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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426화 (426/621)

426. 이삭 줍는 공자님 (5)

걸음을 멈춘 한빈이 쓱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직도 울상이 되어 있는 영호가 있었다.

영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빈을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무사님은 잠시 여기에 계셔야겠습니다.”

“뭐, 그러지요.”

영호가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한빈은 흑미랑과 함께 장원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영호는 슬쩍 안쪽을 바라봤다.

강호에서 칼밥을 먹은 지 오래된 영호가 암상을 모를 리 없었다.

더욱이 강남은 그의 주된 활동 무대.

하지만 한빈이 강남의 암상에서 왜 곡물을 사려는지 따위는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몽유병에서 벗어날 방법만이 중요했다.

영호가 오늘 암상이 서는 장원의 담벼락에서 기웃거릴 때였다.

누군가 영호를 불렀다.

“영호 선배 아닙니까?”

순간 영호는 미간을 좁혔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영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영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과는 견원지간이었다.

그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일호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왔는가?”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영호 선배.”

일호는 은밀하게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본 영호는 그가 이끄는 곳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영호는 일호의 뒤를 따르며 검집을 꽉 잡았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찾아온 경쟁자였다.

그의 의도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혹시…….

영호는 자신의 이상 증세가 일호가 짠 계략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보았다.

물론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일호와 자신은 위씨세가의 안팎을 책임지는 해결사였으니까.

앞장서는 일호는 장원에서 이백 걸음은 족히 떨어진 수풀 속에서 멈췄다.

그가 멈추자 영호는 재빨리 검을 뽑았다.

스릉.

여기까지 오면서 영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일호라 확신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호가 뒤쪽으로 물러나며 검을 잡았다.

펄쩍.

그는 검집을 앞으로 내민 채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것입니까? 영호 선배!”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나머지는 어디 있지?”

영호는 주변을 매의 눈으로 훑었다.

순간 일호의 뒤쪽에서 나머지 강남사호가 나왔다.

그중 참지 못한 삼호가 앞으로 나왔다.

“이 새끼가 어디서 검을 뽑아. 선배랍시고 봐줬더니…….”

삼호는 말을 멈췄다.

일호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 모습에 영호가 외쳤다.

“어디서 수작을 벌이려고 하는가?”

그러나 질문을 던진 영호는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일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어디서 많이 본 호리병이었다.

백색의 호리병은 크기도 똑같았다.

“이 호리병을 아십니까?”

“그건…….”

영호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몽검이라 불리는 몽유병의 치료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에 일호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저희는 선배가 이걸 스스로 먹는 것을 봤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

“저희야 억지로 먹었다지만, 당신은 왜 스스로 이 약을 먹은 겁니까? 진짜 배신을 한 거였습니까?”

“배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얼마 전 위씨세가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긴급 서찰을 전하는 전서구였지요.”

“그래, 그건 내가 보냈다.”

“그럼 사실이군요.”

“사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서찰에는 그동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가문을 떠나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낸 전서구가 아닌데……. 대체 누가 보냈다는 말이냐?”

“분명 당신의 필체였습니다.”

“그게 무슨…….”

영호는 말을 멈추고 장원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서생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때 일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주님은 저희에게 당신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오, 오해다. 내가 가문을 배신할 리가 있겠느냐?”

“당신은 본래 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주님은 이번 일이 끝나면 나를 양지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배신을 하겠느냐?”

“뭐, 그렇다고 치고요. 저도 지금은 당신의 배신에 대해서 조금 이상한 점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제 손으로 당신의 목숨 줄을 끊어 놓기는 미안하더군요.”

“…….”

“한솥밥을 먹은 지 좀 되어서 그런지, 미운 정이 꽤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검 좀 쓴다는 자객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떡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딱 숨만 붙어 있더군요.”

그의 말에 영호는 자신의 검집을 살폈다.

아무래도 몽검이라는 병이 발작할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미안하다. 내 고의는 아니었다.”

“당신이 미안하다고 할 일은 아닙니다. 목숨을 노리고 온 자객을 그냥 돌려보낸다면 선배가 아니죠.”

“흠.”

“그래서 저희가 직접 나섰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서생은 보통 고수가 아니었습니다.”

“서생이라고 했나?”

영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서생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생은 마교의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헉, 그게 무슨 말이냐?”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우리도 서생의 강압에 못 이겨 심인멸혼단을 먹었습니다.”

“심인멸혼단이라니…….”

“독이 마음에 각인되어 완벽한 해약이 없다는 그 독 말입니다. 거기에 그 독은 영혼이 사라질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하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고통은 확실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고통을 맛봤으니까요!”

