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사람을 남기는 장사 (8)
강유찬의 검이 무뎌졌지만, 일류 무인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은 정도였다.
대기를 가르는 두 무인의 검이 파공성을 만들어 냈다.
슈슝!
획!
하지만 초절정의 무인인 위지천의 눈에는 보이기 시작했다.
위지천의 표정이 확 풀렸다.
“이제 준비를 해야겠구나.”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승부가 기울었으니 사냥꾼과 사냥감이 이제는 바뀔 것이다.”
“그게 무슨…….”
위지약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에도 강유찬의 검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이의 눈에도 강유찬의 검이 보이는 것은 시간문제.
강유찬의 검이 그 정도로 무뎌졌다는 뜻이었다.
순간 울리는 낯선 소음.
캉!
그 소리와 동시에 부리진 검신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하늘 위로 날아오른 반 토막 난 검신은 흡사 난을 그리는 것만 같았다.
휘이익!
반 토막의 검은 힘을 잃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하늘 끝까지 날아갈 것 같은 검신은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피슉!
곧 그 검신은 강유찬의 앞에 박혔다.
순간 강유찬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상의 앞섶에 붉은색으로 일(一)자가 새겨졌다.
그것을 본 모든 이는 입을 벌렸다.
강유찬은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상대는 화산의 검을 연구라도 하듯 세심하게 살피며 강유찬의 검을 받아 준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승부를 끝낼 수 있음에도 말이다.
강유찬 역시 이를 알고도 순순히 따라 주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닌 시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위상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을 보니 내 의도를 알아챘나 보군.”
그의 말투는 여유가 넘쳤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 봐도 이곳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위상호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쓸고 지나간 곳에는 엄동설한의 한파가 지나간 듯했다.
한참 떨어진 곳에 있던 서 태감도 두려움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몸이 무너진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강유찬이 꺾인 수수깡처럼 허물어졌다.
스르륵.
강유찬은 반 토막 난 검신을 바닥에 찍었다.
탕.
그러고는 힘겹게 몸을 버티며 아무 말 없이 위상호를 바라봤다.
“…….”
그 모습에 위상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면 많이 버틴 것일세. 그럼 그만 가시게나.”
그의 손끝이 살짝 움직이려다 멈췄다.
위상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내 초식 이름은 듣고 가야 서운하지 않겠지. 자네가 마지막으로 볼 초식은 매화일촉(梅花一觸)일세.”
말을 마친 위상호의 검 끝이 스르륵 움직였다.
그 순간, 허공에 울려 퍼지는 파공성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단순한 빠름이 아닌, 무지막지한 진기의 파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생각지도 못한 폭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쿠아앙!
폭음과 함께 주변은 먼지로 뒤덮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일이지?”
“강유찬 어르신은…….”
위씨세가 쪽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가 천하제일의 무위를 보여 줬다고 해도, 강호에서는 마지막에 뒤집히는 승부가 흔한 법이었다.
강유찬이 마지막 한 수를 숨겨 놓고 있었다면 아무리 위상호라도 멀쩡할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강유찬이 동귀어진의 수법을 써서 성공했다면, 그것은 금의위의 승리였다.
위지약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무사하시다.”
위지천이 재빨리 답했다.
순간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위지천의 말대로 위상호는 멀쩡했다.
그저 검 끝을 상대에게 겨눈 채 미간을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전의 여유롭던 표정이 한풀 꺾인 듯한 모습이었다.
위상호의 검 끝이 향한 곳으로 위지약은 시선을 돌렸다.
순간 위지약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낯선 인물이 있었다.
붉은 무복을 입고 흰색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강유찬을 부축하고 있었다.
강유찬은 자신을 부축하는 노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 죽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자가 마지막에 쓴…… 초식은 매화일촉이 맞습니다. 어떻게 화산파의 검을…….”
강유찬의 목소리는 놀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화산의 무학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거기에 그가 쓴 매화일촉은 매화검수 중에도 상위에 있는 무인들의 수법이었다.
강유찬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노인은 그런 강유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 쉬시지요, 강 대인.”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
강유찬도 자신을 구한 노인이 누군지 그제야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의식이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강유찬을 바닥에 눕히며 답했다.
“수염 찾다 늦었습니다, 강 대인.”
말을 마친 노인은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노인은 검집에서 아직 검도 뽑지 않고 팔짱을 낀 자세로 앞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위상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대체 누군가? 누구길래 이 대결에 끼어드는가?”
“자네라고? 너 말이 좀 짧다?”
“흠…….”
위상호는 상대를 바라봤다.
나이로 본다면 자신의 아래는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검집으로 화산파 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매화일촉을 받은 자였다.
하지만 위상호는 상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위상호는 긴 침음의 끝에 말을 이었다.
