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칼을 가는 공자님 (4)
난데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한 백미랑이 물었다.
“저건 무슨 소리지? 동생.”
“언니, 저게 공자님이 칼 가는 소리라니까요.”
“무슨 칼을 저렇게 살벌하게 가는 거야?”
백미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이 백미랑을 따라 움직였다.
스윽.
스윽.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한참을 보던 흑미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러니까요. 진짜 저 소리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공자님께서 이를 가는 것도 아니고 칼을 간다고…….”
백미랑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설화가 말했다.
“공자님이 언제 이를 갈아요? 나중에 이를 거예요.”
“아, 미안하다. 설화야.”
백미랑이 손을 내젓자 옆에서 지켜보던 청화가 소리가 나는 곳을 가리켰다.
“일단 가 보죠. 언니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심미호도 뛰어왔다.
“나도 같이 가.”
잠시 후.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뒷모습을 보면 분명히 한빈이 맞았다.
그렇다면 분명 기척을 느꼈을 텐데, 한빈은 계속해서 칼을 갈고 있었다.
스윽.
스윽.
달밤에 울려 퍼지는 칼 가는 소리는 그야말로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이상한 것은 칼을 가는 한빈의 모습에 은은하게 살기가 흘러나왔다는 점이다.
설화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한빈에게 나오는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스윽.
스윽.
오직 칼을 가는 이유와 그가 기척을 듣고 모르는 척하는 것만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살기를 느끼는 것은 오직 설화밖에 없었다.
설화는 왜 자신만이 그 살기를 느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한빈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살기를 피우며 칼을 간다?
누구를 위해 칼을 가는 건지 궁금해졌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설화는 조심스럽게 한빈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한빈의 앞에 불씨만 남은 모닥불이 보였다.
불씨와 달빛이 적절하게 어우러지자 한빈이 갈고 있는 칼이 보였다.
설화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그것은 검신이 반 토막 난 월아였다.
한빈은 월아의 검날을 세우고 있었다.
스윽.
스윽.
붉은 불씨가 일렁이니 얼핏 보이는 월아가 오늘따라 붉게 보인다.
그 붉은색 검신이 마치 한빈의 가슴속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빈의 옆에 다가간 설화는 입술을 달싹였다.
괜히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는 설화.
그때 한빈이 쓱 고개를 돌렸다.
“설화 왔구나!”
“네?”
설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는 한빈의 모습에 왠지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여기 앉아.”
“거기요? 그런데 중요한 일 하시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에이, 무인이 생사결을 앞두고 검날을 세우는 일이 뭔 대수라고…….”
“생사결이요?”
“그럼, 생사결이지. 위씨세가가 죽느냐, 아니면 내가 사느냐?”
“음, 그러니까…….”
설화는 한빈의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위씨세가가 죽는다는 말이랑 공자님이 산다는 말이랑, 둘 다 똑같은 말 아니에요?”
“내가 죽는다는 건 애초에 계획에 없으니까.”
“아…….”
설화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주변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자와 고개를 갸웃하는 자로 나뉘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는 설화와 청화 그리고 심미호였다.
반면 백미랑과 흑미랑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청화가 슬쩍 나섰다.
“우리 공자님은 원래 실패를 계획에 두지 않아요.”
“그, 그렇구나…….”
백미랑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 모습에 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공자님, 어디 가세요?”
“적혈맹호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합류해야 할 것 아니야. 그러고 보니 배고프네.”
한빈은 씩 웃으며 배를 어루만졌다.
설화는 재빨리 한빈의 뒤를 따랐다.
“공자님, 같이 가요.”
한빈과 설화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청화가 말했다.
“저희도 빨리 가요, 언니들.”
“그래, 우리도 주군을 따라가자.”
심미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한빈이 사라진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앞서 몇 발짝 걸어가던 청화가 멈췄다.
걸음을 멈춘 청화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 사람은 뭐예요?”
청화가 뒤쪽을 가리키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중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사람이라니?”
“저기 기척이 느껴져요.”
“아무리 봐도 없는데…….”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청화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흑미랑이 다급하게 청화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타다닥.
다급히 달려가는 흑미랑을 모두가 뒤쫓았다.
흑미랑이 도착한 곳은 한빈이 칼을 갈던 모닥불 근처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흑미랑은 주변 수풀을 뒤지다가 걸음을 멈췄다.
심미호는 흑미랑이 바라보는 곳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뭐예요?”
심미호가 가리킨 곳에는 누군가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다시 수풀을 비췄다.
동시에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내의 얼굴을 보던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흑미랑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사내를 바라봤다.
백미랑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는 사내와 흑미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들이 이상한 행동에 흑미랑이 황당하다는 듯 백미랑을 쳐다봤다.
“언니, 왜 그렇게 봐요?”
“이 사람하고 네 얼굴이 비슷해서 그렇지. 어딘가 비슷해…….”
백미랑이 말끝을 흐리자, 청화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알 것 같아요. 두 분 다 증세가 똑같아요.”
“증세라니?”
갑작스러운 단어에 흑미랑이 깜짝 놀라 묻자 청화가 답했다.
