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사람을 남기는 장사 (1)
장운현의 객잔.
객잔의 삼 층에서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오늘 새벽 도착한 위상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탁자에 앉은 위상호는 수염을 실룩거렸다.
그가 내뿜는 무형지기에 찻잔의 물이 찰랑거릴 정도였다.
위상호의 기세에 철혈검대의 대주 위상군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
위상호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찻잔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위상군을 바라봤다.
“네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라 보느냐?”
위상호는 찻잔을 잡은 손에 내공을 불어 넣었다.
찻잔에 담긴 차가 살짝 출렁였다. 이어서 찻잔에 금이 생겼다.
쩌정.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산산이 부서진다.
아예 가루가 되어 위상호의 손에서 벗어난 찻잔.
이상한 것은 찻물은 찻잔에 담긴 형태 그대로 그의 손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모습에 위상군의 눈이 커졌다.
“형님! 지, 지금 그것은…….”
위상군이 놀란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위상호가 보여 준 무위 때문이었다.
내공으로 찻물을 가둬 두는 것은 화경의 고수라면 가능했다.
위상군이 알기로 그의 형 위상호는 일찌감치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물론 위상호는 그의 경지를 외부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측근들도 그런 위상호의 무위를 철저히 함구했다.
어찌 보면 위씨세가의 마지막 남은 한 수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준 위상호의 경지는 위상군이 알고 있던 무공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찻물을 내공으로 감싸는 것만 아니라 그 형태까지 그대로 유지한다라?
화경의 고수 중 저것이 가능한 자가 얼마나 될까?
소위 말하는 무림삼존조차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위상군은 위씨세가의 형제 중 암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형과 암제의 무공을 비교해 봤다.
위상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암제와 자신의 형 위상호는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
위상군은 자신의 형 위상호가 암제라는 인물의 손발이 되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위상호는 모든 이에게 경지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득한 경지에 도달했으면서도 가문 내에서조차 무위를 숨기고 있었다니!
위상군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동생인 위상군의 표정을 본 위상호가 다시 물었다.
“나는 네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그게……. 오는 길에 곡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님의 일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진정 잘못이더냐?”
“아, 아닙니다. 진정한 실수는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을 마친 위상호는 기세를 풀었다.
순간 손바닥 위에서 찻잔 모양을 하며 일렁이던 찻물이 흘러내렸다.
스륵.
그 모습에 위상군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말한 것도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마디라도 더 잘못 뱉는다면 위상호의 분노가 폭발할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위상호는 표정을 풀었다.
그 상태에서 삼 층에 모인 모두를 바라봤다.
철혈검대와 자신의 자식을 바라보고 난 후 위상호는 입을 열었다.
“진정한 실수는 이렇게 축 처져 있는 너희의 모습이다. 차는 다시 담으면 되지만, 깨진 찻잔을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 일어나라. 그리고 찻잔 대신 술잔을 잡아라!”
위상호의 말에 흐려졌던 철혈검대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위상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 호북에서부터 대량의 곡물이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정말입니까? 형님.”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 만금 전장의 비자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쥐새끼는 호랑이를 잡은 다음 걱정해도 된다. 그러니 너희는 이번 호랑이 사냥에 만전을 기하도록.”
말을 마친 위상호는 술잔을 잡았다.
술잔을 잡은 위상호는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똑똑히 들어라. 너희의 임무는 호랑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위상군이 답하자 위상호가 흡족하게 웃었다.
“하하, 나는 언제든 호랑이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지 아느냐?”
“…….”
위상군은 조용히 형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위상호가 말을 이었다.
“나는 호랑이가 아닌 산을 원한다. 호랑이가 산중의 왕이라고는 하나 그깟 호랑이를 잡아서 뭐에 쓸 것이냐? 내가 원하는 것은 그 호랑이가 사는 산이다.”
“아.”
위상군은 탄성을 터뜨렸다.
위상군은 위상호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아까 찻물의 형태를 유지하던 그 한 수만 봐도 어떤 십대세가의 가주들보다 더 윗줄이었다.
무림삼존에 비견될 무위를 가지고 있다면 조용히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정파.
거기에 위씨세가가 필요한 것은 산산이 조각나 쓸모없어진 그들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위씨세가가 원하는 것은 온전한 그들의 경제력과 권력이었다.
위상군이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수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
달그락.
그 소리에 위상호가 고개를 돌리자 위상군이 창가를 바라보며 외쳤다.
“형님,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창가로 간 위상군은 눈매를 좁히며 상대를 확인했다.
순간 위상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들은 이전에 지나갔던 상인의 무리였다.
성문에서 제지를 받고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그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땅만 보고 천천히 저잣거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말은 지쳤는지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이것은 위상군이 예상한 일이었다.
