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사람을 남기는 장사 (2)
한빈의 목소리는 살짝 높았다.
거기에 표정까지 격양되어 보였다.
누가 보면 위상군의 제안에 감격했다고 해도 착각할 수준이었다.
순간 위상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충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살펴보니 자신이 확보해야 할 물량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거래였다.
아무리 상대가 약하게 보이고.
아무리 상대가 다급해 보인다고 해도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위상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좋소, 얼마면 되겠소?”
위상군이 눈을 반짝이자, 한빈은 바닥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게…….”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 보시오.”
“아무래도 대협께서는 못 맞춰 주실 것 같아서요.”
“지금 우리 위씨세가를 뭐로 보고 하는 말이오?”
“헉, 지금……. 위씨세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흠.”
위상군은 헛기침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의 헛기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강남의 위씨세가……. 그 유명한 천하 십대세가 중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다는 그 무림세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뭐,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맞긴 하오.”
“아,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곡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주겠소. 얼마면 되오?”
“정말 감사합니다, 대인. 역시 십대세가에서도 최고의 무림세가라 불리는 강남의 위씨세가십니다!”
한빈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위상군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기 때문이다.
상대가 무인이라고 한다면 사자후라도 외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위상군은 한빈의 행동이 고마움에서 나온 행동이라 생각했다.
호북에서 하북이면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닐 터.
그들은 꽤 큰마음을 먹고 이곳까지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성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면?
거기에 지금 이 곡식에 호북 상단의 명운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상행은 실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곡물이라는 게 쉽게 운송할 수 있다고 보면 안 되었다.
중간에 비바람이라도 맞는다면 곡물은 점점 썩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곡물을 담은 가마니의 겉은 유지로 감싼다.
하지만, 유지에는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있었다.
유지도 시간이 지나면 한낱 평범한 종잇장으로 변해 물에 젖기 마련이었다.
지금 수레에 쌓인 가마니를 보니, 유지를 다시 구입할 돈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은 돌아갈 노잣돈이라도 건지는 것이 이득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여기저기 곡물을 팔기 위해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하북성 주변의 상인들은 위씨세가에서 매수해 놓은 상태였다.
공짜로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을 터.
위상군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오. 서로 운대가 맞았을 뿐이니 말이오. 그러니 값을 불러 보시오.”
“그럼…….”
살짝 말끝을 흐린 한빈이 지체 없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그 모습에 위상군이 피식 웃었다.
“은자 오십 냥이라면 내 흔쾌히…….”
위상군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도리질 치듯 한빈은 거침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위상군이 다시 물었다.
“은전이 아니라 금전을 원하는 것이오?”
“네, 금전을 원합니다.”
“욕심이 과하구려. 그럼 금전으로 다섯 닢을 주리다.”
“…….”
한빈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과 똑같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위상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지금 손가락 다섯 개를 펴지 않았소? 그러니 다섯 냥이면 되지 않소? 그럼 한 닢을 더 올려 주겠소.”
위상군은 조용히 상대를 내려다봤다.
위상군이 제시한 가격은 곡물의 가격이 아니라 곡물을 버릴 때 들, 처리의 비용.
곡식이 부족한 것은 하북성 내부였지, 그 밖은 아니었다.
그리고 인구 대부분이 성에 몰려 있는 관계로 곡물을 처분하려면 하북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곡물을 가지고 다른 성으로 이동하느니 헐값에 정리하고 가는 게 좋았다.
위상군이 선심 쓰는 척하며 제시한 금액은, 말 그대로 폐기 처리 비용이었다.
아이처럼 고개를 흔드는 상대를 본 위상군은 표정을 풀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후려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상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황금 열 닢을 주리다.”
“저는 황금 오백 냥을 원합니다.”
“…….”
위상군은 상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봤지만, 상대가 말한 것은 너무나도 터무니가 없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원하는 금액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다 태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버님이 그러셨습니다. 헐값에 팔 것이라면 다른 상인들을 위해서 모조리 태워 버리는 것이 좋다고 말입니다.”
“허허.”
위상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옆에 있던 위지천과 위지약도 서로를 바라봤다.
그중 위지약이 못 참겠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지금 식량을 불태우겠다고 한 건가요?”
“제대로 들었군요.”
한빈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변복을 했지만, 눈앞에 있는 위지천과 위지약은 사천당가에서 마주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몰라본다고?
다른 이들이 환골탈태 이후 한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놀람도 잠시, 한빈은 이 상황을 바로 인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얼굴은 타인보다는 덜 보는 게 사람의 습성이니까.
그때 위지약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태우세요.”
“지약아.”
위상군이 말렸다. 하지만 위지약은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토해 냈다.
“이자가 겁도 없이 우리한테 덤터기를 씌우려고 하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당차게 숙부를 향해서 외치는 위지약.
