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 이삭 줍는 공자님 (9)
한빈이 거지의 눈앞에 붉은색 매듭을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거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던 흑미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 공자님. 이 거지는 부지런한 게 아니잖아요. 허리에 매듭도 없는 걸 보면 개방의 거지도 아니고요.”
“잠시 기다리시죠.”
한빈은 씩 웃으며 품에서 철천 한 닢을 꺼냈다.
그는 철전을 거지의 코앞에 갖다 댔다.
순간 거지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거지의 손이 서서히 철전에 향하다가 갑자기 빨라졌다.
휙.
순간 흑미랑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저건, 구걸응조수?”
흑미랑의 말에도 거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빈과 거지는 빠르게 한 수씩을 주고받았다.
구걸응조수.
이 초식은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넙죽 받아먹는 개방의 조법이었다.
거지는 구걸응조수로 먹이를 낚아채듯 덤벼들었다.
물론 먹이는 한빈이 아닌, 한빈이 가지고 있는 철전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을 피해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휙, 휙.
한빈과 거지의 손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잡힐 듯하면서도 한빈의 손은 눈 깜짝할 사이의 구걸응조수에서 벗어났다.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잡힐 듯하면서도 안 잡히는 모습이 마치 거지를 놀리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흑미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구걸응조수는 개방의 제자 중에도 사결 제자 이상만 익힐 수 있는 수법이었다.
거기에 지금 철전을 낚아채려는 거지의 수법은 누가 봐도 고강했다.
그런데 매듭도 없는 거지가 어떻게…….
물론 더 놀라운 것은 한빈이 거지에게 철전을 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녀는 지금의 수법이 한빈의 전광석화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사천 지부의 백미랑에게 정보를 받기는 했어도, 하북팽가 사 공자의 무공 성취가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었다.
이건 초식 같으면서도 초식이 아니었다.
미꾸라지처럼 공격에서 벗어나는 수법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흑미랑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녀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을 때였다.
거지의 숨이 거칠어졌다.
“헉, 헉.”
마치 복날 강아지처럼 거지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철전 쟁탈전 때문에 거지는 체력의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거지는 마치 점혈을 당한 것처럼 허공을 향한 손 그대로 멈춰 있었다.
한빈은 손을 멈추고 그윽한 눈으로 거지를 바라봤다.
그들의 모습에 흑미랑은 그녀대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멈춘 듯 모두의 동작이 멈춰 있을 때, 거지가 입을 열었다.
“주려면 주고 말려면 말지, 이게 무슨 짓이요. 자는 거지 깨워 놓고…….”
물레방아 돌듯 거지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곤히 자고 있었는데 돈 냄새로 깨워 놓고는 놀려 대었으니, 거지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거지가 억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초면에……. 잘 지냈냐니?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가 초면인가요?”
“어, 어디서 본 얼굴인데…….”
슬쩍 말끝을 흐리는 거지를 본 한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으니.”
거지가 반사적으로 답을 하자, 한빈도 씩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천장이네.”
말을 마친 거지가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거지의 눈이 커졌다.
“헉, 그 목소리는…….”
“네, 맞습니다.”
“팽 공자가 여기는 웬일입니까? 그 얼굴은 또 뭐고요? 변장한 겁니까?”
거지는 한빈을 아래위로 살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는 소개는 여기에 무슨 일입니까?”
한빈이 상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는 사천 나루터에서 봤던 개방의 소개였다.
사천의 정보를 총괄하는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아직 모른다.
한빈의 질문에 소개는 뭔가 생각났는지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몇 달 전 있었던 나루터에서의 싸움을 소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실 소개는 한빈과의 만남이 기연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소개는 사천의 정보를 담당하던 개방의 사결 제자였다.
소개는 나루터에서 한빈이 건넨 야명주 덕분에 며칠은 행복했다.
그 정도의 야명주면 사천의 거지들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편안히 몇 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편안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바로 며칠 뒤에 알게 되었다.
한빈의 요구는 개방에 계속 날아왔다.
한빈이 직접 소개에게 전한 것은 아니지만, 개방은 무지막지한 임무에 시달려야 했다.
덕분에 개방의 원로인 홍칠개는 야명주를 받아먹은 놈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덕분에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한빈이 띄우는 전서구를 중심으로, 소개는 계속해서 이동해 왔던 것이다.
거기에 정보도 수집해야 하니 움막에 들어가서 쉴 틈이 없었다.
야명주를 혼자 먹은 것도 아니고…….
소개는 눈물이 아른거렸다.
그런데 한빈을 여기에서 만난 것이다.
거기에 변장을 한 듯한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눈앞을 덮은 희미한 눈물 사이로 한빈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 띤 얼굴로 한빈이 다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소개.”
“저는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규칙은 규칙이니…….”
소개는 손을 슬쩍 내밀었다.
한빈은 그의 손에 철전을 놓았다.
툭.
소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황당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아니, 이거 말고요.”
“아, 장기짝 말이군요. 그건 지난번에 써서 없습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소개가 말한 장기짝은 개방의 정보원들과 접선할 때 쓰이는 도구였다.
한빈은 지난번 사천의 나루터에서 그 장기짝을 썼었다.
소개가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던진다.
“그럼 장기짝을 찾고 나서 오시지요.”
