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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29화 (429/621)

429. 이삭 줍는 공자님 (8)

토끼 가면 속 공손명후는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그는 사실 한빈의 부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빈의 부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러 번에 나눠서 나가야 할 곡물의 양을 한 번에 몰아달라는 것이었다.

뭐, 그리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암상의 경매장에 나온 곡물의 주인은 황실이었다.

그 곡물의 경매는 공손명후가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공손명후는 적은 양의 곡물이 오간 경매에서 한빈이 손을 쓸 줄 알았다.

그런데 한빈이 두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공손명후는 그런 한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북의 곡물 시장이 아슬아슬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공손명후도 알고 있었다.

앞선 곡물을 손에 넣었다면 하북팽가는 식량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혹시?

공손명후는 토끼 가면 속의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가장 주시해야 할 사람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지막 남은 곡물은 이제까지 거래되었던 양의 열 배.

그만큼 사람들의 눈치 싸움이 치열해졌다.

경매가 시작되자 저마다 계속 깃발을 들며 응찰을 한다.

휙, 휙.

깃발을 올리는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그것도 잠시, 황금 백 냥이 넘어가자 사람들은 손이 점점 느려졌다.

하지만, 딱 둘만은 눈치를 안 보고 응찰을 나타내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공손명후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쌓여 갔다.

지금 깃발을 들고 있는 둘이 누군지 공손명후는 알고 있었다.

‘사’라는 숫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은 위씨세가의 가주였고, ‘구’라는 쓰인 숫자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이곳 암상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라면 그것은 반 만 사실이었다.

강호인들 간의 익명성은 철저히 보장된다.

하지만 나라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구매하는지.

그들의 자금 출처는 어디인지 등을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은 나라가 중재할 상황은 아니었다.

반역에 준하는 묘한 낌새가 비쳤을 때만 황제에게 보고되는 것이 규칙이었다.

경매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단위가 높았기에 생각할 틈을 줘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것이다.

휙.

다시 깃발이 올라갔다.

공손명후는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말을 이었다.

“흠, 이제부터는 단위를 바꿔 보겠습니다. 황금 열 냥 단위로 올리겠습니다. 황금 백 냥까지 나왔으니 황금 열 냥 단위로 호가를 정하지요. 황금 백열 냥 있으십니까?”

획.

위씨세가의 위상호가 깃발을 들어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따라 깃발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번 경매의 경쟁자는 단둘만이 남았다.

위상호는 깃발을 들면서도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 많은 곡물을 손에 넣으려는 것은 하북에서 시작해서 강북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것이지.

자신이 손해 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위상호에게는 딱 정해진 선이 있었다.

그리고 경매 가격은 그 선을 향해서 거침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위상호는 지금의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모든 판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판을 깨려고 들어온다?

위상호는 여우 가면을 쓴 자를 바라봤다.

그는 ‘구’라 쓰인 깃발을 든 자였다.

위상호는 왜 그자가 아홉이란 숫자가 적힌 깃발을 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자는 구미호였다.

그자의 의도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었다.

위상호가 깔아 놓은 판에 숟가락을 올려놓으려는 자. 아니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고 훼방 놓으려는 경쟁 가문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여우 가면을 쓴 자가 깃발을 드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경매장 안의 긴장감은 최고조로 달했다.

그중 가장 긴장한 것은 사실 위상호가 아니었다.

가장 긴장한 것은 강남사호 중 일호였다.

그는 몰래 경매장의 뒤편에 주머니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그 주머니를 집어 간 것은 흑미랑.

흑미랑은 씩 웃으며 일호에게 눈짓했다.

빨리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그들만이 아는 은밀한 거래였다.

일호는 이를 악물었다.

가주 위상호가 경매 때문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총관이 들고 있던 전낭을 슬쩍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서생이 내린 지시 때문이었다.

이제는 서생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일호였다.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경매장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줄기차게 깃발을 들던 여우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경매를 포기했다.

동시에 진행을 하던 토끼 가면의 사내가 위상호를 가리켰다.

“사 번 깃발의 참가자께서 마지막 곡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경매가 마무리되는 대로 만금 전장의 전표로 해당 금액을 입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에 위상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기세등등해진 위상호와 달리, 공손명후의 가면 뒤 표정은 변화무쌍했다.

지금의 거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기껏 불을 질러 놓고 마지막에는 내뺀다라?

* * *

경매가 끝난 전각의 뒤편.

그곳에서는 암상의 상주 공손명후와 경매의 승자가 된 위상호가 가면을 쓴 채 마주 보고 있었다.

경매의 승자는 즉시 경매장의 뒤편에서 돈을 지급하고 열쇠와 창고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넘겨받는다.

만약에 경매의 승자가 돈을 지급할 능력이 없다면?

경매에서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부른 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즉, 여우 가면을 쓴 자에게 곡물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공손명후가 한 설명이었다. 그는 설명의 마무리를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주셔야 할 액수는 황금 오백 냥입니다.”

말을 마친 공손명후는 곰 가면을 쓴 위상호를 바라봤다.

그것은 한빈의 두 번째 부탁 때문이었다.

곰 가면을 쓴 위상호가 옆에 총관으로 보이는 이에게 턱짓한다.

총관은 재빨리 품 안을 뒤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총관의 당황한 눈빛이 가면 너머로 삐져나왔다.

