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35화 (435/621)

435. 칼을 가는 공자님 (5)

장삼의 질문에 한빈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 한빈은 조용히 손가락을 펴 장삼을 가리켰다.

이해 안 가는 행동에 장삼이 물었다.

“왜 저를? 혹시 저희의 목숨이 필요한 일입니까?”

“그게 아니라, 난 장삼의 옷을 가리킨 거야. 내가 왜 적혈맹호대에 상인 복장을 입혔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긴요? 성문을 통과할 때 신분을 감춰야 할 이유가 있겠죠.”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진짜 상인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상인 역할이라니요? 주군.”

“지금부터 성문에 잠깐 들렀다가 장사를 할 거야.”

“대체 지금…….”

장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한빈이 반 토막 난 월아를 뽑았기 때문이다.

스릉.

장삼은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입술을 뗐다.

“주군,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손을 좌우로 내젓는 장삼의 모습에 한빈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장삼,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검날을 조금 더 세워야 할 것 같아서 뽑은 거야.”

“아, 그렇군요……. 휴!”

짙은 한숨을 내쉬는 장삼의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괜찮은 숫돌 있으면 좀 가져와.”

“앗, 가져오겠습니다. 주군.”

장삼은 재빨리 뛰어가 숫돌을 가져왔다.

장삼이 건넨 숫돌을 쓱 살펴본 한빈은 그 자리에서 다시 검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그 소리에 백미랑이 시선을 힐끔 돌렸다.

밤에 들었을 때는 두렵기만 한 소리였다.

그런데 날이 밝고 들어 보니 마치 절간의 목탁 소리와도 비슷했다.

그 이유는 날을 세우는 한빈의 모습 때문이었다.

한빈이 칼을 가는 모습을 보면 고승이 참선하는 듯했다.

놀라기는 설화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느꼈던 살기는 어디 가고 지금은 신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설화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토해 냈다.

“언니, 우리 공자님이 꼭 신선처럼 보여요.”

“내 눈에는 고승처럼 보이네.”

백미랑은 답하며 한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는 한빈이 하오문의 주인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녀들뿐 아니라 모두가 한빈에게 시선이 모인 상태.

적혈맹호대 대원들이나 광개도 한빈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검날을 세웠다.

사실 이런 숫돌로는 월아의 검날을 세우지 못한다.

명검인 월아는 숫돌로 갈아도 그 날이 변하지 않는다.

한빈이 세우려는 것은 월아의 검날이 아니었다.

지금 갈고 있는 것은 마음의 칼날이었다.

전생의 일이지만, 귀검대가 하나둘 죽어 갔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거기에 그들이 하북팽가를 치고 하북을 장악하려 한다는 단서까지 잡은 상태.

한빈은 위씨세가의 바닥까지 털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흘렀지만, 한빈은 동작을 멈추지 못했다.

한빈을 바라보던 이들은 눈 한번 끔뻑이지 않았다.

그만큼 한빈이 칼을 가는 모습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한빈의 동작에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광개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의 모습에 열중했다.

광개는 자신의 손목을 좌우로 틀어 가며 머릿속에 초식을 그렸다.

이상하게도 한빈이 칼을 가는 모습에서 초식이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그때였다.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은 가장 먼저 백미랑에게 걸어갔다.

모두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빈의 말을 기다렸다.

한빈은 말 대신에 쪽지를 건넸다.

“이걸 보시죠. 백 소저.”

“이게 뭔가요?”

“펴 보시면 압니다. 아무도 모르게 흑 소저와 함께 다녀오시죠. 하오문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 알겠어요. 공자님.”

백미랑은 한빈의 쪽지를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흑미랑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흑미랑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둘은 몸을 날렸다.

휙!

바람 부는 소리만 남긴 채 둘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모습에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설화가 한빈에게 물었다.

“공자님,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혹시 쪽지의 내용을 물어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아니에요. 저는 백미랑 언니와 흑미랑 언니에 대해서 궁금해서요.”

“뭐가 궁금하지?”

“둘이 자매라고 했잖아요. 어제 들어 보니 얼굴은 달라도 쌍둥이라고 하더라고요.”

“음, 그건 그렇지…….”

한빈은 팔짱을 끼고 흑미랑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그녀의 얼굴은 백미랑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이 끌고 다니는 바람에 흑미랑의 외모가 달라진 것.

뭐 조금만 지나면 회복되겠지만, 쌍둥이인데도 달리 보인다고 하니 조금은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설화가 한빈의 표정과는 관계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궁금한 건 자매인데 왜 성이 다르냐는 거죠.”

“예리한 지적이구나.”

“헤헤, 그냥 궁금해서요.”

설화가 실없이 웃자 옆에서 지켜보던 심미호가 나섰다.

“설화야. 흑미랑과 백미랑은 이름이 아니라 별호인 것 같은데……. 미랑이라면 아름다운 늑대? 뭐, 백미랑 소저의 외모와 성격을 보면 딱 들어맞는 별호일 것도 같고.”

심미호는 백미랑과 흑미랑이 사라진 곳을 조용히 바라봤다.

사실 심미호도 그녀들이 한빈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을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 * *

어디론가 달려가는 백미랑과 흑미랑.

둘 중 앞서 나가는 것은 흑미랑이었다.

백미랑은 흑미랑의 뒤를 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만 봐서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흑미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같이 달리다 보니 흑미랑의 경공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점점 둘의 거리가 벌어지자 백미랑이 외쳤다.