“자, 잠시만 기다려 봐라. 지금 그 서생이 마교의 인물이고, 그게 심인멸혼단이라고?”

영호는 일호가 들고 있는 백색 호리병을 가리켰다.

일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드신 게 심인멸혼단이고 이건 그 해약입니다. 뭐, 독을 제거하는 해약이 아닌 건 아시겠고. 그러니까…….”

일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현재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호는 처음 이야기를 꺼내며 영호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 결과, 영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일호는 그런 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가장 약삭빠르다고 자부하는 것이 영호였다.

하지만 일호가 봤을 때, 가장 멍청한 것이 영호이기도 했다.

멍청하지 않다면 양지에 서게 해 주겠다는 가주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

살수 출신의 무사를 위씨세가의 대표로 내세운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위씨세가의 무사가 살수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 파장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할 것이었다.

일호는 표정을 수습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영호는 표정을 굳혔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서생은 마교의 고수였다.

자신은 몽유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몽유병이라 착각한 것은 서생이 자신을 점혈해서 혼절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무 느낌도 받지 않았는데 수혈을 제압당했다라?

거기에 자신이 잠든 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제와 오늘은 수많은 전서구가 서생에게 날아왔다고도 했다.

이게 어찌 가능한 일인가?

더 놀라운 것은 서생과 같이 있던 하오문의 여인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고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영호는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이런 엿 같은 일이!”

영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치며 콧김을 뿜었다.

그 모습에 일호가 손바닥을 보이며 막았다.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 보시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냐! 어서 돌아가서 가주님께 알려야…….”

“심인멸혼단은 한 달에 한 번 해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게 고통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고요.”

“…….”

“해약의 값은 아실 테지요. 과연 위상호가 우리에게 해약을 구해 줄까요?”

“흠.”

“모른 척 서생의 곁에 붙어 계십시오. 그리고 상황을 봐서 그쪽에 붙으십시오.”

“지금 뭐라 했는가?”

“그게 살아남은 유일한 방법입니다.”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그자의 해약이 없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겁니다. 우리야 정파에 붙든 사파에 붙든 마교에 붙든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이승에 두 발을 붙이고 있는 게 상책이죠.”

“흠.”

영호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한빈이 휘적휘적 장원을 가로지르자 옆에 있던 흑미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보고 안내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장원을 거닌다.

더 이상한 것은 암상이 열리기까지는 앞으로 두 시진이나 남았다는 점.

그런데 왜 이리 일찍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암상의 경매에 참가할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짧은 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흑미랑의 머릿속에 의문이 쌓여 갈 때였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한빈의 모습에 흑미랑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공자님.”

“흑 소저도 이곳에 잠시 기다려 줘야겠습니다.”

“제가요?”

“네. 흑 소저는 이곳에서 잠시만 달구경을 하고 계세요. 제가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암상은 처음이시잖아요.”

“암상은 처음이긴 한데 이곳의 주인과는 아는 사이입니다.”

“그게 무슨 말……. 앗, 이것도 비밀이죠?”

“정답입니다.”

한빈이 빙긋 웃자 흑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한빈은 그 모습에 빙긋 웃고는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게 보고 있던 흑미랑이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한빈은 그녀에게 이곳에서 기다리고 했지만, 그녀의 몸에는 하오문의 피가 흐른다.

강호에서는 천시받고 있지만, 중원 최고의 정보상은 바로 하오문이었다.

하지만 흑미랑은 그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한빈을 만나고 나서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암상이 열리는 위치를 안내해 주긴 했지만, 이곳에 와서는 자신보다 더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호북 지부 하오문의 수장인 자신이 몰라서는 말이 안 되었다.

묘한 자존심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빈이 사라진 곳을 한번 보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은밀한 경공술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다.

* * *

한빈이 도착한 곳은 장원의 깊숙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불상이 하나 있었다.

한빈은 그 불상을 알고 있었다.

이 불상은 장운현에서 봤던 그 불상과 흡사했다.

한빈은 이 장원에 오면서 이 불상을 확인했다.

그는 이 불상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별채로 온 것이었다.

본래에는 없던 계획.

하지만 불상의 주인을 만난다면 오늘의 일이 조금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한빈은 주위를 확인했다.

별채의 주변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별채의 옆에는 정자가 하나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자와 별채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빈은 조용히 불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불상은 장운현에서 봤던 것과 판박이였다.

하지만 그 크기는 장운현에 있는 불상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한빈은 품 안을 뒤졌다. 그러고는 철전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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