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428화 (428/621)

428. 이삭 줍는 공자님 (7)

물론 강남사호의 얼굴에 붓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은 한빈에게 당한 상처가 꽤 깊어서였다.

하지만 그것을 위상호가 알 리 없었다.

위상호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가주님을 뵈옵니다.”

“인사는 필요 없고 요점만 말하거라.”

“그러니까…….”

일호는 조심스럽게 변명을 이어 나갔다.

중간중간 위상호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움막 안 한빈과 흑미랑의 앞에는 찻잔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천천히 올라오는 찻잔의 김처럼 분위기도 여유가 있었다.

한빈의 앞에 있는 젊은 사내는 공손명후였다.

장운현에서 천독과의 결전 중에 만났던 바로 그였다.

한빈은 잠시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한빈은 장운현에서 공손수를 치료해 주며 연을 맺었었다.

와불로 강북의 정보를 모으던 공공문의 후손이자 당대의 대학자인 공손수.

그리고 그의 손자인 공손명후.

아직도 한빈의 기억 속에 선한 사람들이었다.

한빈은 힐끔 흑미랑을 바라봤다.

하오문 측은 한빈을 예언 속의 어떤 인물로 착각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공손수와 공손명후도 한빈을 똑같이 대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자 한빈도 우연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계속되는 우연은 누군가의 안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 관해 묻던 한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공손수 선생님은 어디 가셨나요?”

“하하, 황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모든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암상을 맡게 되신 겁니까?”

“뭐, 저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암상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모두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요?”

“모두 다 알다니요?”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고자 암상을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뭐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흠, 팽 공자도 아신다는 거군요.”

“암상은 황궁에서 운영하는 게 아닌가요?”

“오호, 설마 했는데 팽 공자께서는 정말 알고 계셨군요.”

“물자의 동향을 파악하자면 암상을 직접 관리하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죠. 대단위의 식량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한빈은 슬쩍 말끝을 흐렸다.

지금 말한 대단위의 거래란, 암상에서 이루어지는 대량 거래보다 더 큰 단위를 말함이었다.

“네, 맞습니다. 그것은 반란의 시초겠지요.”

“아마 오늘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음.”

공손명후의 턱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를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손명후는 진시를 장원으로 합격할 만큼 학문에도 통달해 있지만, 변장에도 천재였다.

전생과는 달리 강호로 나오지 않고 나라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빈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은 여인보다도 곱다.

한빈이 알려 준 무영수를 극성까지 익힌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라면 저 나이에서는 적수가 없을 터.

아까 녹색 복면인이 증명해 보라고 한 것은 바로 무영수를 담장에 펼쳐 보라는 것이었다.

한빈이 펼친 무영수의 옆에는 공손명후가 만든 흔적도 있었다.

그 흔적을 보고 녹색 복면인은 한빈을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인정한 것이었다.

공손명후의 심각한 표정을 본 한빈이 물었다.

“제가 찾아올 것을 알고 계셨나요?”

“언젠가는 오실 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런 일이 일어날 줄도 예상하고 계셨겠군요.”

“제가 생각한 건 무림인 간의 일이지, 반란은 아닙니다.”

“오해하셨군요. 제가 말씀드린 건 단순한 곡물의 거래입니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무림인 사이의 다툼으로는 그런 대단위의 거래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전쟁은 아니지만,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손명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기울였다.

공손명후는 반은 무림인이지만, 나머지 반은 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백성의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지금 하북을 중심으로 한 식량 부족 사태입니다.”

“흠.”

“그게 누군가의 의도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오늘 암상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까? 혹시 오늘 열릴 암상을 닫아 달라는…….”

“그 반대입니다.”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짓자, 공손명후가 마른침을 삼켰다.

공손명후는 한빈의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장난을 거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

하지만 그 뒤에 밀려들어 올 파장은 한 지역이 들썩일 정도로 클 것이 분명했다.

이건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들썩인다는 말이었다.

장운현에서의 지진이 한빈 때문에 났다는 것은, 몇몇만 아는 비밀이었다.

공손명후는 울상이 되었다.

“혹시 이곳도 날리실 겁니까?”

그 말에 한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무슨 사고만 치고 다니는 사람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공손명후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공손명후는 표정을 더욱 굳혔다.

눈치라면 어디에서 지지 않을 그였다.

그런데 지금 한빈의 표정은 사고를 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드릴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빈이 설명을 이어 나가자 공손명후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 **

장원 내의 커다란 전각에 위상호가 들어갔다.

그 전각의 위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 현판에는 ‘식(食)’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오늘 위상호가 쓸어 담을 곡물이 거래될 곳이었다.

위상호는 주변을 둘러봤다.

암상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위상호도 들어오기 전 가면을 쓴 상태.

그는 천천히 군데군데 놓인 의자 중 하나로 걸어갔다.

의자 위에는 ‘사(四)’라 적힌 푯말이 있었다.

위상호는 그 푯말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힐끔 주변 상황을 살폈다.

대충 보니 다른 이들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재빨리 시선을 피한다.

