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이삭 줍는 공자님 (6)
한빈은 그 철전을 불상의 손 위에 던졌다.
‘백발백중.’
불상의 손 한가운데에 철전이 박힌다.
철전이 박힌 곳은 부처님의 손바닥 중 손금이 있는 곳.
순간 불상이 살짝 흔들렸다.
투두둑.
마차가 지나가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불상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인기척만 느껴질 뿐,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빈은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달빛을 받은 신형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 신형들은 한빈을 포위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흔히 보는 야행복을 입지 않았다는 점.
수풀과 잘 어우러지는 녹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녹색의 복면.
그들은 이곳에서만 활동하는 무사들이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암상의 경비병.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무사가 한 발 나왔다.
“겁도 없이 어찌 이곳에 발을 디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곱게 돌아가거라.”
목소리를 확인한 한빈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쳐들어가느냐?
정중하게 요청하느냐?
한빈은 그중 후자를 택했다. 목소리의 주인에게 연륜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긋한 나이의 인물이 분명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암상의 주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암상의 주인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후딱 전해 주시지요.”
“네가 암상의 불문율을 깨려는 것이냐?”
“그냥 전해 주십시오. 자꾸 그러시면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네놈이 개작두 앞에 목을 들이미는구나.”
“개작두가 눈에 아른거려도 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공맹을 공부하는 이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한빈은 자신의 복장을 가리켰다.
그는 누가 봐도 서생이었다.
녹색 복면의 우두머리는 기가 찬 듯 한빈을 바라봤다.
“서생의 경공술이 그 정도라면 우리는 접시 물에 코 박고 반성해야겠군.”
“허, 내 걸음을 봤단 말입니까? 그 정도면 저도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허허, 말하는 것을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구나. 네놈이 이곳이 어디인 줄 안다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터. 좋게 말할 때 그냥 돌아가거라.”
그때였다.
뒤쪽에서 대다수의 기감이 잡혔다.
한빈은 아무 말 없이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녹색 무복을 입은 무사 이십여 명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터벅터벅.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빈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가온 이십 명의 복면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에는 흑미랑이 밧줄에 묶인 채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미랑은 어색하게 웃었다.
“조심한다는 게 걸렸네요. 죄송해요, 공자님.”
“뭐,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따라올 걸 알고 계셨다고요?”
“궁금한 걸 참는다면 하오문의 사람이 아니지요.”
“호호,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런데 제 신분을 그렇게 밝히시면 어떻게 해요.”
“그것도 걱정하지 마시죠. 이곳에 계신 군관 나으리들은 벌써 흑 소저의 정체를 눈치채고 계셨을 겁니다.”
“군관이라고요?”
흑미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녹색의 복면인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복면인의 우두머리가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헛소리라니요? 어느 문파 어느 무림세가를 막론하고 저렇게 티를 내지는 못합니다.”
한빈은 흑미랑을 데리고 온 복면인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복면인의 우두머리가 물었다.
“무슨 티를 냈다는 말이냐?”
“저들은 모습을 나타낼 때부터 지금까지 보폭과 발을 정확히 맞추더군요. 거기에 열까지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합니다. 어느 문파도 저렇게 이동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더냐?”
“저건 훈련된 병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죠. 그것도 십 년 이상 숙련된 병사의 습관입니다. 강호인이 습관을 못 고치는 것처럼, 여러분도 병사 시절 제식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분명 황…….”
한빈의 말을 우두머리가 다급히 끊었다.
“잠깐.”
손을 보이며 말을 끊은 우두머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러십니까?”
“네가 더 말하면 우리는 너를 그냥 보내 줄 수 없다.”
“말 안 해도 그냥 보내 주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험.”
우두머리는 수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아무래도 복면 속에는 긴 수염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빙긋 웃었다.
“이곳의 주인에게 팽가의 막내가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내치지는 않을 겁니다.”
“팽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하북팽가라는 말이냐?”
“네, 맞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흑미랑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공자님, 정체를 그렇게 밝히시면 어떻게 해요!”
“뭐, 서로 일단 패부터 까고 대화를 시작해야 결론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패를 막 보여 주시다니……!”
“아군입니다.”
“네?”
“이들은 아군입니다. 뭐, 때에 따라서는 적군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흑미랑은 한빈의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말에 반응한 것은 흑미랑뿐이 아니었다.
복면인의 우두머리도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누군지 알고 아군이라는 것이냐!”
“일단 주인장 얼굴부터 보죠.”
“흠, 네가 진정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말이더냐?”
