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위국(爲國) (3)
한빈이 뛰어오른 나무는 그만큼 높았다.
나무 위에서 한 발로 중심을 잡은 한빈은 잠시 숨을 골랐다.
“휴.”
위상호와의 결전에서 모든 내공을 쏟아부은 덕분에 한빈은 지금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결전을 통한 소득은 차고도 넘쳤다.
단순하게 승리했다 같은 보상은 아니었다.
한빈은 자신이 이번 결전을 통해 더욱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공의 경지가 아닌 정신적인 성숙함이었다.
사실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이 몰릴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위상호의 무공을 상대해 보니 벼랑 끝에 몰린 것은 도리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천급 구결이 그때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만근교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은 한빈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절대적인 무공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적은 힘으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병법이라도 익혀야 하나!”
한빈은 혼잣말을 뱉었다.
지금 만근교 위에 있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까무러칠 정도의 말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진심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지혜가 모자란다는 것을 느꼈다.
얄팍한 책략은 귀검대의 대주로 있으면서 넘치게 채웠지만, 지혜라는 부분에서는 아직 부족했다.
그때였다.
용린검법이 반짝이며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용린의 주인은 강호에 흩어진 지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무공이 아니라 지혜를 어떻게 얻는다는 말이냐?
구결이 무림인에게 보이니, 지혜는 유생들에게 보이는 건가?
한빈의 질문에도 용린검법은 답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빈이 읽은 글귀가 사라질 뿐이었다.
사실 지금은 독고진이 남긴 흔적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한빈은 다시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삭.
한빈이 향한 곳은 경락산의 꼭대기였다.
경락산의 정상에 오른 한빈은 조용히 석탑을 올려다봤다.
이 높은 곳에 구층석탑을 어떻게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락산의 꼭대기에는 만포대라 불리는 구층석탑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만포대는 부처님의 눈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구층석탑의 꼭대기를 보면 모든 중생을 포용하는 부처님의 눈이 두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만포대가 비추기 때문에 경락산 아래에 흐르는 강이 그렇게 맑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한빈은 만포대의 앞에서 잠시 합장했다.
“부처님, 죄송하지만, 소생이 급해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한 번에 뛰어 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탑 꼭대기에 올라간 한빈은 슬쩍 몸을 그늘 속에 숨겼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자가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었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한참을 살피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은 이곳으로 오며 후각을 집중해서 독고진의 흔적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한빈의 후각으로도 독고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비가 온 흔적도 없고 바람도 그다지 세게 불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흔적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였다.
경락산 아래를 흐르는 샛강 사이로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한 배가 지나간다.
어찌나 하얀지 눈덩이가 물 위에 떠다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배의 모든 곳이 하얀색이었다.
심지어는 먼지바람에 오염돼야 했을 돛마저도 하얀색이었다.
하얀색 돛은 볼을 부풀린 것처럼 바람을 안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저런 배는 전생에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마교?
마교는 절대 아니었다.
마교라면 신물이 나게 싸웠으니 저런 배가 있었다면 전생에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순간 한빈의 심장이 뛰었다.
묘하게 엄습해 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탑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샛강이 흐르는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저 정도의 배를 댈 곳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강가로 이동한 한빈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녹색 무복의 무인이 자갈밭에 쓰러져 있었다.
한빈이 보기에 그는 다름 아닌 독고진이었다.
강남 사파의 절대자가 저리 쓰러져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한빈은 황급히 뛰어갔다.
한빈은 엎드려 있는 독고진을 재빨리 뒤집었다.
그러고는 그의 완맥을 잡는 동시에 그의 코끝에 손을 갖다 댔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숨과 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일각만 늦었어도 한빈은 살아 있는 독고진이 아닌 시체를 봐야 했을 터.
한빈은 독고진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주변에 혈흔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독에 당했을 것이다.
한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독고진이 여기서 숨을 거둔다면 흑막은 모두 땅에 묻히게 된다.
거기에 독고진이 여기서 죽는다면 전생에도 없었던 정사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정사대전이라?
한빈은 저 멀리 점이 되어 가는 하얀색 선박을 바라봤다.
한빈은 자신이 잡으려 했던 것이 꼬리가 아니라 몸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독고진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살폈다.
다행히도 금의환향의 효과 덕분에 기사회생을 펼칠 수 있었다.
기사회생이라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독고진의 손목을 잡고 재빨리 기사회생을 펼쳤다.
순간 나타나는 글귀.
[공력이 부족합니다.]
한빈은 재빨리 실력편의 공력을 확인했다.
[공(功) : 오(五)]
위상호와의 결전 후 바로 이곳으로 뛰어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지금 본신의 공력이라고 해 봤자 오 년 남짓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사회생을 펼치는 데 필요한 공력은 십오 년.