한빈은 그 모습에 흘러나오려는 실소를 참았다.
마치 회귀 전 자신과 독대했을 때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상황도 비슷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한빈이 파 놓은 덫.
한빈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천천히 다가왔다.
전과 달리 경공을 펼치지 않고 천천히 걸어왔다.
설화는 한빈의 앞에 보퉁이를 내려놓았다.
“여기 있어요.”
“그래, 수고했다.”
한빈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보퉁이를 펼쳤다.
보퉁이 안에는 부싯돌과 조그마한 호리병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한빈은 호리병 한 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 수레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그 모습에 심미호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주군의 모습은 분명히 연기였다.
하지만 그 연기가 심금을 울렸다.
한빈의 발걸음이 유난히 비장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심미호뿐 아니라 하오문의 문주인 백미랑과 흑미랑도 똑같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적혈맹호대 모두가 한빈의 행동에 고개를 살짝 떨궜다.
모든 이가 혼연일체가 되어 연기를 펼치는 상황.
그 누가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문제는 한빈의 다음 행동이었다.
한빈은 백색 호리병에 있는 것을 수레에 쏟아부었다.
그것은 분명히 액체였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것은 기름이었다.
기름을 수레에 부은 한빈은 불을 붙이기 위해 부싯돌을 그었다.
툭, 툭.
하지만 부싯돌이라는 게 한 번에 불을 붙이기에는 힘든 물건이었다.
그 모습에 위지약에 외쳤다.
“불이 잘 안 붙어? 내가 붙여 줄까?”
“괜찮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옆에서 지켜보던 위지천은 재빨리 객잔으로 달려갔다.
아비이자 가주인 위상호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상인과 위지약의 설전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위씨세가가 상인을 겁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지금 주변에는 장운현의 모든 이가 나와서 그들을 빙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상인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도 있었던 것 같았다.
위지천은 뒤를 돌아봤다.
상인은 아직도 불을 붙이기 위해 부싯돌을 긋는 중이었다.
아직도 부싯돌에 불은 붙지 않았다.
상인도 아까워서 불을 붙이지는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지천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객잔의 삼 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섣불리 위상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위상호가 눈썹을 꿈틀대며 살기를 피워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기가 머리로 쏠리는지 머리카락이 바람이 흔들리듯 나부끼고 있다.
그때 위상호가 표정을 풀고 시선을 돌렸다.
“왔느냐?”
“네, 아버님.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너는 알 것 없다. 매입하기로 한 곡물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것 때문에…….”
“똑바로 말해 보아라.”
“상인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상인이 곡물을 다 태워 버린다고 하며 지약이와 대치하는 중입니다.”
“뭐라?”
위상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위지천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며 답했다.
“자존심 때문이지 진짜 불을 지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저 상인들의 물건을 꼭 손에 넣어야 한다.”
“네?”
위지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아비인 위상호를 바라봤다.
그에게서는 아직도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인과의 거래를 위해 이곳을 비운 것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던 위지천의 시선이 위상호가 앉아 있는 탁자 앞에 멈췄다.
탁자 위에는 회색빛의 재가 한 움큼 있었다.
저것은 분명히 재로 변해 버린 서찰이었다.
그렇다면?
일련의 상황을 보니 뭔가 안 좋은 소식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객잔 창문에서 이상한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마치 꼭 뭔가가 타는 냄새 같았다.
위지천은 재빨리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바라봤다.
객잔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레 한 대가 불에 훨훨 타고 있었다.
지금 창문으로 들어오는 냄새는 바로 그 냄새였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인 놈이 진짜로 수레를 태웠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위지천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동시에 위상호가 창문으로 다가왔다.
사사 삭.
바람처럼 다가온 위상호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도 냄새의 원인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순간 방금 위지천이 보고한 내용이 떠올랐다.
위상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랐다.
동시에 허공을 밟고 방향을 바꿨다.
그의 동작에 삼 층에 남아 있던 철혈검대 대원들이 본능적으로 소리 질렀다.
“능공허도!”
물론 그의 아들인 위지천도 놀랐다.
아비가 능공허도의 수법을 펼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상호는 그들의 외침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위상호가 조금 전 받은 서찰은 강남사호로부터 온 것이었다.
호북에서 하남으로 넘어오는 위씨세가의 상행이 완벽하게 털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믿는 강남사호에게 맡겼는데도 털린 것이다. 아니, 털린 것이 아니라 수레의 바닥에 구멍이 나서 곡물이 사라졌다고 했다.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지만, 남은 것은 고작해야 몇 섬밖에 안 된다고 전해 왔다.
지금은 수습이 먼저였다.
불타는 수레 앞에 도착한 위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레에 불을 지른 젊은 행수의 표정이 이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