우두머리는 눈매를 좁혔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흑미랑이었다.
“대체 어떻게 우리 주인, 아니 팽 공자님을 아세요?”
“흑,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시작된 우두머리와 흑미랑의 뜬금없는 대화에 한빈이 나섰다.
“그만하시고 주인에게 날 데려가시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음.”
우두머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고민하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별채의 담장을 가리켰다.
“저기서 증명해 보시오.”
“네, 증명하지요.”
한빈이 씩 웃으며 담장으로 다가가자 흑미랑은 입을 딱 벌렸다.
복면인의 우두머리가 왜 담장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무엇을 증명하라는 건지도 자신은 알 수 없었다.
흑미랑은 왠지 자괴감마저 들었다.
왜 자신이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나타난다는 말인가?
흑미랑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담장 쪽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그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과 녹색 복면인의 우두머리가 나란히 걸어왔다.
녹색 복면인의 우두머리는 왠지 한빈을 호위하는 듯 보였다.
이전의 태도와는 완벽하게 달라진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우두머리가 흑미랑을 가리키며 외쳤다.
“풀어 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녹색 복면인들이 흑미랑의 포박을 풀었다.
포박에서 풀려난 흑미랑은 팔목을 살짝 돌린 뒤 한빈에게 달려갔다.
“공자님, 대체…….”
“쉿.”
한빈이 입술을 검지에 갖다 댔다.
순간 주변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한빈은 우두머리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우두머리는 먼 하늘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앞장서는 우두머리를 한빈은 조용히 따라갔다.
우두머리가 간 곳은 담장 쪽이었다.
그는 담장을 살짝 밀었다.
흑미랑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담장을 미는 행동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의문도 잠시, 흑미랑의 눈이 커졌다.
담장이 대문처럼 활짝 열리는 것이었다.
덜컹.
흑미랑은 이제야 담장이 기관 장치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저것은 무림인을 위해 설치해 놓은 장치일 것이다.
저 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고 담장을 넘는다면?
벌집이 될 확률이 백이면 백이었다.
담장을 지나가자, 마치 딴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작은 오솔길이 나왔고 그 옆에는 빽빽한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오솔길의 끝에는 작은 움막이 있었다.
장원 뒤에 움막이라?
누구도 생각지 못한 광경이었다.
우두머리는 움막 앞에 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움막으로 들어갔다.
흑미랑 역시 한빈을 따라 움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우두머리가 그녀를 제지했다.
“당신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는 왜 안 되나요?”
흑미랑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두머리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 전해라.”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은 사내를 향해 포권했다.
그러고는 흑미랑을 바라봤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우두머리는 정중히 손을 내밀어 안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흑미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움막 안으로 들어간 흑미랑은 눈을 크게 떴다.
겉은 움막이었는데 안쪽은 다른 세상이었다.
마치 고위 관리의 집무실처럼 안쪽은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움막처럼 보이던 작은 곳이 아니라 뒤쪽에는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것은 첫 번째 방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힐끔 돌려 한빈을 찾았다.
한빈은 방의 구석에서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한빈과 마주 앉아 있는 사내가 아까 목소리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암상이 열리는 장원 근처.
한적한 길가에서는 한 무리의 무인이 멈춰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를 따르던 다른 무인들은 모두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점점 기세를 강하게 피워 올리자, 무인들이 몰고 온 수레의 말들이 투레질한다.
휘잉.
무사들보다 감각이 뛰어난 말이 더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진정하시지요.”
“너는 이런 일도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느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위상호였다.
위상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의 아들 위지천.
위상호가 이리 노기를 띠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하북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이득까지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틀어지고 있었다.
위상호는 며칠 전 그의 아들 위지천에게 곡물 시장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누군가가 추수한 곡물을 모두 쓸어 가고 있었다.
위지천이 보낸 서찰을 받은 수하들이 움직였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믿고 보낸 강남사호가 실종된 것이었다.
위상호는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암제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암제나 금선이나 모두 운이 없어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불운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위상호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였다.
수하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타다닥.
“가주님, 급하게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그게…….”
수하는 말끝을 흐리며 가주 위상호에게 다가갔다.
그는 조용히 상체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위상호는 손짓했다.
귓속말을 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수하는 위상호의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보고를 들은 위상호가 눈을 크게 떴다.
“어서 안내하거라.”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주님.”
수하는 재빨리 앞장섰다.
가주 위상호는 다른 이들은 대기시킨 뒤 수하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자 수풀로 우거진 곳이 나왔다.
순간 위상호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강남사호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옷은 여기저기가 다 구멍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