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만근교 위의 고수들 (3)
한빈이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바로 구결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구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따랐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빈이 뼈를 준 것이 맞았다.
어깨를 검에 내주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빈은 실력편의 복(復)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벌써 복의 속성을 사용해 상처가 아문 상태.
두 번의 격돌 후 한빈과 위상호는 검 대신 권장법으로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도중 위상호는 빈틈을 보였다.
한빈은 그것이 위상호가 일부러 보인 함정임을 알았다.
그는 한빈이 내뻗은 오른손을 그대로 허용했으니까.
대신 그 틈을 타 한빈의 어깨를 검으로 그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위상호가 마치 바둑의 포석을 깔듯 이번 수를 가볍게 주고받았다는 점이다.
이번에 주고받은 합은 총 다섯 번.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한빈은 검이 아닌 장법을 통해 위상호에게 구결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천급 구결 일(一)을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 일(一)]
새로운 천급 구결이 용린검법에 새겨졌다.
한빈의 표정과는 달리, 어깨에 선명한 핏자국 덕분에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격돌에서 한빈의 위태로움을 눈치챈 위상호는 한빈을 보며 연신 웃고 있었다.
그는 올린 입꼬리를 다시 본래대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돈과 정보 그리고 기연의 힘이다.”
“갑자기 왜 돈과 정보, 기연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
위상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에게 자신의 비밀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위상호는 아직도 어린 시절 무가지회에서의 기억이 선명했다.
무림세가라고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서열은 분명히 존재했다.
십대세가에 속하느냐 아니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시 십대세가가 아닌 위씨세가는 다른 무림세가에게 무시받기 일쑤였다.
목이 마르다면 물을 떠 가야 했고.
배가 고프다면 음식을 바쳐야 했다.
그게 위상호가 어릴 적 다른 무림세가의 아이들한테 당한 수모였다.
무가지회가 끝난 후 돌아가는 길에 위상호는 길을 잃었다.
그 후 정확히 보름 만에 위씨세가로 다시 돌아왔다.
신선이 위상호를 위씨세가로 데려다준 것이었다.
위씨세가에서 사라졌던 보름이 위상호에게는 기연이었다.
당시 길을 잃은 위상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은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
그때 눈처럼 하얀 도포를 휘날리며 신선 하나가 호랑이를 막아섰다.
그는 정확히 손가락 한 번만 까닥여 호랑이를 제압했다.
과연 그것이 달마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가능한 일일까?
위상호의 삶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그 신선의 발끝을 쫓기 위해 부단히 달려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정체불명의 조직인 흑룡단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은 아니었다.
위상호는 그들을 철저히 이용했다.
암제에게서는 무공을 빨아들였으며 금선에게서는 재력을 빨아들였다.
거기에 막대한 정보 조직까지 구축했다.
그 조직을 통해 위상호는 구대문파의 비기를 하나둘 입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돈에 문파를 파는 무인이 어디 있겠냐고 코웃음 치겠지만, 막대한 금력 앞에서는 너도나도 비급을 빼돌렸다.
물론 구대문파의 기본 무공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본이 모여 높은 수준의 무공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위상호는 그렇게 구대문파의 무공을 집대성했다.
그 결과가 위상호의 독문무공인 만인지상공(滿人之上功)이었다.
그러나 그 독문무공의 이름은 몇 달 전 버려야 했다.
만인지상이란 이름 자체가 허명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어릴 적 자신을 구해 준 신선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진정 신선이 맞았다.
자신이 어릴 적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신선이 바로 암제를 길러 낸 자였다는 것을 알고는 위상호도 한없이 놀랐었다.
물론 그 신선도 어릴 적 자신이 구해 준 아이가 위상호라는 것을 알고는 그윽한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고는 위상호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갔다.
그것은 벽에 남긴 한 수의 검초와 바닥에 남긴 한 걸음의 보법이었다.
그가 한 번 그은 자리에는 일곱 개의 검흔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가 내디딘 한 걸음에는 일곱 개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위상호는 그 무공을 어느 정도 흡수하며 독문무공의 이름을 바꿨다.
만인지상 앞에 일인지하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물론 세상에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상대에게 자신을 잠룡이라 칭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가 본래의 무위를 드러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위상호는 이 자리에 누가 오든 자신 있었다.
어느 누가 온다 해도 어릴 적 만난 신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테니까.
그의 그림자라도 잡을 수 있는 것은 중원에서 오직 자신뿐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위상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본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맞춰 설화가 외쳤다.
“적룡대협이 오행진을 펼치라고 하셨어요!”
“지금 그 소리에 의미가 있다고?”
아미백선이 놀라 묻자 청화가 대신 답했다.
“설화 언니는 공자님, 아니 적룡대협이 보내는 신호를 다 해석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그런 능력이 무공보다 더 힘들 것 같지만요…….”
청화는 마지막에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종남흑선까지 합세한 그들은 오각형 모양으로 위상호를 포위했다.
물론 가장 위쪽에는 한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행진은 구대문파뿐 아니라 중원의 모든 문파에서는 공통으로 배우는 합격진 중 하나였다.