“혹시 이 붉은 매듭 말입니다. 눈에 많이 익지 않은가요?”
“붉은 매듭이야. 뭐…….”
소개가 말끝을 흐리며 코끝을 실룩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씩 웃었다.
“매우 익숙하지요. 우리 사부님의 징표입니다. 그런데 그냥 모른 척하시겠다고요?”
“헉.”
헛숨을 들이켠 소개가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그에게 서찰 하나를 건넸다.
“이대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지금 펴 보셔도 됩니다.”
“이게 무슨…….”
서찰을 펴 보던 소개가 눈을 크게 떴다.
서찰에 적혀 있는 것은 누군가 곡물을 뿌린다는 것이었다.
더해, 장소와 일시까지 적혀 있었다.
소개는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청운사신이 중생을 가엽게 여기셔서 망원 평야에 곡물이 뿌린다는 말씀이…….”
소개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빈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후였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 두 개의 점이 보인다.
아마도 한빈과 옆에 있던 여인인 것 같았다.
소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의 경공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청운사신이 뿌린다는 곡식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이것은 무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자선사업이었다.
* * *
이틀 후, 망원 평야.
이곳이 망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울창하게 뻗은 갈대 덕분에 원망도 묻힌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고사에 따르면 한과 초가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다가 울창한 자란 갈대 때문에 아군과 적군을 몰라보고 전쟁을 멈췄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은 망원이라 불리었다.
사람들은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보며 그것이 모두 곡물이었으면 어떨까를 상상한다.
하지만 갈대 이외에 어떤 종자도 이곳 땅이 허용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저주받았다고 할 수도 있는 곳.
중요한 점은 호북에서 하남을 넘어가는 대규모 상단이 이곳을 지난다는 점이었다.
한과 초의 전쟁 이후 이곳에서는 암묵적으로 살상이 금지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암묵적인 규칙 덕분에 상단은 이곳을 지나갈 때만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갈대밭을 세 명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휙휙.
갈대 사이를 지나는 두 남녀의 뒤에는 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연신 부스럭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그 숨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영호였다.
영호는 지금 미칠 것만 같았다.
서생의 정체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안 것은 불과 이틀 전이였다.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한 일은 바로…….
계약서를 쓰는 일이었다.
말 한마디로는 천 냥 빚을 갚지만, 문서로는 만 냥 빚도 갚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북팽가 사 공자가 남긴 말이었다.
위씨세가에서 앙숙이었던 강남사호가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도 바로 그 계약서를 본 순간이었다.
계약서의 예시라고 보여 준 게 강남사호 중 일호가 쓴 것이었다.
한마디로 철저한 노예 계약.
차라리 호북의 만금 전장에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아니, 서생으로 보이는 저 악적의 돈에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영호는 계속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그때였다.
앞서가선 한빈과 흑미랑이 멈췄다.
탁.
갑작스럽게 정지하자 영호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그때 한빈이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순간 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깨를 잡은 한빈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려 보면 한빈이 자신에게 해코지한 것은 없었다.
심인멸혼단을 먹인 것은 제외하면 말이다.
뭐, 세상에 둘도 없는 극독을 먹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것만 빼면 한빈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한빈을 죽이려던 것에 비하면?
한빈은 도리어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저 정도의 고수가 자신이 해코지하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절대 아닐 것이었다.
하북에서 생불이라 불리던 한빈의 명성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 무사, 항상 몸을 잘 챙겨야지.”
이제 한빈은 말도 놓았다.
어찌 보면 주종 관계에 있어 당연할 일.
영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그래, 항상 조심해야 해. 내가 죽으라고 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다는 거 명심하고.”
“아, 알겠습니다.”
영호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한빈이 단검 하나를 건넸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바닥 좀 뚫어.”
“뚫다니요?”
한빈은 멀리서 오는 수레를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키는 곳에는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레 위에 곧게 솟은 깃발 덕분에 그것이 누구의 수레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깃발은 바로 위씨세가의 깃발이었다.
그때 한빈이 영호의 어깨를 쳤다.
탁.
밀듯이 치는 한빈의 동작에 영호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뒤를 따라올 때는 몰랐는데 이상하리만큼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영호는 재빨리 진기를 다리에 집중시키고 경공을 펼쳤다.
순간 영호가 갈대 사이로 사라졌다.
사사 삭.
* * *
세 시진 뒤. 수레가 모두 지나갔지만, 한빈은 팔짱을 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 흑미랑도 산더미처럼 의문을 가졌다.
팔짱을 끼고 강태공처럼 갈대숲을 바라보고 있는 한빈에게 흑미랑이 물었다.
“공자님, 어떻게 위상호가 저 무리에 없다는 걸 아신 거예요?”
이 질문은 중요했다.
저 무리에 위상호가 있었다면 영호가 수레의 바닥에 구멍을 내지 못했을 테니까.
한빈이 씩 웃으며 답했다.
“느낌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한빈이 공손명후에게 전한 계약서.
즉 위상호가 서명한 계약서에는 천리추종향이 묻어 있었다.
덕분에 한빈은 위상호가 자리를 비웠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위상호가 있었다면 영호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영호는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흑미랑이 말을 이었다.
“아, 느낌이군요. 그런데 지금 누굴 기다리시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빈이 빙긋 웃을 때였다.
멀리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