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31화 (431/621)

431. 칼을 가는 공자님 (1)

망원 평야의 울리는 무수히 많은 발소리.

타다닥.

타다닥.

흑미랑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전쟁이라도 난 건가요?”

“어쩌면 그럴지도요.”

한빈이 씩 웃자 옆에서 대화를 듣던 영호가 미간을 좁혔다.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정도의 함성이면…….”

“좋은 구경 놔두고 어딜 가요?”

흑미랑이 영호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영호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켰다.

“지금 흑미랑 누님이 전쟁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내빼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전쟁이라고 한 건 그 정도로 치열하다고 한 거지, 진짜 전쟁이라고 한 게…….”

흑미랑이 말끝을 흐리며 눈매를 좁혔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기에 영호는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누님.”

“지금, 왜 자꾸 누님이라고 해요?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여요?”

흑미랑의 눈빛은 폭발 직전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흑미랑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하루가 다르게 거칠어지는 피부.

이제는 면사를 벗고 다녀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전에는 자신의 미모가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점점 거칠어지는 자신의 피부가 부담스러운 그녀였다.

얼굴을 만져 보면 마치 모래알을 더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영호가 누님이라 하자 그녀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영호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그것은 오답 같았기에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왜 말을 못 해요?”

“강호라는 게 무공의 고하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딱 봐도 저보다 흑 누님이 고수이신데…….”

영호는 중간에 말을 끊고 흑미랑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흑미랑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가 재빨리 하던 말을 이었다.

“당연히 누님이라고 불러야죠.”

“흠, 그건 그런데, 그냥 흑 소저라고 부르세요. 누님이라고 하니까 괜히 제가 나이 든 것 같잖아요.”

“아, 알겠습니다. 흑 누, 아니 소저.”

영호가 깊숙이 포권했다.

이런 정중한 자세는 모두 계약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호는 강남사호 중 일호가 전한 그 끔찍한 고통이 꼭 자신의 것인 것 같았다.

살짝 어깨를 떨던 영호의 눈이 커졌다.

“저, 저기 보십시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헉.”

흑미랑도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전에 들렸던 발소리보다도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사람들을 본 영호는 자신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올렸다.

영호의 눈에는 그들이 마치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난 황소처럼 농기구를 들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민란이라도 일어났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타다닥.

수만 마리의 군마들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영호는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때 한빈이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순간 영호가 고개를 돌려 한빈의 표정을 확인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영호가 검집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머릿수에는 당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메뚜기 떼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면 아무리 고수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영호는 겨울비를 맞은 까마귀처럼 계속해서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넓은 평야를 새까맣게 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 중에는 거지까지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오자, 영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찔끔 감았다.

그때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다닥.

동시에 귓가에 울리는 발소리.

그것도 잠시, 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함성이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을 찔끔 뜬 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성난 군중들은 영호와 한빈 그리고 흑미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그들이 내는 함성이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였다.

웅성거리던 그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 쌀이 뭉텅이로 떨어져 있다!”

“여기도!”

“이제 살았네!”

“그래, 올해 겨울은 따습게 보낼 수 있겠어. 만세!”

그들은 만세를 부르며 땅에 떨어진 곡물을 줍기 시작했다.

아직 타작도 안 한 곡물들을 줍기 시작한 이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영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저게 어찌 된 겁니까?”

“아까 수레에 구멍을 뚫었잖아.”

“네? 그건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겁니까?”

“배고픈 자가 한둘이겠어? 그래서 소문을 좀 냈지.”

“흠…….”

영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영호의 머릿속에서 이제까지 한빈이 벌였던 사건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만난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닐 수 있었다.

그리 능청스럽게 서생 행세를 할 정도면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레에 구멍을 내면서 영호는 살짝 놀랐었다.

갈대숲이 우거진 이곳이 아니라면 수레 바닥에 구멍이 뚫린 것을 위씨세가 일행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위씨세가의 행렬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었다

수레 바닥에 구멍을 낸 이유를, 단지 적의 전력을 약화하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땅에 떨어진 곡식들마저 누군가 주워 가게 설계했다.

영호는 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가 궁금한데? 편하게 말해.”

“저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준다고 해서 공자님께 돌아가는 이익은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민초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말하면 믿을 텐가?”

한빈이 씩 웃자 영호는 입을 딱 벌렸다.

한빈이 왜 생불이라 불리는지를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영호의 머릿속에 희망이 꿈틀댔다.

생불이라 불리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면, 언젠가는 심인멸혼단을 완벽하게 해독해 줄 것이라 믿었다.

강호에서는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하다지만, 소문대로라면 그는 천하제일의 명의.

영호가 머릿속에 희망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함성이 점점 커졌다.

“뒤에 사람도 주워 갈 수 있게 남겨 놓자고.”