각각 금, 수, 목, 화, 토의 오행을 나타내는 다섯 방위를 선점하며, 중앙의 한 점을 향해 공격하는 오행진. 오행진은 보통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사용한다.
강호라는 것이 어디 일대일 승부만 있던가?
모든 문파는 다수의 인원으로 한 명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이런 합격진을 기본적으로 수련한다.
아미파의 백선이나 종남파의 흑선 모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설화와 청화도 그들의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는 모습에 위상호가 코웃음을 쳤다.
“어서 오너라!”
그의 외침에 아미백선의 구절편이 여의봉처럼 쭉 늘어났다. 구절편이 상대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가자 위상호는 가볍게 쳐 냈다.
속절없이 허공을 지나치는 구절편.
구절편이 멈춘 곳의 끝에는 한빈이 있었다.
한빈은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날아오는 구절편을 쳐 냈다.
구절편의 끝이 다시 위상호에게 향한다.
한빈은 구절편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위상호에게 뛰어들었다.
아미백선이 점한 자리는 오행 중 화(火).
한빈이 맡은 자리는 금이었다.
한빈은 화의 속성을 받아치며 검을 뻗어 금의 공격을 배가되게 한 것이다.
동시에 종남흑선도 뛰어들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파바박.
순간 위상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종남흑선이 맡은 것은 토(土)의 역할이었다.
토의 역할은 상대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상대의 숨통을 끊기보다는 상대의 속도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 종남흑선이 맡은 일이었다.
그때 청화가 손을 내뻗었다.
청화의 손에는 암기가 들려 있었다.
청화는 암기를 날리는 동시에 손을 뻗었다.
암기는 바로 허초였다.
뒤에 날아가는 손바닥에는 공독지체에 담긴 독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독기가 향한 곳은 위상호 쪽이 아니었다.
바로 한빈이 내뻗은 검의 끝에 독기가 부딪혔다.
청화가 맡은 것이 바로 목(木)이었다.
목은 불이 붙은 금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법.
청하의 한 수는 한빈의 검에 독기를 더했다.
그때 위에서 설화가 스르르 하고 나타났다.
동시에 위상호의 등을 우혈랑검으로 그었다.
스윽.
모든 공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반 문파들의 오행진가는 차원이 달랐다.
설하가 맡은 것은 수(水)의 자리였다.
물은 금을 더욱 빛나게 하기 마련이었다.
물속에 오래 있는 금속은 녹이 슬기 마련이지만, 처음 물에 넣으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법이었다.
불빛을 받으면 더욱 반짝이고 말이다.
한빈의 검 끝에는 오행이 기운이 뭉쳐 있었다.
순간 위상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그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의 획에 이은 단 한 걸음이 묘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때 한빈이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나머지 넷은 신속히 위상호가 만들어 낸 간격에서 벗어났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바꾸었다.
‘전광석화.’
‘쾌검난마’
그리고 ‘자승자박’의 초식을 펼쳤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앞에 용린검법의 글귀가 떴다.
[초식 ‘쾌검난마’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쾌검난마는 마를 상대할 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초식이었다.
쾌검난마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상대가 마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그의 검과 보법을 보면 오히려 무당의 무공과 닮아 있었다.
처음에 한빈이 그의 보법이 태극칠성보와 닮아 있었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 위상호의 검 끝은 무섭게 빨랐다.
그의 초식은 한 번의 동작에 일곱 가지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그때 위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한빈이 그의 검을 막으며 답했다.
“그게 초식의 이름인가?”
“그렇다네. 저승에 가거든 꼭 기억하게. 언젠가 저승에서 자네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을 초식이라네.”
“나는 이승에 굴러도 개똥밭이 좋다네.”
순간 위상호의 검 끝에 빈틈이 생겼다.
한빈은 재빨리 팔에 찬 만월을 꺼내며 초식을 펼쳤다.
‘부창부수.’
단검으로 펼쳐지는 오호단문검의 초식이 위상호의 눈을 어지럽힘과 동시에 오른손에 든 매화삼경이 그의 요혈을 찔러 들어갔다.
파박.
팍.
챙. 챙.
정신없이 둘의 검이 오갔다.
순간 한빈의 무복에는 온통 핏자국이 번져 나갔다.
한빈이 내지르는 두 번의 검이 위상호의 일검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것이다.
한빈은 내심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지금 한빈은 전광석화의 초식을 기본으로 속도를 극성까지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픽.
픽.
한빈의 무복은 마치 빨랫방망이에 맞듯 찢겨 나갔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승부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분명 한빈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스무 번을 맞더라도 하나의 구결을 취하면 한빈이 이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걱.
서걱.
챙, 챙.
피륙이 썰리는 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만근교 위에서 퍼져 나갔다.
핏물로 흥건해진 한빈의 무복을 본 아미백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위상호의 쾌검과 신묘한 보법에 합격진은 이미 깨졌다.
그는 움찔거리며 달려들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때 설화가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아미백선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둘의 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방해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미백선은 한빈이 강호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처절하게 검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