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사람을 남기는 장사 (5)
강유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인물이었다.
물론 멀리 떨어진 덕분에 그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설프게나마 보이는 외형이 낯설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누굴까?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그 사람이 깃발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청색과 백색의 깃발.
덕분에 오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그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리 굵지 않은 나뭇가지에 서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고수가 분명했다.
재미있는 점은 청기와 백기를 든 무인이 서 있는 곳은 강유찬이 있는 곳에서만 보였다는 것.
울창하게 솟은 나무들 덕분에 서 태감과 위상호가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법에도 제법 능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에게 신호를 보낸다?
의문이 점점 커질 때였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동시에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저 멀리 있는 상대는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가볍게 뛰어올랐다가 다시 착지하는 여유를 보였다.
경공술이 눈에 많이 익었다.
혹시 구걸십팔보?
그렇다면 분명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그는 재빨리 그전에 받았던 서찰의 내용을 떠올렸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신호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저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보내는 신호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위급한 상황?
순간 강유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눈빛을 바라보던 서 태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강유찬의 표정을 살펴봤다.
서 태감은 재빨리 위상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 기회라는 이야기였다.
서 태감과 강유찬은 지금 명분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공을 겨루는 것도 아니었다.
서 태감은 자신과 강유찬이 정치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문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서 태감의 눈짓은 강유찬을 동요시키라는 뜻이었다.
그의 눈짓을 본 위상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위상호의 목소리가 강유찬의 귓전을 때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강유찬 대인.”
“미안합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잠시…….”
강유찬은 재빨리 눈을 비볐다.
오백 걸음 밖의 사내는 아직도 태연히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때 다시 위상호가 말했다.
“그럼 저는 그만 가 보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표정을 보니 우리 위씨 가문의 행렬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으신 것 같아서 떠나려 했소. 그게 아니오?”
위상호는 팔짱을 끼고 강유찬을 바라봤다.
그때 저 멀리서 깃발이 올라왔다.
깃발은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불가(不可).
깃발은 위씨 가문을 보내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강유찬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저 짐을 살펴야 한다는 제 뜻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걸 테요?”
“…….”
“당신의 자리를 걸 수 있소?”
“제가 자리를 걸면 당신은 무엇을 걸겠습니까?”
말을 마친 강유찬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서 태감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서 태감은 기다렸다는 듯 한 발 나와 말을 이었다.
“위씨 가문은 제 손님이니, 제가 대신 걸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저도 제 자리를 걸겠습니다. 저 수레에 실린 짐에 아무 이상이 없다면 당신은 은퇴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저곳에서 이상한 물건이 나온다면, 서 태감이 은퇴하셔야 하겠군요.”
“그러지요. 그 벌까지 제가 받지요.”
서 태감은 빙긋 웃었다.
묘하게 중성적인 웃음이 강유찬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그때 강유찬의 눈에 깃발이 다시 들어왔다.
깃발은 역시나 하나의 글자를 그렸다.
가(可).
수락하라는 뜻이었다.
강유찬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도 위씨 가문의 행렬이 지체된 책임을 지겠습니다.”
“좋소. 그럼 어디 살펴보시오.”
서 태감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군견 한 마리가 미친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컹, 컹.
병사가 통제하던 군견의 목줄은 풀려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군견을 향해 병사들이 창을 겨눴다.
그도 그럴 것이, 군견이 향한 방향에는 서 태감이라는 동창의 고위 관료가 있었다.
병사들은 그를 보호할 임무가 있었다.
컹. 컹.
다른 군견까지 풀려났다.
어찌나 난리를 쳤는지 목줄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는 군견을 잡기 위해 달려오는 병사.
앞에는 서 태감을 보호하려는 병사들이 군견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군견은 미친 듯이 서 태감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병사들의 창이 군견을 막 꿰뚫기 일보 직전이었다.
강유찬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휙.
강유찬이 간 곳은 바로 병사들의 뒤쪽이었다.
그는 바로 병사들의 마혈을 눌렀다.
툭.
동시에 병사들의 몸이 허물어졌다.
스르륵.
그 모습에 서 태감이 외쳤다.
“강 대인, 그게 무슨……!”
그는 바로 말을 맺지 못했다. 군견들이 코앞까지 뛰쳐 왔기 때문이다.
서 태감이 주춤 물러나며 위상호와 부딪혔다.
서 태감은 위상호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위상호는 강호 고수 중 하나였다.
위상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휙. 휙.
군견이 서 태감을 지나쳤다.
군견은 이미 지나간 수레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 모습에 뒤쪽에 있던 강유찬이 외쳤다.
“모두 군견을 따라가 봅시다!”
강유찬은 군견을 따라가다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멍하니 있는 서 태감이 있었다.