“가, 가……. 전낭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위상호도 당황한 듯 총관을 바라봤다.

자신이 모든 판을 짰다지만, 총관이 돈을 잃어버릴 것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때 토끼 가면을 쓴 공손명후의 눈빛도 살짝 떨렸다. 한빈은 누군가가 돈이 부족하면 계약서와 함께 돈을 빌려주라 부탁했다.

그렇다면?

공손명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혹시 지급할 능력이 없으십니까? 암상에서는 드문 일이군요.”

“잠시만 기다리시오.”

손을 들어 말을 막은 위상호는 재빨리 총관에게 눈짓했다.

총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저었다.

상황은 본 공손명후가 슬쩍 운을 띄웠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혹시 돈을 빌리시겠다고 하면 주선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희 암상이 중계하는 품목 중에는 돈도 포함되니까요. 그런데 황금 오백 냥이라면 딱 한 곳밖에는 없군요.”

공손명후는 슬쩍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것은 물론 한빈이 미리 공손명후에게 건네준 계약서였다.

위상호는 지체 없이 그 계약서를 읽었다.

순간 위상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글씨체는 낯설었지만, 내용이 묘하게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

돈을 못 갚으면 가문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위씨세가는 황금 오백 냥에 무너질 가문이 아니었다.

위상호는 재빨리 그곳에 서명했다.

그 모습에 공손명후는 전낭을 내밀었다.

잠시 후, 그 전낭은 다시 공손명후에게 왔다.

이리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서로 간의 계약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암상은 그저 중계만 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남겨야 했다.

마지막으로 공손명후는 위상호에게 지도와 열쇠를 넘겼다.

* * *

모든 거래가 끝나고 공손명후가 처소로 돌아갔을 때 한빈이 나타났다.

“공손 공자, 고맙습니다.”

“뭐, 팽 공자님의 부탁이라면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도와야지요.”

“정말입니까?”

“그, 그건 나중에 상황을 봐 가면서 도와드린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공손명후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별일이 없었지만, 한빈을 아무 조건 없이 돕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하하. 오늘은 오래간만에 봤는데, 술이나 한잔하죠.”

“그럽시다. 그런데…….”

공손명후가 문 앞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혹시 저분은 안 불러도 되겠습니까?”

“뭐, 공손 공자가 괜찮다면 부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간 밖에 있던 흑미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흑미랑이 중간에 끼었지만, 오랜만에 둘의 술자리는 식을 줄 몰랐다.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공손명후는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팽 공자님, 그런데 아까 나간 위씨세가 사람들은 그냥 놔두시는 겁니까?”

“원래 밥이 익으려면 마지막 뜸이 중요한 법이지요. 다급하게 솥을 열면 밥이 설익기 마련입니다.”

“흠…….”

공손명후는 헛기침하며 뭔가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흑미랑은 눈을 멀뚱거리며 둘을 번갈아 봤다.

호기심이 그녀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하오문 호북 지부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도저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술을 마시던 중,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공손명후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팽 공자님.”

“위상호 가주가 급했나 보네요.”

“위상호 가주라니요?”

“황급히 방향을 바꿔 하북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팽 공자님.”

“그건 비밀입니다.”

한빈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그렇게 황급히 가십니까?”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으러 갑니다. 그리고 그 계약서는 제게 주시지요.”

한빈이 손을 내밀자, 공손명후가 위상호가 날인한 계약서를 건넸다.

한빈은 그 계약서의 향기를 음미하듯 코끝에 갖다 대더니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 삭.

동시에 흑미랑도 한빈의 뒤를 따랐다.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 이제 공손명후의 그림자만이 남았다.

그는 달빛 사이로 사라진 한빈을 보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 * *

한빈이 향한 곳은 저잣거리였다.

한빈의 뒤에는 장신구처럼 따라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영호였다.

강남사호에게 몽유병과 약에 관한 사정을 들었지만, 영호는 그것을 한빈에게 말할 수 없었다.

영호는 강남사호의 무위를 알고 있었다.

정면 대결에서는 영호가 일호와 동수를 이룬다.

그런데 그런 일호, 아니 강남사호 전체가 한빈을 당해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아는 척을 해 봤자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영호는 한빈에게 심인멸혼단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 한빈은 휘적휘적 인적이 드문 저잣거리를 걸어 다니며 주변을 살폈다.

저잣거리에는 아직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흑미랑이 물었다.

“공자님, 뭐 하세요? 이 시간에 누가 있다고요.”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이들은 이곳에서 누굴까요?”

“그야 장사치들이죠.”

흑미랑이 굳게 닫힌 점포들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은 누가 봐도 사실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이들은 장사꾼들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닙니다, 흑 소저.”

“그럼 누가 제일 부지런한데요?”

“바로 거지들이지요.”

한빈은 씩 웃으며 담벼락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빈의 말대로 거지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흑미랑은 기가 막혔다.

저건 부지런한 게 아니라 게으른 것이었다.

게을러서 움막으로도 기어 들어가지 못해 꾸벅꾸벅 조는 거지가 분명했다.

한빈이 그 거지의 앞에 섰지만, 거지는 꿈쩍도 안 하고 졸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은 매듭을 하나 꺼내 거지의 눈앞에 흔들었다.

그것은 붉은색 매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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