“어디에서 온 고인이시오?”
“남들은 나를 적룡대협이라 부르더군.”
“적룡…….”
위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적룡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귀를 막고 있어도 들리는 것이 적룡대협이라는 자의 위명이었다.
사파의 영웅이자 영단산에 있는 무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무인.
그런데 왜 사파의 고수가 여기에?
순간 위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 전 들었던 정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분명히 반로환동의 고수라고 했다.
그런데 노고수라니?
위상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상대를 쏘아봤다.
그 모습에 한빈은 슬쩍 수염을 쓸어내렸다.
허튼 동작은 아니었다.
수염이 잘 붙어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는지 위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유명한 적룡대협이시구려.”
“그렇다오. 그런데 위풍당당한 위씨세가의 가주께서 왜 금의위를 핍박한단 말이 이오?”
“사파의 영웅이신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닌 줄로 압니다. 이건 정파 간의 분쟁이요.”
“정파 간의 분쟁이라……. 언제부터 금의위가 정파였소?”
“저자는 금의위이기 전에 화산파의 제자요.”
“화산이라…….”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쓰러진 강유찬을 바라봤다.
“이자가 화산파라는 얘기라는 말이오?”
“맞소. 이건 화산파와 위씨세가의 분쟁이니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사파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 않소?”
말도 안 된다는 소리인 것은 위상호도 알고 있었다.
강유찬만이 아닌 금의위 전체를 상대하고 있는데, 이것이 황궁의 분쟁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위상호는 상대가 빠져나갈 명분을 주려 함이었다.
“그게 확실하다면 명분이 없구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위상호는 입가에 미소를 피웠다.
그 모습에 한빈은 겨우 실소를 참았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사파와 정파의 공통점이었다.
그렇다면, 사파와 정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정파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대의명분을 따진다.
하지만 사파는 모두가 보는 앞이라고 해도 대놓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적룡이 사파의 영웅이라고는 하나, 사파는 사파였다.
여기까지가 한빈이 예상한 위상호의 머릿속이었다.
한빈은 위상호의 눈을 바라봤다.
눈빛을 보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빈의 예상대로 위상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적룡의 등장은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앞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위상호에게는 지금 시간이 중요했다.
모든 일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누군가와 다투다가는 시기를 놓치게 된다.
한 수를 받은 적룡의 무위를 보면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맞서는 것보다는 일단 회유하는 것이 옳았다.
정의맹에 뿌린 돈과 그동안 만들어 놓은 인맥을 이용하면 하북성에서의 일을 사파의 일로 몰고 갈 수 있었다.
지금 적룡대협이란 작자가 등장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그때였다.
위상호의 귓가에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그 소리에 위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를 낸 것은 적룡대협이란 작자였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오?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한빈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성벽 위로 고개를 들더니, 그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 얘기 들었소?”
한빈의 외침에 위상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모든 병력은 하북성 내부를 단속하는 데 차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곳에 대고 외치는 적룡대협의 모습이 이상했다.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들었습니다! 일단 전서구부터 날리겠습니다, 적룡대협!”
그 말고 함께 성벽 위에서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푸드덕 날갯짓하며 날아오르는 비둘기 한 마리.
그것을 본 위상호는 재빨리 중지를 튕겼다.
퉁.
순간 정체불명의 암기가 날아갔다.
슝!
마치 화살처럼 날아간 암기는 비둘기에 적중했다.
바닥을 향해 떨어진 비둘기를 향해 위상호가 소매를 휘저었다.
비둘기가 그의 소매 안으로 들어왔다.
한빈은 그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지금 보여 준 한 수는 분명히 암제의 아래가 아니었다.
한빈이 펼치는 백발백중에 버금가는 정확도와 위력이었다.
다른 이는 보지 못했지만, 한빈은 그가 날린 것이 볍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빈보다 더 놀란 것은 위상호였다.
위상호는 지금 전서구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마치 미리 적어 놓은 듯 위씨세가와 화산파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놀람도 잠시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하오. 내 실수로 소중한 비둘기를 해했구려.”
“걱정하지 마시오. 하나라고는 안 했소이다.”
한빈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성벽 위에서는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위상호가 화난 얼굴로 외쳤다.
“이런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네가 그러고도 대협이라 할 수 있는가?”
“그건 내가 붙인 이름이 아니오. 그런데 전서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소? 전서구 중 몇 마리는 북경으로 갈 것이오.”
“허.”
“무림공적을 넘어 역적이 된 느낌이 어떠하오?”
한빈은 수십 마리의 비둘기를 가리켰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지, 비둘기는 지금도 계속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전서구는 수십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위상호는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었다.
하지만, 위상호는 진심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