“그래, 어차피 한 번에 못 가지고 가지 않나?”

“설마설마하고 왔는데…….”

“그래, 쥐구멍에서 볕 들 날이 있다고. 이제 살았네.”

“청운사신의 말이 진짜였어. 청운사신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진룡소협도 끼워 주게.”

“그렇지, 청운사신의 제자이니 진룡소협도 만세일세.”

“그래, 진룡소협이 아니었으면 이 장소도 몰랐을 것이네.”

그들의 말에 영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진룡소협이 누굽니까?”

“바로 난데.”

“네?”

“그래도 누가 줬는지는 알고 먹어야 할 것 아니야.”

“헉.”

영호가 입을 벌렸다.

한빈이 생불이 아닌 아수라의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우리도 몇 개 주워 볼까요?”

* * *

하루 뒤, 공손명후의 처소.

공손명후는 어제 일어난 강호의 기이한 일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어야 했다.

호북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갑자기 황제 폐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황제의 이름으로 곡식을 풀었기 때문.

그것도 망원 평야의 갈대숲에 말이다.

하나, 이것은 황제의 지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

묘한 것은 그것이 청운사신이란 정파의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제자가 자신과 며칠 전 마주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아니던가?

혹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위씨세가의 가주에게 돈을 빌려줬다.

그 곡식들이 위씨세가의 가주가 흘리고 간 거라면. 아마도 돈을 갚기는 힘들 터였다.

곡식을 산 이유는 분명히 하북에서 돈을 벌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가 곡식을 산 후 북쪽을 향해 떠난 것을 보면 확실했다. 그런데 장사 밑천을 모두 잃었다면?

돈을 못 갚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계약서에 나와 있는 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예 계약 하나가 추가된다는 의미였다.

이게 모두 팽 공자의 계략?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의문이 꼬리를 물자 공손명후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짚었다.

조정에는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북 지방에서 일어난 강호인들의 분란에 이은, 호북 지방에서의 기이한 사건.

이 모든 사건은 공손명후가 보고해야 할 일이었다.

이곳에 있을 때는 암상의 주인 역할을 해야 하지만, 조정에서의 신분은 암행 업무를 맡은 감찰사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흔들리는 호롱불을 바라봤다.

그 호롱불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역시 조정의 일은 나와 맞지 않아!”

그가 막 혼잣말을 뱉었을 때였다.

덜컹하고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지금 들어온 사내의 모습 중 금빛 허리띠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바로 금의위의 무사였다.

공손명후는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안후 장령님 아닙니까?”

안후는 감찰사와 황제 사이의 연락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장령이었다.

연락을 담당할 자는 보통 금의위의 무사 중 무공이 고강한 자를 뽑는다.

눈앞에 있는 안후는 무공뿐 아니라 책략에도 능한 자였다.

“감찰사 어르신, 폐하의 성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안후의 말이 끝나자 공손명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로 예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공손명후가 외쳤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습니다!”

“…….”

안후는 아무 말 없이 황금빛 봉투를 꺼냈다.

그 모습에 공손명후는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안후는 황금빛 봉투 바로 풀어 안에 있는 서찰을 꺼냈다.

그는 황제가 보낸 서찰을 작게 낭독하기 시작했다.

“강호의 감찰을 맡은 공손명후에게 전하는 말이니…….”

안후가 읽어 나가는 서찰의 내용에 공손명후는 눈을 크게 떴다.

묘하게도 이번 일을 황제가 알고 있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서찰을 읽어 나갔다.

“……과인은 감찰사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으며, 또한 과인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푼 인물을 찾아 포상하라.”

안후는 서찰을 다 읽고는 그것을 공손명후에게 보였다.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기 위함이었다.

공손명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 서찰은 없애겠습니다.”

말을 마친 안후가 서찰의 끝을 손끝으로 비빈다.

순간 작은 불꽃이 일었다.

삼매진화의 수법이었다.

화르륵.

눈 깜짝할 사이에 서찰이 재가 되었다.

안후는 다 탄 서찰을 확인한 후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공손명후는 팔짱을 끼고 황제의 명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황제가 보낸 서찰의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북에서 일어나는 일은 황제가 직접 관여하겠다는 것과 호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포상이었다.

“흠.”

공손명후는 턱을 어루만졌다.

이 모든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 * *

이틀 뒤 하북의 장운현.

하북성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객잔 안.

객잔의 모든 자리를 검은 복장의 사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삼 층으로 이루어진 객잔의 일 층에서부터 삼 층까지 모두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차지하고 있자, 일반 손님들은 안으로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인도 슬슬 무인들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

이미 선금을 두둑이 받았기에 손님들이 돌아가는 것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객잔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긴장한 모습으로 마른침을 삼키던 주인은 삼 층의 중앙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딱 세 명만은 하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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