“서 태감. 괜히 군견을 죽였다가는 수색이 늦어질 수 있어 부득이하게 손을 썼습니다. 이번은 이해해 주시죠.”
그 말을 남기고 수레 쪽으로 달려가는 강유찬.
서 태감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위상호를 바라봤다.
“군견을 왜 그냥 두셨소이까?”
“판이 커져야 서 태감께서도 이득을 보실 것이 아닙니까? 아무 일도 없다면 동창의 병사에게 해를 가한 책임까지 물으셔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흠.”
“만약 군견이 서 태감을 해하려 했다면 내가 손을 썼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위상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서 태감은 그 웃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군견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라면?
위상호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당했을 것이었다.
의심도 잠시, 서 태감의 눈이 커졌다.
서 태감이 보고 있는 것은 위상호의 오른손이었다.
그곳에는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방금 위상호가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눈치를 채지도 못한 이 짧은 사이에 검을 뽑았다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저 정도라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지도 모르게 당할 수 있었다.
서 태감은 자신의 목을 만져 봤다.
이제는 미친 듯 달려오던 군견이 두렵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군견보다 두려운 것은 바로 위상호였다.
말로만 들었지, 자신의 앞에서 강호의 고수가 이런 무공을 보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소란이 일어났다.
웅성대는 소리의 주인은 바로 군견을 따라갔던 동창의 병사들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와, 여기에 쌓여 있는 약재는 대체…….”
“어디 보세.”
“왜 수레에 이런 게 들어 있지?”
병사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군견이 달려간 수레였다.
군견은 수레로 달려가 수레를 덮은 천을 모두 찢어 놨다.
그러고는 그 속에서 뭔가를 주워 먹었다.
순간 군견들은 바로 바닥에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병사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몇은 호기심에 수레를 살피기 시작했고, 그곳에 정체불명의 약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사들은 그 약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군견들이 미친 듯 날뛰다가 저 모양이 된 건지 궁금해했다.
병사들이 웅성대고 있을 때, 강유찬의 외침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금의위는 들어라! 지금 이곳에서부터 오백 걸음 이내에 있는 자들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통제하라. 이것은 내 명령이 아니라 황명이다!”
그 외침에 성안과 성 밖에서 금빛 무복을 입은 고수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사삭.
사사삭.
그들은 민첩하게 성문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미 검을 뽑은 그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덕분에 소란은 더욱 커졌다.
성문을 지나려고 기다리던 백성들도 겁에 질려 구석으로 도망쳤고, 동창의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상황을 살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금의위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성문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금의위는 생각보다 많았다.
황궁에 머물러야 할 금의위 무사들의 반 수는 이곳으로 온 것 같았다.
그 소란 속에 서 태감은 황급히 달려갔다.
이제 미친 듯 날뛰는 군견은 없었다.
다만 수레 옆에서 몸을 비비 꼬는 똥개만이 있을 뿐이었다.
눈이 풀린 것이, 군견이라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독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서 태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레를 살폈다.
그는 병사들이 약재라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곳에는 환약을 담은 듯한 누런 종이가 정갈하게 겹쳐 있었다.
정황상 독이 분명했다.
그때 위상호도 그의 곁에 다가왔다.
위상호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넋이 나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서 태감이 위상호에게 말했다.
“대협,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혹시 독입니까?”
“…….”
위상호는 말없이 수레를 바라봤다.
이것은 분명 모함이었다.
심란한 위상호의 표정을 못 읽은 서 태감이 계속 그를 추궁했다.
“독이라면, 왜 이것을 하북성에…….”
서 태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강유찬이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서 태감은 자연스레 강유찬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독이 아닙니다.”
“그럼 뭐란 말이오?”
“여기에 쌓여 있는 약재들은 나라에서 금지한 춘약입니다. 무림에서도 금지된 춘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춘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물어봐야 할 사람은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강유찬은 시선을 돌려 위상호를 바라봤다.
“…….”
위상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동창의 병사들 대신 마저 수색하던 금의위 무사가 외쳤다.
“여기도 같은 약들이 있습니다!”
그 외침에 강유찬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많은 춘약을 왜 하북성으로 들여온 것입니까?”
“…….”
여전히 위상호는 묵묵부답.
강유찬은 서 태감을 바라봤다.
“서 대인은 왜 그것을 알고도 방관한 것입니까?”
“난 몰랐소이다.”
“분명히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을 하북성의 성주께서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말을 바꾸지는 마시지요. 이 춘약이 강호에서도 금지된 이유를 아십니까?”
강유찬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처음부터 춘약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한빈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자 훈수였다.
덕분에 강유찬은 이렇게 당당하게 그들을 몰아붙일 수 있었다.
“금지라…….”
“복용할 시 부작용으로 저리됩니다.”
강유찬은 널브러져 해롱대고 있는 군견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