그렇다면 정확히 오 년의 공력이 모자란 것이다.
한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독고진을 바라봤다.
원인이 독이니…….
청화만 같이 왔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독고진의 숨이 점점 희미해지자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손가락을 튕기고 난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청화가 자신이 있는 곳을 찾을 리 없었다.
한빈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빈이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개의 신형이 보였다.
사사삭. 사삭.
둘의 신형은 한빈의 앞에 가뿐하게 다가섰다.
한빈의 뜻이 통했을까.
둘은 다름 아닌 설화와 청화였다.
한빈은 재빨리 청화에게 외쳤다.
“청화야! 독고진 대협의 몸에서 독을…….”
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화는 재빨리 독고진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독기를 독고진의 몸에 흘려보냈다.
이것은 마중물을 흘려보내는 것과도 같았다.
상대의 신체에 있는 독과 청화의 독 간의 접점이 있어야 몸속의 독을 흡수할 수 있는 법.
청화는 눈을 감고 독고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청화는 눈을 떴다.
동시에 청화가 피워 냈던 독기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고생했다, 청화야.”
“고, 공자님…….”
청화가 당황한 듯 한빈을 바라봤다.
“청화야, 무슨 일이지?”
“독고 대협은 중독된 게 아니에요. 몸속에는 어떤 독도 없어요, 공자님.”
“독이 없다고?”
혼잣말을 뱉은 한빈은 다시 독고진을 살폈다.
독이 아니고서는 이런 상태가 될 수 없었다.
한빈은 독고진의 완맥을 다시 잡았다.
독고진의 혈맥을 살피던 한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빙공(氷功).”
그 말을 뱉은 한빈은 재빨리 설화와 청화에게 눈짓했다.
“독고 대협을 부탁한다.”
한빈은 독고진을 앉혔다.
가부좌를 튼 상태로 몸을 고정한 후, 설화와 청화에게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맡겼다.
한빈은 재빨리 그의 상의를 벗겼다.
그의 상의를 벗기자 그의 근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근육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가슴 쪽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위치의 피부 위로 살얼음이 붙어 있었다.
분명히 빙공이 맞았다.
중원에 빙공을 쓰는 자가 있던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강맹한 빙공을 쓸 수 있는 문파는 없었다.
그 고민은 나중에 해야 했다.
심장 쪽에서부터 이어진 살얼음은 그의 왼손으로 이어졌다.
왼손을 보니 꽉 쥐고 있었다.
한빈은 그의 왼손을 폈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조그마한 얼음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빈은 그 얼음 덩어리를 털어 냈다.
지금 독고진의 상태는 왼손 장심에서부터 심장까지 이어지는 혈맥이 얼어붙어 있었다.
한마디로 인위적인 절맥 상태가 되어 버린 것.
한빈은 자신의 장심을 살얼음이 핀 곳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그리고 남아 있는 속(速)의 기운을 모두 쏟아부었다.
사사-삭.
사사-삭.
한빈은 손바닥으로 빙공에 당한 상처를 빠르게 비볐다.
한빈의 손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한빈은 손을 움직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고 대협, 지금 청력은 정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혈맥이 돌아오면 재빨리 소주천을 돌리십시오. 제가 조그마한 틈을 만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한빈을 바라보고 있던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독고진의 상태가 위험한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치료법은 이해가 안 되었다.
설화가 보기에는 장심을 통해 극양지기를 흘려보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한빈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설화의 생각과는 달리 가부좌를 틀고 있는 독고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가 당한 것은 빙공이 맞았다.
어찌나 수법이 악랄한지 빙공은 혈맥을 얼린 것이 아니라 혈맥을 감싸고 있는 혈관을 미세하게 얼렸다.
빙공에 당했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체내에 극양지기를 몰아넣기 마련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극양지기를 받는다면?
혈관이 걸레처럼 찢길 것이 뻔했다.
독고진은 죽어 가는 상태에서도 한빈의 처방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나이에 저렇게 신중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 이런 처치 방법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
독고진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반로환동한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얼어붙었던 혈맥에 조그마한 틈이 생겼다.
순간 독고진은 이를 악물었다.
한빈은 쉬지 않고 손을 비볐다.
손바닥을 비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고기 타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
그때였다.
독고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그 소리에 한빈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설화와 청화에게 작게 말했다.
“너희는 잠시만 그대로 있어라.”
“네, 공자님.”
“알겠어요.”
둘이 동시에 답하자 한빈은 독고진의 완맥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 잡은 것은 그의 왼쪽 완맥이었다.
오른쪽 완맥을 잡았을 때는 증상을 살피지 못했던 이유가, 빙공의 기운은 정확하게 왼손 장심부터 심장까지의 구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빙공의 기운은 자신이 먹을 것은 다 먹었다는 듯 심장에서부터는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