저들이 하북성을 향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위상군은 재빨리 달려가 말을 이었다.
“저들은 어제 이곳을 지나갔던 상인입니다.”
“상인이라…….”
“아마 곡식을 싣고 있었겠지요. 하북에서 곡식이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온 불나방들일 겁니다. 그런데 성문에는 저희 위씨세가와 끈끈한 연을 맺고 있는 서 태감이 있으니 저리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것이겠지요.”
말을 마친 위상군은 살짝 눈을 빛냈다.
어찌 보면 저것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였다.
서 태감이 성문을 지키고 있는 한 곡식은 한 톨도 반입할 수 없을 테니, 저들은 저 곡식을 헐값에 처분하든가 아니면 중간에 버려야 한다.
위상군의 표정을 본 위상호가 턱짓했다.
“표정을 보니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저 상인들의 곡식을 저희가 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위상호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우의 말이 솔깃했다. 암상에서 산 곡식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지만, 장사 밑천은 다다익선이 아니던가.
잠시 생각하던 위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경험이니 지천이와 지약이를 데려가거라.”
“네, 알겠습니다. 형님.”
위상군은 형이자 가주인 위상호에게 포권한 뒤 옆을 보며 턱짓했다.
그 모습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위지천과 위지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들은 위지천은 눈치 빠르게 전낭을 챙겼다.
* * *
한빈은 객잔을 앞두고 최대한 천천히 가고 있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심미호는 지금 한빈의 행동에 미칠 지경이었다.
한빈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내린 명령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어깨까지 축 처진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수하에게 시킬 일인가?
무사의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간 것은 사실이었다.
항상 어깨를 펴고 다니라고 말한 것이 바로 한빈이었다.
아니 상인으로 변복을 했어도 똑같았다.
왜 의기소침하게 저잣거리를 걸어 다니라는 것인가?
거기에 이곳에 들어오면서 말에게 건초도 먹이지 않았다.
덕분에 수레를 끄는 말은 지금도 휘청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보다 더욱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곧 쓰러질 사람들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실력의 삼 할은 숨기라는 강호 속담이 있다만, 이것은 정말 너무했다.
한빈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호기심이 승천하는 용처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빈이 지시한 일을 보면 허튼짓은 하나도 없었다.
손동작 하나 혹은 표정까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었다.
과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무사들이 길을 막아섰다.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손바닥을 보이며 외쳤다.
“멈추시오!”
그 사내의 말에 앞서가던 한빈이 멈췄다.
한빈이 손을 들자 뒤쪽에서 따라오던 행렬도 바로 정지했다.
사내는 한빈에게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어디 상인이오?”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한빈은 상대가 위상호의 동생인 위상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씨세가 사람들은 의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여기에서 잘못 행동했다가는 준비해 놓은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한빈은 뚱한 표정으로 위상군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위상군이 말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 보아하니 성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 같아 내가 도와주려는 것이니, 마음 놓으시오.”
그의 말에도 한빈은 경계의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반쯤은 연기이고 반쯤은 진심을 담은 표정이었다.
아마 이곳이 산중이었다면, 목에 칼을 들이밀고 뺏어 갈 놈들이 바로 위씨세가였다.
꼴에 정파랍시고 도와주는 척이라니!
한빈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와준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흠, 그 물건들이 혹시 뭔지 알 수 있겠소?”
“뭐, 쌀이나 수수, 보리 같은 곡물들입니다.”
“잘됐구려. 그거 내가 사겠소.”
“이걸 다 사신다고요? 대충 이백 섬은 되는데요.”
“이백 섬이라…….”
“너무 많은가요?”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해 봅시다. 그런데 그쪽의 행수는 누구요?”
행수란 상단의 행렬을 이끄는 우두머리를 말함이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한빈이 앞에 나서자 위상군이 슬쩍 물어본 것이다.
한빈은 지체 없이 답했다.
“제가 행수입니다.”
“허,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호북 상단의 막내입니다. 아버지와 형님이 지난 상행에서 횡액을 당하셔서 제가…….”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바꾸었다.
누가 봐도 슬픔에 가득한 눈동자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설화와 청하도 고개를 돌렸다.
슬픔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한빈의 연기에 기가 차서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표정에 묻어 나올 수도 있는 법이었다.
고개를 돌리는 설화와 청화의 모습은 도리어 위상군에게 믿음을 주었다.
거기에 호북 상단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 전 산적을 만나 큰 부상을 입어 상단주와 대공자가 요양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상단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하북으로 온 호북 상단의 막내 공자임이 확실했다.
물론 얼굴을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믿음을 줬다.
그때 한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물건을 사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