“두 분 다 꼭 독에 당한 것 같아요.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고 피부는 독기에 잠식을 당한 것처럼 삭아 있고…….”
청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흑미랑이 눈에 눈물이 고였기 때문이다.
“아, 그건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라고 아까 말했는데……. 잠만 못 잔 게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 달리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고!”
그녀의 외침에 모두는 고개를 돌렸다.
흑미랑은 수풀에서 뻗은 자를 어깨에 걸쳐 멨다.
그러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휴……. 이제 가자고요. 나름 전우인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들쳐 멘 사내는 다름 아닌 영호였다.
호북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영호는 한숨도 못 잤다.
거기에 흑미랑보다도 경공술의 경지가 낮았기에 더 고생해야 했다.
영호가 뒤처질 때마다 한빈이 했던 말을 흑미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빈은 딱 한마디만 얘기했다.
그것은 바로 ‘해약’이라는 단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곧 쓰러질 듯 휘청이던 영호는 단번에 살아났다.
덕분에 영호의 몸은 흑미랑보다도 몇 배 더 상한 상태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호가 이곳까지 어떻게 따라왔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흑미랑은 조용히 한빈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혹시…….
한빈이 영호의 등을 후려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저 재촉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부의 혈맥을 뚫어 주는 동작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그녀였다.
순간 흑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아, 맞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에 앞서가던 백미랑이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구시렁대는 거야?”
“아니에요, 언니.”
영호를 들쳐 멘 흑미랑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적혈맹호대가 있는 공터에 모두가 모였다.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 넣은 채 모두를 바라봤다.
한빈의 시선과 적혈맹호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빈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한빈이 말했다.
“내일부터는 목숨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 일단 오늘부터는 쉬도록.”
그 외침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동시에 외쳤다.
“존명!”
그들의 외침은 마치 한 명이 외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흑미랑과 백미랑이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잘 다듬어진 무력대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감탄하고 있을 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심 부대주는 백아주를 내와라.”
한빈이 심미호를 바라보자 심미호는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그곳에는 임무에 성공하면 마시기 위해 준비한 백아주가 담겨 있었다.
한빈은 상자 속 백색 호리병을 바라봤다.
족히 오십 병은 되어 보이는 백아주가 은은한 향기를 내고 있었다.
한빈은 병을 하나 잡았다.
그러고는 그 호리병을 멀리 있는 대원에게 쏘아 냈다.
휙.
그러고는 외쳤다.
“장삼!”
순간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적혈맹호대 대원인 장삼이 있는 쪽과는 정반대로 날아가는 호리병.
하늘 높이 떠올랐던 호리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지면을 향한다.
순간 모두가 입을 벌렸다.
이대로라면 호리병에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상태였다.
그때 반대쪽에 있는 장삼이 달려왔다.
파바-박.
번개처럼 달려온 장삼이 몸을 날렸다.
휘릭.
호리병은 바닥에서 한 치를 남겨 둔 상태에서 장삼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탁.
장삼이 호리병을 잡자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옷을 털고 일어난 장삼이 웃었다.
“주군 덕분입니다. 그리고 백미랑 소저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호리병.
알고 보니 그것은 시험이었다.
지금 그들은 백미랑이 전해 준 하오문의 경공술에 관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한빈이 다음 호리병을 잡았을 때 심미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장삼이 저걸 못 잡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습니까?”
심미호는 조심스럽게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이것은 시험.
상이 있으면 벌도 있기 마련이었다.
심미호의 표정을 본 한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긴? 강호에서 은퇴해야지.”
“헉.”
“대원 중 가장 연장자인 장삼이 성공했으니 나머지는 뭐…….”
한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남은 적혈맹호대 대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못 받으면 강호에서 은퇴하는 게 아니라 세상과 이별할 줄 알라고.”
말을 마친 한빈은 백발백중의 묘용을 담아 호리병을 던졌다.
“검오가 받아라!”
순간 공터를 울리는 발소리.
타다닥.
그렇게 한빈의 경공술 시험은 계속되었다.
한빈이 내린 시험이 끝난 것은 한 시진 후였다.
시험이 끝나자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남은 백아주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연 한빈이 시원하게 백아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동시에 적혈맹호대 대원들도 똑같이 백아주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났다.
가장 눈을 번뜩이고 있는 것은 적혈맹호대의 대원 중 가장 연장자인 장삼이었다.
백아주를 다 비운 장삼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을 처음 만났을 때 장삼은 강호에서 은퇴하려고 결심했었다.
몸도 따라 주지 않았고, 하북팽가 내에서는 희망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뀐 한빈 덕분에 일류의 경지를 넘어 이제는 절정에 올라 있었다.
거기에 최근에는 젊은 무사에 뒤지지 않은 경공술까지 익히게 되었다.
장삼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빈이 말한 결전에서 꼭 승리하리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달빛은 다시 구름 속에 가려졌지만, 장삼을 비롯한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눈은 더욱 빛났다.
* * *
아침이 밝아 오자 누구보다 더 빨리 일어난 한빈이 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장소를 옮겨 판을 깔아 보자구!”
한빈의 외침에 장삼은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주군, 판을 까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