강남사호는 풀이 죽은 채 위상호의 뒤에 기립해 있었다.

물론 그들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뒤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가주는 분명히 오늘 밤이 지나면 벌을 내릴 것이다.

영호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뭐, 수행할 힘도 없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일호는 상황을 적당히 꾸몄다.

영호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가주는 벌을 내릴 것이다.

영호를 납치한 그 누군가를 추격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자신들이 입은 참담한 상처를 확인한 가주가 의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가벼운 벌을 내릴 게 분명했다.

가면 속 일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것은 한빈이 전한 쪽지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위상호와 잠시 거리가 떨어진 틈을 타 누군가 은밀히 자신에게 쪽지를 보냈다.

그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해약을 공급받으려면 위상호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그 서생은 자신들이 영단산으로 가지 않고 서생을 미행하다가 위상호에게 잡힐 것을 예상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니 등골이 서늘했다.

예정에 없는 이중 첩자 노릇을 해야 하다니!

거기에 보상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전부였다.

며칠 사이에 찬란하게 빛나던 먼 미래는 모두 허물어졌다.

그때였다.

가면 속 일호의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본 이후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어떻게 상대를 알아본다는 말인가?

하지만 일호는 그 복장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서생의 복장이었다.

참 재수 없게도 며칠 전이나 지금이나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내공으로 의복의 정갈함을 유지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가 왜 여기에?

암상에 온 것은 알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곡물 경매에 참여할 줄을 몰랐다.

오늘 열릴 암상은 크게 세 가지 부분이다.

그것은 바로 의(衣), 식(食), 주(住).

의는 의복과 장신구 그리고 희귀 물품의 경매가 열리는 자리였다.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경매에 참여한다.

그리고 주(住)는 장원과 땅을 거래하는 경매 장소이다.

주의 경매에서는 대부분 비밀 창고나 안가를 위해 익명의 거래를 한다.

마지막이 바로 식(食)이라 불리는 곡물 시장이었다.

일호의 의문은 당연했다.

서생이 왜 곡물 시장에 온다는 것인가?

의문도 잠시, 일호는 힐끔 위상호를 바라봤다.

분명히 위상호의 거래를 방해하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일호는 서생이 모든 곡물을 가져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런 악랄한 성격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이번 거래를 휩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주인 위상호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토끼 가면을 쓴 자였다.

그는 학자 복장을 한 자로, 그냥 보기에도 기품이 흘러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 곡물 시장의 진행자였다.

물론 그는 공손명후였지만, 다른 이들이 알 리 없었다.

그의 뒤에는 여러 개의 물건이 보자기에 덮여 있었다.

그것은 곡식이 들어찬 창고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그 표식을 경매에서 취하면, 암상은 경매의 승자에게 창고의 지도와 열쇠를 준다.

암상의 이런 방식은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일호는 주변을 쓱 살폈다.

곡물 경매에 참여한 이들은 스무 명 남짓.

생각보다 치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드디어 토끼 가면을 쓴 자가 앞으로 나왔다.

“경매에 참여해 주신 상인 여러분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저희 암상의 곡물 경매는 철저하게 익명성이 보장되니 걱정하지 마시고 입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첫 번째 상품부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상품은…….”

토끼 가면을 쓴 공손명후가 경매 방식에 관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공손명후는 설명을 마치고 뒤쪽을 걸어가 첫 번째 보자기를 걷어 냈다.

그곳에는 가마니 위에 숫자가 적힌 깃발이 있었다.

십(十).

순간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십이란 십 섬을 뜻하는 거래 단위.

한 섬은 보통 장정 한 명이 일 년 동안 소비하는 양이었다. 무게로 치면 대충 이백사십 근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러니 십 섬은 이천사백 근에 달한다.

많다면 많을 수도 있겠지만, 이곳 암상에서 거래하는 양치고는 너무 적었다.

하지만 암상을 욕할 수도 없는 것이, 경매에 내보낼 곡식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경매를 의뢰한 자의 권한이지 암상의 권한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위상호의 표정은 가면 갈수록 구겨졌다.

계속해서 단위가 줄어든 것이었다.

위상호는 암상의 곡물 경매에 몇 번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의 경험 중 이렇게 적은 단위로 거래된 적은 없었다.

위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토끼 가면의 사내가 마지막 보자기를 걷어 냈다.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거래되었던 양을 초월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천(二千).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허, 저걸 누가 입찰하나?”

“저걸 보관할 창고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번 경매는 조금 이상하네그려.”

모두가 한마디씩 할 때, 위상호만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이번 곡물만 손에 넣으면 강북은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식량을 장악하고.

돈줄을 통제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을 움직인다.

이것이 위상호의 계획이었다.

눈치를 보니, 너무 큰 거래 단위에 모두가 의지를 잃고 있었다.

토끼 가면의 사내가 경매를 시작했을 때였다.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서생 복장을 한 사내가 숫자가 적힌 푯말을 들어 올렸다.

순간 위상호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푯말을 들었다.

마지막 경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