 하북팽가의 가주전.

팽강위는 한빈 일행을 평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한 눈빛과는 달리,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존재도 신경 쓰지 않았던 막내가 이렇게 강호를 들었다 놨다 할 줄은 몰랐었다.

사천당가에서의 일이 엊그제인데 하북의 혼란을 잠재운 것도 막내였다.

사실 사천에 다녀오면 가주로서 상이라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문에서 상을 내리기에는 막내의 존재가 너무 커졌다.

하북의 가장 큰 문제였던 식량난도 막내가 해결했다.

며칠 전 철저히 봉쇄당한 하북성에 식량을 들여온 것은 실로 기가 막혔다.

식량 위에 개똥초를 뒤덮어 들여오는 바람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팽강위는 그 식량을 하북팽가가 관리하는 상단을 통해 유통했다.

덕분에 하북성주와 그 휘하 관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인사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북팽가는 이익은 이익대로 얻고 명성까지 떨치게 되었다.

감정을 숨긴 채 막내를 격려하려던 팽강위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빈에게 다가갔다.

쿵. 쿵.

자신이 내공을 실어 걷는다는 것도 모른 채 팽강위는 막내를 향해 걸어갔다.

모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곳에 이제 한빈의 적은 없었다.

정화 부인이 나간 후 파벌은 없어지고 가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가문이 되었다.

팽강위는 이 모든 것이 막내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빈아!”

막내의 이름을 부르며 꼭 끌어안은 팽강위.

그것도 잠시 팽강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첫째는 주변의 반응이요.

둘째는 막내의 표정이었다.

팽강위는 끌어안은 팔을 풀고는 막내를 바라봤다.

어찌할 줄 모르며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막내가 바라보는 곳에 있는 무사 하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아버님, 제가 한빈입니다.”

“…….”

팽강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는 제 호위인 이무명입니다. 중간에 깨달음을 얻어 제 모습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한빈의 말에 팽강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혹시 환골탈태라도…….”

“아버님, 그보다 먼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천리 표국과의 대립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모든 것이 호패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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