“흑미랑!”

“왜요? 언니!”

흑미랑이 뒤를 힐끔 돌아보자 백미랑이 손짓하며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 봐.”

“공자님이 빨리하라고 했잖아요. 쉴 틈이 어디 있어요?”

“오늘 오후 안으로만 가져오라고 했지……. 공자님이 언제 빨리하라고 했어?”

“그런가요?”

고개를 갸웃하면서 흑미랑이 멈췄다.

앞선 흑미랑에게 걸어간 백미랑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래위로 살피던 백미랑은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흑미랑, 너 솔직히 말해.”

“뭘 말이에요?”

“너 공자님한테 뭐 받았어?”

“끌려다니면서 고생만 죽도록 했는데 받긴 뭘 받아요?”

“솔직히 말해.”

흑미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은 게 없는데요.”

“그런데 무색칠음보가 왜 그렇게 달라진 거야?”

“뭐가 달라졌다고…….”

흑미랑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도 자신의 경공술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첫째는 이렇게 달려왔는데도 정순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무색칠음보가 은밀함과 신속함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하오문 최고의 경공술이긴 하지만,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지구력이었다.

그런데 호흡이 거칠어지기는커녕 마치 운기조식을 하듯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는 바로 속도였다.

그녀는 속도를 그다지 높이지 않았다.

백미랑의 표정을 보면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백미랑의 말대로 자신의 무색칠음보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흑미랑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백미랑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백미랑은 흑미랑의 완맥을 잡았다.

흑미랑은 아무렇지 않게 완맥을 내어 주었다.

맥을 확인하던 백미랑의 눈이 커졌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혈맥이 왜 이렇게 깨끗해?”

“깨끗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오문 최대의 약점이 뭔지 너도 알잖아.”

“알죠. 그건 내공심법이죠. 덕분에 혈맥에는 탁기가 잔뜩 쌓여서…….”

“그래, 상승 무공을 익히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 그나마 너와 나는 어릴 적에 영약이라도 받아먹어서 이 정도까지 올라온 거고.”

“네. 그건 그래요. 그런데 제 혈맥이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요?”

“네 혈맥에는 한 점의 탁기도 없어. 마치 어린애 같아…….”

백미랑은 흑미랑의 거칠해진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뭔가 알았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몸에서 빠져나온 건 생기가 아니라 탁기 아냐? 지금 피부가 거칠어진 것도 그렇고 외모가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고…….”

“모두 탁기가 빠져나와서 그런 거란 말이죠?”

“그것뿐이 아니라 경공술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섰어.”

“저는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러니까. 공자님이 너에게 뭘 준 거야? 잘 생각해 봐.”

“그러니까…….”

흑미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한빈이 자신에게 준 것은 없었다.

그녀가 받은 것이라고는 단지 이쪽으로 오면서 겪었던 고난밖에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흑미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 고난이 자신을 바꿔 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오면서 급하다며 자신과 영호를 굴렸지만, 그것은 분명 진심이 아닐 터.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굴렸던 것이 분명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몸 상태고 말이다.

그때 백미랑이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보니 피부도 많이 회복됐네. 탁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으니 회복 속도도 빠른 것 같아. 축하한다, 동생아.”

백미랑이 흑미랑의 어깨를 다독였다.

순간 흑미랑이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힘없이 쓰러진 동생을 본 백미랑이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게 아니라…….”

말끝을 흐린 흑미랑은 한빈이 있는 곳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흑미랑은 지금 한빈에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자세로…….

* * *

백미랑과 흑미랑을 보내고 한빈이 향한 곳은 하북성의 입구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돌아왔다.

심미호는 한빈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서 태감이란 자가 한빈의 수레를 막아섰고.

한빈은 서 태감에게 고개 숙인 채 말없이 돌아왔다.

심미호는 한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빈이 아무런 대응 없이 돌아섰기 때문이다.

심미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먼저 출발한 소대섭 대주의 수레는 하북성을 통과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돌아가셔도 되는 건가요?”

“얼굴 비쳤으면 됐지. 뭐 하러 성문으로 기어서 들어가?”

“그게 아니라 장사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성안에서 장사한다고 한 적이 없어, 심 부대주.”

“그럼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제 다 왔네. 모두 최대한 천천히 여기를 통과한다.”

한빈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 모습에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한빈이 멈춘 곳은 얼마 전 지나온 장운현이었다.

지나왔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간다니?

거기에 최대한 천천히 통과한다니?

심미호는 한빈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가장 앞에 선 한빈이 수레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한빈이 수레를 끌고 가자 장운현의 상인들이 너나없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허, 또 퇴짜 맞은 상인들이 있네. 어떻게 하나?”

“그러게 말이야.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 놈들 조금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한가?”

“이상하게 곡식만 골라서 통과시키지 않는 느낌이라서 그러지.”

“설마…….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그러다 잡혀가겠네.”

웅성거리는 이들은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때였다.

한빈의 뒤에 수레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백미랑과 흑미랑이 가져온 수레였다.

그 수레는 자연스럽게 한빈의 무리에 끼어들었다.

마치 수레바퀴가 무색칠음보를 펼치는 듯한 은밀한 동작이었다.

한빈은 뒤를 힐끔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저잣거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한참을 가던 한빈은 속도를 더욱 줄이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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